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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중관학노트

중관학9강: [불 없는 연료는 연료가 아니다.]

by 마음길 2022.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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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없는 연료는 연료가 아니다.]

 

불이 붙지 않으면 연료가 아니다. 연료에 불이 붙으니까 연료임을 안다. 불이 붙으면 그때야 연료임을 알게 된다. 불이 붙지 않으면 아무리 장작을 많이 쌓아놨어도 그 장작은 정체불명이다. 법성계에 나오는 무명(武名) 무상설일체(無常說一切)-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고, 일체가 끊어져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불붙기 전에는 정체불명이다.

 

그러면 불 없는 열들은 있는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헛간에 쌓아놓은 장작, 아직 불붙지 않은 성냥과 같은 것이 불 없는 연료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옳지 않습니다. 장작의 경우 불이 붙어야 비로소 연료가 됩니다. 장작의 경우 불이 붙기 전에는 장작은 정체불명입니다. 장작을 헛간에 쌓아놓았는데 갑자기 지붕의 귀퉁이가 무너지면 지붕을 수리하면서 헛간에 있는 장작을 가져다가 서까래로 쓸 수 있습니다. 그럼 헛간에 쌓여 있던 장작은 연료가 아니라 건축 재료가 됩니다.

 

그동안 연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건축 재료였다. 어떻게 건축 재료가 되었는가? 서까래로 쓴 다음에 즉 결과가 발생한 다음에 원인이 규명된다는 이야기이다. 원인 때문에 결과가 생기는 게 원래 정상인데 즉 인식론적으로는, 인식의 차원에서는, 인식 앎의 차원에서는 결과가 생겨야지만 원인이 정체가 드러난다. 원인 때문에 결과가 있는 것은 존재론적 차원이다. 즉 원인에서 결과가 발생하는 것은, 존재의 세계에서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인식의 세계에서는 결과가 발생해야지만 결과 때문에, 원인의 정체가 비로소 생긴다. 그래서 원인 때문에 결과가 있고 결과 때문에 원인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하나는 존재론이고 하나는 인식론이다. 연료 없이 불이 없다는 존재론이다. 연료를 빼버리면 불이 붙을지 알 수 없다. 연료가 불의 원인이다. 연료의 존재론적 인과관계이다.

 

결과가 성립하니까 비로소 원인이 규정된다. 아주 엄밀한 이야기이다. 계속 사유화하고, 생각하고, 머리 굴려야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머리 안 굴리면 기억력이 감퇴하고, 세상에 대한 분별력이 떨어진다. 생각을 안 하면 수행을 오래 해도 잘못한다. 세상 나와서 보면 뭐가 뭔지 모르게 된다. 실제 불교 수행을 잘하는 사람은 세상일에 어떤 것이 와도 아주 분별을 잘해서, 최고의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공을 아는 사람이다. 판단 없는 것은 수행할 때만 쓰는 것이다. 수행할 때만 판단 끊어지는 것이다. 계속 따져가면서 끝까지 가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원인 때문에 결과가 발생한다고 하지만 중관학에서는 원인 역시 결과가 발생해야 비로 성립한다고 가르칩니다. 원인 때문에 결과가 있고 결과 때문에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쌍조건적인 것이 중관학적인 연기입니다.

 

조건부는 보통 한 방향이다. ‘만일 ~라면 ~.’ 조건, 전권, 후권이 방향이 일 방향()인데 쌍 조건은 방향이 쌍방향이다. 원인 때문에 결과가 있고, 결과 때문에 원인이 있다. 화살표가 쌍방향()이다. 이것이 쌍 조건이다.

 

쌍조건적인 것이 중관학적인 연기이다.  존재론적으로는 원인 때문에 결과가 발생하지만, 인식론적으로는 결과가 발생해야 원인이 성립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사물이든지 그 쓰임이 있고 나서 정체가 생기는 것이지 쓰임이 있기 전에는 모두 정체불명이다. 불과 연료의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이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담당 교수는 강의를 듣는 수강생 학생이기 있기에 담당 교수가 된다. 집에 가면 아들에게는 아버지가 되고 학교에는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님이 된다. 그러면 본래 나의 이름은 무엇인가? 교수인가? 아빠인가? 아저씨인가? 조카인가? 여러 가지 이름이 있지만 원래 나는 무엇일까? 정체불명이다. 그래서 정체가 생기는 것은 연기쌍-쌍조건, 누구를 대하느냐에 따라서 조카가 되기도 하고, 삼촌이 되기도 하고, 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아들이 되기도 하고 왔다 갔다 한다. 사자가 나를 보면 침을 흘린다. 사자에게는 고깃덩어리 먹이일 뿐이다. 이것이 연기이다. 이런 식의 연기가 바로 화엄의 법계 연기이다.

 

중관학 연기는 1 1 연기이다. 중관학 연기는 하나만 이야기하기 때문에 단순하다.

