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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중관학노트

중관학10강: 판단의 사실성 비판

by 마음길 2022.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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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의 사실성 비판]

판단은 개념 2개 이상이 모이면 판단이 된다. 개념은 하나의 단어의 의미이다. 하나의 단어의 의미가 개념인데 ‘비가 내린다’라고 할 때 ‘비’라는 단어가 있고 ‘내린다’라는 단어가 있다. 이 2가지가 합해지면은 ‘비가 내린다’라는 판단이 된다.

‘사람’이라는 개념이 있고, ‘죽음’이라는 개념이 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라는 판단이 된다. 우리가 판단을 말로 표현하면서 살아왔는데 그것이 실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과는 무관하다는 이야기이다.

일반적으로 칸트나 비트겐슈타인 같은 서양 철학자들은 우리의 생각이 일상생활에 쓰일 때 즉 밥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말과 생각을 적용할 경우, 오류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형이상학적 초월적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 정도가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조차도 오류에 빠진다고 말한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것, 꽃이 피고는 것이 일상생활 얘기인데 이것조차도 그것을 말로 표현하고 생각으로 머릿속에 집어넣으면 논리적 오류에 빠진다고 말한다. 이것이 불교이다.

서양철학, 서양 사상은 초월적 문제든지 본질적 문제든지 형이상학적 문제가 우리의 사유를 초월한 세계의 초월적 문제, 형이상학적 문제, 본체의 문제라고 말한다.

그런데 불교는 본질의 문제, 실체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우리가 실제 살아가는 세계 전체가, 즉 모든 게 다 본질이고 실체이다. 이것을 우리가 말로 표현하는 순간 또 생각에 집어넣는 순간 다 오류에 빠진다. 그래서 불교는 어떤 논리적 오류의 범위를 즉 머리 굴려서 적용할 수 있는 대상의 범위를 무한 확장한다.

서양 사상가는 우리가 살아가는 것,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삶도 있고, 죽음도 있고 이것은 부정하지 못한다.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체험하지 못하는 문제들만 머리 굴려서 따지지 말라는 것이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이다. 우주의 끝이 있나 없나 우주에 처음에 시작이 있었나 없었나 태초에 누가 우주를 종을 치고 만들었나 안 만들었나 이런 것은 머리 굴려서 따지지 말라는 것이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이다.

불교는 초월적인 문제뿐 아니라 일상생활 전체 모두가 머리 굴려서 적용할 수 없다고 말한다. 불교가 훨씬 더 철저하다. 서양 철학자, 사상가들이 불교를 모르면서 진리를 추구하는 ‘독각의 길’을 갔기에 대단하기는 하지만 끝까지 가지는 못했다.

서양의 서양철학, 서양 사상가는 초월적 문제들, 내가 경험하지 못한 문제들에는 언어와 분별 생각을 적용하지 말라고 하지만, 불교는 세상만사 전체에 대해서 언어와 생각을 적용해 봤자 ‘다 틀렸다’라고 말한다. 끝장을 보는 게 불교이다.

비가 내린다는 판단은 즉 모든 판단은 사실과 다르다는 말이다. 실체는 불교 용어로 진여(眞如)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이다. 바깥 세계 무슨 삼매에 들어가서 드디어 깨달아서 진여를 아는 것이 아니다. 내 머리와 말과 언어와 분별과 생각이 왜곡하지 않는 것이 진여이다.

그러니까 ‘비가 내린다’는 진여가 아니다. ‘바람이 분다’도 진여가 아니다. 진여는 실제 있는 그대로인데 머리 굴리고 마음으로 그려봐도 제대로 묘사하지 못하고, 사실과 다르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모든 판단은 사실과 다르다. 그런데 그냥 다르다고 주장하면은 참 모호하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객관적으로 남에게 전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중관학이다. 너무나 합리적이다. 공에 대한 어떤 통찰을 보편화시켜서 인간의 말만 이해할 수 있으면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게 일상적인 말로 누구나 알 수 있게 해주는 게 중관학이다. 머리가 좋을 필요도 없다. ‘너 밥 먹었니? 응. 밥, 먹었어’, ‘어제 뭐 했니?’ 이거 대답만 할 줄 알면 공에 대해서 중관학 끝까지 간다.

‘비가 내린다’는 말을 다시 살펴보겠다.

창문이 있고 창밖에 비가 오고 있다. 비가 내리는데 이걸 보고서 창문 열자마자 ‘비가 내린다’하고 말한다. 창밖에 보이는 비는 내리고 있는 비이다. 이것 보고 말할 때 ‘비가 내린다’라고 두 개의 개념, 두 개의 단어를 사용해서 말한다. 이 말은 ‘비(내림)’라는 개념과 ‘내림(개념)’이라는 개념 두 개가 합쳐진 것이다. 개념 두 개 이상이 합쳐지면 판단이 된다.

