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 부처님의 설법 가운데 무기설(無記說)이 있다. 아무 기록도 하지 않는다. 침묵의 설법이다. 부처님께 뭘 여쭈니까 가만히 계시면서 답을 안 하신다. 선으로 얘기하면 양구, 가만히 계신다. 형이상학적인 문제들 세상에 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또 세상이 영원합니까? 이어집니까? 단절됩니까? 하는 이런 질문들. 영혼과 육체가 똑같습니까? 다릅니까? 깨달은 분이 열반하시면 어딘가에 존재하십니까? 아예 안 계십니까? 이런 문제에 대해서 답을 안 하신다. 이것을 무기설이라고도 하고 다른 말로 치답(置答)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하지 않고 그냥 방치해 버린다. 속된 말로 개무시이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가만히 계신다. 개무시이다. 카톡 할 때 답장 안 하면 개무시이다. 비슷한 것이다. 어려운 문제를 여쭈었는데 가만히 계신다.
보통은 이 무기설 치답에 대해서 서양 불교학자, 일본 불교학자들은 그 문제, 질문이 수행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답을 안 하셨다고 설명한다. 물론 그런 말도 있다. 독화살에 맞았는데 누가 그 독화살을 쐈을까? 어떤 독이 묻었을까? 를 생각하는 것보다 당장 그 화살을 빼야 한다. 이렇게 그런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독화살에 비유해서 그런 질문에는 답을 내지 말라고 부처님께서 설하신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다들 이야기한다. 독화살의 비유가 나오는 경전이 전유경(箭喩經)인데 이 경을 보면 침묵으로 끝나는 게 절대 아니다. 난문(難問)-어려운을 누군가 하면 부처님께서 일단은 침묵하신다. 이것이 무기, 치답과 같은 것이다. 침묵 후에 반드시 연기법을 설하신다. 그런데 서양 불교학 책에서는 이 이야기는 안 한다. 침묵만 이야기한다. 12연기, 4성제, 3 법인 설법을 하신다.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침묵하셨다가 연기법으로 답을 하신다. 다시 말해 동문서답하신다는 것이다. 영혼과 육체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하고 여쭈면 가만히 계셨다가 12연기, 그다음 세상에 끝이 있습니까? 없으니까? 여쭈면 가만히 계시다가 또 12연기. 동쪽을 물어봐도 서답을 하고 상투적이다. 남쪽으로 물어봐도 서답이다. 왜 그럴까? 이런 질문들은 연기를 모르기 때문에, 연기에 대해서 무지하기에 생긴 가짜 질문이라서 답을 안 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어떻게 비유하냐면 이런 질문은 “소의 뿔을 쥐어짜면 우유가 몇 말 나올까?”, “석녀(石女)이나 황문(黃門)를 보고서 그(녀)의 아이 얼굴이 흴까, 검을까? 라고 궁금해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난문들, 어려운 질문들- 영혼과 육체가 같은가? 다른가? 세간과 자아에 끝이 있나? 없나?-이 잘못된 질문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세상과 나는 항상 함께 간다. 나와 세상은 항상 함께 있다. 세상, 우주가 없어지면 나도 없다. 또 내가 죽어버리면 우리도 없어진다. 세관과 아트만은 초기 부처의 보면 항상 함께 추구한다. 세상과 나는 나누어지지 않는다.
세간, 자아가 상주 하나,, 무상한가? 여래 사후 존재하는가, 아닌가? 등 60여 가지가 있다.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부처님께서 침묵하신다. 어떤 질문을 여쭙더라도 침묵하신 다음에 반드시 또 연기법을 설하신다. 항상 동문서답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질문은 연기를 모르기 때문에 나온 허구의 질문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영혼과 육체가 같은가? 다른가?
이 질문에 왜 답을 안 하는가? 왜 잘 못 되었을까? 이 사람은 영혼과 육체를 벌써 나눈 다음에 질문하는 것이다. 영혼과 육체는 나눠지지 않는다. 어디까지가 영혼이고 어디까지가 마음인지 나눌 수 없다. 영혼을 정신이라 해도 된다. 정신이 없는 몸은 없고, 몸이 없는 정신이 없다. 뇌도 마찬가지다. 뇌가 없어지면 마음도 사라지고, 마음이 사라지면 뇌도 물렁해진다.. 뇌도 그냥 고깃덩어리가 될 뿐이다. 내 마음이 관여 안 하고서 있을 수 있는 물질이 있는가? 상상 속의 물질은 내 머릿속에서의 전기 현상이기 때문에, 실제 물질이 아니다. 내 마음이 관여 안 하고서 집만 따로 있는 거 있을 수가 없다. 반드시 내가 보든지 듣든지 관여해야 한다. 거꾸로 물질 없이 마음만 있는 거 있을 수 있는가? 밤에 자면서 꿈을 꿀 때도 뇌가 작동하기 때문에, 꿈을 꾸는 것이다. 물질 없는 마음 없고 마음 없는 물질 없다. 그런데 질문자는 마음과 물질을 구분한 다음에 이게 같으냐? 다르냐? 를 질문하고 있다. 그래서 허구의 질문이다.