화엄의 연기는 다층적인 연기를 다 종합한다. 이것이 사사무애법계연기(事事無礙法界緣起), 일중일체(一中一切)-나 한 사람이 일체가 된다. 교수가 되고, 남편이 되고, 아빠가 되고, 아들이 되고, 조카가 되고, 고깃덩어리가 되고 즉 하나가 일체가 다 된다. 이것이 화엄의 법계 연기(法界緣起)(法界緣起)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이다. 하나 속에 온갖 이름이 다 들어가 있다. 교수, 학생, 아빠, 아들, 고깃덩어리 다 들어가 있는데 하나도 걸림이 없고 충돌을 안 한다. 사사무애(事事無礙)-일과 일, 사태와 사태가 걸림이 없다는 뜻이다. 화엄이든 뭐든 간에 다 있는 그대로이다. 화엄에서는 연기, 각론으로 설명했던 연기법을 다 끌고 와서 종합해서 한꺼번에 얘기하기 때문에 최고의 연기법이라고 말한다. 화엄의 사사무애(事事無礙)의 근본 토대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초기 불전의 연기설이다. 초기 불전의 연기설에 법경기는 안 나와 있다. 그런데 화엄 법경기는 이미 대승이다. 이렇게까지 발전한 것이다. 그래서 절대 대승 비판하면 안 된다. 그래서 부처님의 핵, 그 보석 같은 가르침을 갈고닦아서 상상 초월로 별별 장식물을 만들어 놓은 게 대승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게 초기 불전이다.

 

불과 연료 같은 경우에 장작에 불을 붙이니까 연료가 된다. 그런데 장작을 갖다가 여름에 낮잠을 잘 때 베개로 사용하면 목침이 된다. 또한 서까래로 사용하면 건축 재료가 되고 동네 싸움에서 몽둥이로 쓰면 무기가 된다. 이렇게 나무 장작 하나가 목침, 서까래, 무기 등 4가지의 용도로 쓰였다. 이렇게 그 용도의 쓰임에 따라 무한의 정체가 생긴다. 쓰임에 따라 정체가 생긴다. 정체는 쓰임이 있고 나서 생기는데, 쓰임이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고 무한의 쓰임이 있다. 쓰임이 있고 나서 정체가 된다. 이것이 광명이다.

 

화엄의 핵심은 보법-어디든지 깨달음의 문이 열려 있다. 어디든지 깨달음의 문이 열려 있다. 무엇을 보더라도 무한으로 열리는, 무한소와 무한대의 상징이 화엄이다. 하나와 무한의 상징이 화엄이다. 무한은 생각 다 깨져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해탈, 열반이다. 어디든지 무한으로 깨져 나간다.

 

장작도 무한으로 깨져 나갔고, 나라는 사람도 무한으로 깨져 나간다.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세상에 방위 중에 동서남북 같은 경우는 집에 동서남북이 있고, 컵 속에도 동서남북 방향이 있다. 경주 시내 전체에도 동서남북이 있다. 동서남북이라는 이 틀은 어디든지 적용할 수 있다. 또 하나 주역의 음양오행설은 64가지 괘상이 여러 가지 인문, 사회, 자연과학적인 패턴에 적용하는 것인데 이것이 어디든지 적용된다. 인문, 현상, 음식물, 정치 등 여기저기에 다 적용된다. 이런 틀이 주역이고, 동서남북이다. 또 하나 상중하 같은 경우에도 이 방에도, 이 컵 속에도 어디든 상중하가 있다.

 

상중하, 동서남북만 알고 살았는데 화엄을 보니 깨달음으로 가는 그 관문이 어디든지 있다는 이야기이다. 무한소와 무한대-모든 것은 무한으로 열려 있다. 이것이 화엄이다. 일즉일체(一卽一切)이다.

 

무엇을 보더라도 터져나갑니다. 사사무애(事事無礙)-일과 일이 걸림이 없다. 쓰임이 있고 나서 정체가 생긴다고 할 때 쓰임은 무한 쓰임이다. 쓰임에 따라 무한 정체가 발생한다.

 

화엄경에 나오는 무한’, ‘무한소일체를 뜻하는 단어가 다른 경전에 비해서 아주 많다. 화엄경의 특징은 말을 몰라도 무한소와 무한대를 를 표현하는 말이 다른 경전과 비교해서 아주 많고 이것을 일체로 표현한다. 이것이 화엄의 핵심이다.

 

쓰임이 있고 나서 정체가 생긴다.’는 중관학은 한 가지 정체만 연기하기에 1 1 연기- 불과 연료 정도이지만, 화엄에서는 장작이 불이 붙으면 연료가 되고, 베개로 사용하면 목침이 되고, 몽둥이로 사용하면 무기가 되고, 서까래로 사용하면 건축 자재가 되고, 조각에 사용하면 조각품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화엄경의 연기는 무한으로 간다. 중관학보다 하나 더 위에 있는 게 화엄이다. 물론 화엄으로 가려면 중관의 연기법을 통달해야 한다. 그래야 화엄의 법기 연기를 이해할 수 있다.

쓰임이 있고 나서 정체가 생기는 것이 쓰임이 있기 전에는 모두 정체불명입니다. 우리는 불과 연료의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이에 대해 알 수 있었습니다. 불이 붙이니까 연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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