우리가 머리를 굴릴 때는 항상 이 개념, 관념, 보편을 갖고서 머리를 굴린다. ‘특수함’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머릿속의 불과 실제 타는 불은 다르다. 머릿속에 타는 불을 보는 건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불을 머리에 떠올려도 화상을 입지 않는 이유가 실제 불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편으로서의 불, 개념으로서의 불이기 때문이다. 개념은 변하지 않는다. 생각 속의 불, 개념의 불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구체적인 불은 변한다. 2000도의 불, 1000도의 불, 800도의 불도 있고, 빨간 불, 노란 불, 파란 가스불도 있다. 그러나 불의 개념은 항상 똑같다. 개념을 플라톤은 ‘이데아’라고 말한다. 이데아의 세계가 개념의 세계이다. 당시에는 머리 굴리는 게 머리가 아니고 마음을 굴리는 것이었다. 생각하는 것은 영혼이 작동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뇌를 생각을 산출하는 기관으로 알고 있다. 이것을 안 지 한 200년도 안 된다. 그전까지는 심장인 줄 알았다. 범어는 마음이라고 했고 플라톤은 영혼이 있는 줄 알았다. 영혼이 생각하고 영혼이 무엇을 느끼고 이렇게 영혼이 있어서 어떤 의지가 발생하고 짠맛, 달콤한 맛을 느낀다고 생각했다. 생각하는 것이, 영혼이라고 생각했다. 영혼이 생각하는데 생각의 가장 기초가 되는 소재가 개념이다. 이 개념은 변하지 않는다. 밖의 불은 변한다.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영혼의 소재가 되는 불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영혼이 작동할 때는 변치 않는 개념을 사용해서 우리의 생각이 굴러간다고 플라톤이 생각했다.

실제 바깥에 있는 소는 별별 소가 다 있다. 송아지도 있고 큰 소, 작은 소, 황소, 얼룩소, 물소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이것이 특수한 ‘소’이다. 그런데 생각 속의 소는 딱 하나이다. 소의 개념은 한국에서 생각한 소와 미국 가서 생각하는 소는 다르지 않다. 생각 속에서 같다. 그러나 실제 만나는 소는 다르다. 한국에서 만난 소와 미국에서 만나는 소는 다르다.

우리의 생각의 소재 다시 말해 영혼의 소재인 개념은 변하지 않는다고 플라톤이 생각한다.
플라톤의 결론은 죽은 다음 우리의 영혼은 변치 않는 세계로 간다. 그것이 이데아의 세계이다. 우리의 몸뚱이는 어릴 때부터 점점 늙어서 주름살이 생기고 나중에 늙어서 죽은 다음에 썩어 없어진다. 영혼과 육체를 얘기할 때 육체는 다 썩어 없어지는데 우리의 영혼은 이데아의 세계 영원한 세계 영원한 세계로 올라간다고 한다. 이것이 플라톤의 유비추리(類比推理, analogy)이다. 엉터리이지만 그럴듯하다.

개념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개념을 소재로 해서 사유가 굴러가고, 머리(영혼)가 굴러가니까 죽은 다음에는 그 영혼이 영원한 세계에 가겠다고 생각했다.

개념은 영어로 concept 이다. 이것이 플라톤의 이데아이다. 개념-concept, 이데아- idea, 보편-universal, 일반자-generality, 공통점-commonness이 같은 말이다.
(concept=idea=universal=generality=commonness)

왜 공통점인가? 소를 볼 때 소가 얼룩소, 젖소, 물소, 소 등이 있는데 공통점이 있다. 그 공통점이 개념이 된다. 공통점만 알고 있으면 새로운 소를 처음 보더라도 그것이 ‘소’임을 알 수 있다. ‘음매’하고 울고, 머리에 뿔이 나 있고, 목이 늘어져 있고, 등이 올라가 있다. 이것이 공통점이다.

불도 별별 불이 다 있다. 성냥불, 활활 타는 산불, 가스불 등이 있지만 공통점이 있다. 뜨겁고 밝은 것 등 공통점을 보면 ‘불’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공통점이 개념이다.

영어로 되어 있는 불교책을 볼 때 concept=idea=universal=generality=commonness 이런 개념이 나오면 다 같은 얘기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런 것들이 실재한다고 보는 것이 플라톤 철학이다. 서양철학 전체는 플라톤의 존재론이다.