‘비가 내린다’고 할 때 ‘비’와 ‘내림’은 나눠지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말을 할 때 비가 따로 있고 ‘내린다’라고 말하는 사고방식과 같은 것이다. 영혼과 육체를 나눈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중관학의 설명방식은 현대 문명, 과학, 서양철학에서 얘기하는 걸 다 초월한다.
지금도 서양 철학자, 심리 철학자들은 우리의 ‘정신과 육체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두고 학술 대회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그런 것 하지 말라고 침묵하시고 그다음 연기법을 설하신 것인데, 자기들이 임의로 나눈 다음에 ‘영혼과 정신과 육체가 어떤 관계인가?’ 하고 아직도 학술대회를 하고 있다. 최첨단 철학 사상, 사조, 서양의 전 세계적인 최첨단 과학의 수준을 훨씬 넘는 얘기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이야기에 약간 집중해서 한번 생각하면 좋겠다.
[세간, 자아에 끝이 있나, 없나?]
이것은 현생과 내생의 관계이다. 내가 죽으면 끝인가? 이어지는가? 하는 생각이다. ‘내가 죽으면 끝이다’ 하면 이상하다. 이 말은 윤회가 없다는 말이기 때문에 유물론자라는 말이다. 끝이 아니라고 하면 윤회가 있다는 말이고 자아가 있다는 말이 된다. 이것도 이상하다.
죽을 때 내생이 있는가? 없는가? 참 궁금하다. 내가 죽는 순간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도 지금 이 찰나에 있는 모든 것들, 보이는 모든 것들을 몸뚱이 하나도 다음 찰나로 넘어가지 못한다. 내 몸과 마음뿐만이 아니라 바깥에 보이는 풍경, 들리는 소리도 그다음 찰나로 끌고 가지 못한다. 불상(不常), 찰나찰나 무상(無常)- 이어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매 순간순간 전 우주가 다 끝나버리고 있지 다음으로 가지 못한다. 전 우주가 모두 계속 새롭게 나타나고 있다.
다른 종교에서 천지 창조 얘기가 하면서 새롭게 나타난다고 말한다. 만 년 전, 8천 년 전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이다. 지금, 이 순간에 온 우주가 새롭게 창조되고 있다. 반대로 천지 종말도 몇백 년 후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이다. 전 우주가 내 몸뚱이부터 시작해서, 모두 무너지고 있다. 그냥 다 끝난다는 말이다. 전 우주가 새롭게 생기는 순간이 이 순간이고, 전 우주가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 이 순간이다. 발생하는 순간이 소멸하는 순간이다. 발생 즉(卽) 소멸, 생즉멸(生卽滅)이다. 창조가 종말이라는 이야기다. 언어, 말이 다 무너진다. ‘생겼다’, ‘변한다’ 하는 것들이 다 무의미한 말이다. 어쨌든 지금 이 찰나, 지금, 이 순간을 다음 찰나가 이어가지 못한다.
반대로 ‘죽은 다음에 내가 그냥 끝이다. 아무것도 없는가?’ 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도 완전히 끝나는 게 없다. 내가 무언가를 보다가 ‘안 볼래’하고, 고개 돌리면 그것은 거기서 끝나지만 무언가 또 나타나서 이쪽이 보인다. 아무것도 ‘안 볼래’ 하고 눈 감아 버리면 컴컴한 것이 보인다. 보인다는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완전히 끝나지도 않는다. 지금, 이 순간도 부단(不斷)이다. 그래서 불상부단(不常不斷)=무상무단(無常無斷), 반야심경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것이 바로 연기이다.
콸콸 흘러가는 거대한 흐름만 있을 뿐이다. 그것이 그냥 실상이다. ‘이것이 나다.’ 혹은 ‘내가 있다’든지 이렇게 우리가 생각 속에 선을 긋고, 잘라서 살아간다. 마치 비 내림의 하나의 현상을 ‘비’가 있고 ‘내림’이 있다고 생각 속에서 잘라서 ‘비가 내리고 있다’하고 말하는 것과 같다.
견성(見性)하면 신심탈락(身心脫落), 몸과 마음이 모두 떨어져 나간다. 그냥 콸콸 흘러가는 전 우주적인 명멸(明滅), 마스게임, 모자이크, 한 사람만 존재하는 흐름이다. 그냥 흘러가는 게 세상이다. 여기에 욕심을 내서 ‘여기까지가 나다’ 하고 탐욕, 분노하고 분별하면서 ‘비가 내린다’하고 말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연기법을 모르기에 나온 질문이라서 부처님께서 연기법을 알려주기 위해 침묵하신다. 부처님의 침묵은 침묵이 아니고 질문한 사람의 사고방식을 고쳐주는 것이다. 이것이 회광반조(回光返照)이다. 질문한 그 사고방식을 연기법을 통해서 점검하라는 이야기이다.
[세간, 자아에 끝이 있나, 없나?]는 변무변(邊無邊), 현생과 내생(미래)의 관계이다. 이것은 용수 스님의 『중론』제27장 관사견품(觀邪見品)에 나와 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사견(邪見)이다.