없는 것, 무(無 )는 상상을 하지 못한다. 서양철학에서 무(無)를 철학의 대상으로 도입한 사람들이 하이데거 같은 실존주의자들이다. 그전까지는 플라톤의 영향 때문에, 무(無)를 다루지 못했다. 하이데거 철학이 나왔을 때 유럽 사람들은 잘 이해를 못 했는데 일본 사람들이 더 쉽게 이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동양 사상은 무(無)만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노자의 『도덕경』도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불교도 무(無)를 다룬다.

0이라는 숫자가 인도에서 나온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한 11세기까지 0을 몰랐다. 로마자로 숫자를 표기했는데 0이 없다. ‘0’은 대발견이다. 인도의 숫자가 아라비아 아랍 쪽을 통해서 유럽으로 들어가자 비로소 이슬람을 통해서 서양에 0이 처음 도입되어서 대수학이 급격히 발달한다. 어쨌든 인도는 0을 발견한 민족이고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기여가 인도 사람의 0의 발견이다.

중국 한문에도 0이 없다. 동그라미를 쓰긴 하지만 나중에 생긴 것이다. 원래 0은 없었다. 나중에 0을 복잡한 한자로 쓰기는 하는데 숫자 단위가 아니었다. 동양, 일본, 한국, 중국은 무(無)와 아주 밀접하게 살고 있다.

서양은 2천여 년이 넘도록 무(無)를 생각의 대상으로 삼지 못했다. 실존주의가 나오면서 죽음을 생각하면서 무(無에)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실존주의자들은 윤회를 모르기 때문에 태어나기 전에도 없었고 죽은 다음에도 무(無)이다. 지금, 이 순간이 유(有)인데 그래서 실존주의에서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소중하다. 이것이 실존 existence 이다. 존재와 유(有)할 때 존재가 보편적 유(有)이다. 있음 그 자체이다.

컵이 여기 있다. 이것은 존재자이다. 왜냐하면 왜 다른 데 갖다 놓으면 없어지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놈. 개별적인 것. 그런데 세상 전체가 다 있다. 도대체 왜 세상이 있는가? 그런 생각도 떠올릴 수 있다. 도대체 왜 이 세상이 있는가? 왜 도대체 내가 여기에 태어났는가? 그때의 있음. 즉 모든 것에 적용되는 ‘있음’ 그 자체, ‘있음’을 실존주의에서 추구한다. 실존 existence을 추구한다. 그러나 평소에 우리는 이런 생각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러나 죽음을 떠올리면 그다음부터는 하나하나가 참 신기하다.

실존주의는 유()를 점점 강화한다. 가장 바람직한 삶은 현존재 Dasein 이라고 말한다. 돼지처럼 꿀꿀거리면서 먹고 사는 것이 아니고 실존을 느끼며 사는 사람이다. 항상 나는 왜 존재하는가? 왜 세상이 있는가? 하면서 실존을 느끼면서 항상 존재의 빛을 느끼고 사는 사람들, 모든 것을 신비하게 바라보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바로 현존재이다. 일반 사람들은 그냥 배부른 돼지처럼 산다. 배고픈 소크라테스처럼 항상 이 존재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사람들은 바라보는 모든 세상 하나하나가 소중해진다. 이것이 실존주의의 최종 결론이다.

하이데거는 화가 가운데 이 실존을 그림에 표현한 사람이 있는데 그들이 빈센트 반고호, 세잔느라고 말했다고 한다. 결론만 얘기하면 다 구라다.

 

실존주의와 불교의 공통점은 존재에 대한 의문, 그 출발점에 있다. 존재에 대한 의문, 왜 내가 살아있는가? 삶이 무엇인가? 세상이 무엇인가? 이것은 같지만, 불교는 이것을 이 의문이 엉터리 의문이었구나 하고 해소한다. 왜냐하면 내가 탄생하기 전에 무()을 설정하고 죽은 다음에 무()를 설정하니까 지금 이게 다 신비로워 보인다.

 

그러나 탄생하기 전에 무()를 내가 체험한 적이 없어요. 죽은 다음에도 무()를 체험 할 수 없다. 그러니까 지금은 유()를 체험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존재하는구나 참 신기하다고 하는 것이 허구의 느낌이다. 사실 생각 속에만 있는 것이다. 마치 어린이들에게 홍콩 할매귀신하면 겁을 먹고 우는 것처럼 허구인데도 불구하고 그 현존재의 실존감이 홍콩 할매귀신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그 실존감에 대해서 허구의 실존감이라고 말한다. 의문의 해소이다. 고집멸도(苦集滅道) 할 때 고멸(苦滅), 분별고의 소멸이다. 분별고 즉 종교적 의문, 철학적 의문은 모두 분별이 만든 것이다. 나는 누구일까? 세상이 왜 있을까? 죽으면 어떻게 될까? 내가 왜 태어났나? 이런 의문들은 모두 머리가 만들어 낸 것이다.

한 학기 동안 머리가 만든 게 얼마나 엉터리인지 이것을 배울 것이다. 나는 누굴까? 세상이 뭘까? 죽으면 어떻게 될까? 참 궁금하다. 왜 우주가 있는가? 참 궁금하다. 여러 종교에서 각자 답을 낸다. 기독교는 천지 창조가 있었고, 하느님이 있었는데, 믿으면 어디 가고, 안 믿으면 지옥 가고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나? 죽어봐야 안다. 그런데 죽으면 전해줄 수가 없다. 확인이 안 된다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에 그 답을 준다. 내가 누굴까? 죽음이 뭘까? 왜 태어났나? 우주가 왜 있나? 우주가 어떻게 생겼나? 이런 의문들은 누가 만든 것인가? 내가 머리 굴려 만든 것이다. 내가 머리 굴려서 사유, 분별이 만든 것이다. 우리가 머리 굴리는 것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 수 있다면 그런 의문들은 다 진짜 의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머리 굴리는 방식을 연구해 보니 세상과 전혀 무관하다. 따로 논다. 그러니까 결론이 다 가짜 의문임을 알게 된다. 종교적 철학적 의문은 다 가짜 의문이다. 그래서 의문이 해소된다. 분별고의 해소이다.

서양에서는 철학 전체 역사를 통해서 보면 항상 유(有)만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유의 세계의 기초가 되는 것이 oncept=idea=universal=generality=commonness에서 이야기하는 개념이다. 이것이 실재하는 줄 알았는데 불교에서는 천체, 개념들이 연기한 것이기 때문에 다 공 하다. 실재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우리 생각의 소재 중에 가장 기초가 되는 게 개념인데 집을 짓는 데 비유하면은 벽돌에 해당한다. 벽돌을 쌓으면 기둥이 되듯이 개념 두 개가 예를 들면 ‘비가 내린다’라는 최소한의 판단 하나가 만들어진다. 개념 3개가 합해져서 ‘판단’이 되기도 한다. ‘내가 밥을 먹는다’는 ‘나’, ‘밥’, ‘먹음’ 개념이 3개이다. “항아리 하나가 있다.”도 ‘항아리’, ‘하나’, ‘있음’ 개념이 3개이다. 용수 스님 제자 중에 아리아 제바 스님의 『백론(百論)』에 보면 개념 3개짜리 판단을 비판하는 논법이 있다. 지금은 개념 2개짜리 판단을 비판하는 것이다.

비가 내릴 때 실제로는 하나의 이 사건이다. 강우 현상이 창밖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이다. 그런데 말로 표현할 때는 ‘비가 내린다’라고 이렇게 둘로 나눠진다. 여기서 ‘비’는 내리는 비이다. 그런데 또 ‘내린다’라고 말을 이어 붙인다. 내리고 있는 비인데 그것이 또 내린다고 잘못된 말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가장 기초적인 잘못된 말조차도 세상을 무한함을 알 수 있다.

종교적 철학적 의문들을 중관학에서는 내가 살아있는 이 순간에 끝장을 낸다고 이야기했는데 어떻게 끝장을 냈냐 하면 ‘우리의 생각과 언어가 세상과 무관하구나’, ‘따로 작동하는구나’라는 사실을 내가 스스로 자각함으로써 생각과 언어로 만들어진 종교적 의문, 철학적 의문들이 게 다 허구의 의문, 가짜 의문임을 자각함으로써 해소된다.

종교적, 철학적 문제를 잡아버리는 것이 중관학의 방법이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교화방식이다. 선승도 마찬가지다. 불교는 항상 회광반조(回光返照)-문제를 점검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일까? 하는 문제, 의문이 생길 때 답을 내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불교는 빛을 돌려서 거꾸로 너를 비추어 보라는 것이다. 내가 지금 이렇게 묻고 있는 입각점이 옳은 것인가? 내 의문이 옳은 것인가? 이걸 보라는 이야기이다. 이것이 불교적 방식이다. 부처님도 그렇게 하셨고 선승도 똑같고, 중관학의 방식도 전체가 회광반조(回光返照)이다.

중관학의 방식은 종교적, 철학적 의문이 떠올랐을 때 그 의문을 논리적으로 검토해서 이것이 실재 의문인지 허구인지를 폭로하는 것이다. 다 허구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 의문을 해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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