[세간, 자아가 상주한가, 무상한가?] 이것은 전생과 현생의 관계인데 논법은 똑같다. 전생이 현생으로 이어졌나? 현생이 새롭게 생기는 건가? 하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상무상(常無常) 이다. 즉 상무상(常無常)의 문제는 전생과 현생의 관계이다.
서양 학자들 다 틀리다 해석한다. 변무변(邊無邊)의 문제도 우주의 공간적 한계의 문제라고 말한다. 로켓 타고 가면 벽이 나오나? 안 나오나? 하는 문제로 말한다. 그리고 상무상(常無常)의 문제는 시간적 시작의 문제, 태초에 누가 창조했는가? 원래부터 계속 있었는가? 하는 문제로 이야기한다. 아무 관계없다.. 부처님은 그런 얘기하신 적 없다. 현생과 내생, 전생과 현생의 관계는 불전에서 하는 이야기이고 서양 불교학자들이 멋대로 써놓은 것들, 칸트 철학에서 그렇게 이야기한다. 칸트 철학에 부처님 교리를 뒤집어씌운 것이다.
항상 개론서 볼 때 유명한 불교학자들이라고 해도 다 믿지 말아야 한다. 경을 보고 내가 직접 공부하고 확인해야 한다. 부처님께서도 역시 회광반조(回光返照)의 방식이었다. [영혼, 육체가 같은가, 다른가?]하는 질문이 의미에 있어서 영혼과 육체가 다른 것 같으니까 영혼과 육체에 대한 답을 내려고 하는 것은 서치라이트로 비춰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말고 그 질문이 옳은지 한번 의심해보라는 것이다. 그 질문을 의심해서 보니 질문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그 의문이 해소된다.
[여래 사후 존재하는가, 아닌가?]
이것도 가짜 의문이다. 내 생각에 가장 한국 최고의 선승은 경봉 큰스님이시다. 이분은 화두도 주시고 선문답도 하시는 창의적이다. 옛날 선어록을 답습하지 않는다. 옛날 선어록을 답습하는 것은 흉내 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인간문화재이다. 물론 지식이 많을 경우, 활발하게 새로운 말로도 할 수도 있고, 옛날 선어록을 쓸 수도 있다. 실제 그 당시의 선승들은 모두 다 창의적인 화두이다. 그런데 그것을 답습하면 안 된다. 진짜 선은 활보가 돼야지 옛날 선어록에 쓰여 있는 것은 죽은 말들이다. 문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이 됐기 때문이다. 경봉 스님은 항상 활보를 쓰시고, 창의적이다. 항상 창안하시는데 이치가 다 맞다. 사람들이 찾아가면 “손바닥 내”하고 손바닥을 내면 찰싹 때린다. 그리고 “이 소리가 어디로 갔는가?”하고 물어본다. 그러면 답이 막힌다. 선문답의 목적이 막히게 하는 것이다. 그 막히는 곳이 ‘모름의 자리’, ‘Only Don’t know!’, ‘오직 모를 뿐의 자리’, ‘생각이 끊어진 자리’이다. 이것이 일체의 지혜, 공, 선의 자리이다. 선승이시기 때문에, 법력이 있어서 교화자를 막히게만 해도 내림굿 하듯이 필-feel이 들어간다. 경봉 스님이 열반하실 때 시봉 하셨던 명정 스님이 ‘스님, 돌아가시면 뵙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하고 여쭈니 마지막 남기신 말씀이 “야반 삼경에 대문 빗장 만져봐라”였다. ‘부처님이 어떤 분이냐?’하는 말에 ‘똥 막대기’라는 말과도 비슷하다. 이 말의 뜻은 한밤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면 그것이 문빗장인지, 장롱의 손잡이인지 알 수 없다. 그러니까 ‘네가 살아있을 때 나를 봤느냐? 살아있을 때 못 봤는데 죽은 다음에 문빗장 만져 보는 것과 똑같다’하는 말이다. 선승으로서 역공하는 것이다. 이것이 [여래가 사후에 존재하는가, 아닌가?]와 같은 질문이다. 부처님께서는 답을 안 하시고 침묵하시지만 경봉 스님은 선승이시기 때문에, ‘컴컴한 밤중에 대문 빗장을 만져봐라. 네가 살아 있을 때 나를 봤느냐? 그것과 매한가지다. 내 진면목을 보았느냐?’ 하는 말씀으로 침묵이 아닌 역공을 통해서 지금도 못 보니까 나중 이다음도 똑같다는 이야기다.
‘여래가 사후에 존재하는가?’ 부처님이 살아계실 때 우리가 보았는가? 봤다고 하면 금강경의 편찬자에게 야단맞는다.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만약 몸뚱이로 나를 보는 사람은 삿된 길로 가는 사람이다‘라고 되어 있다.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만약 몸뚱이로서, 물질로서 나(부처님)를 보면 삿된 길을 간다.(금강경)
그 당시 부처님이 살아계셨지만, 이 몸뚱이를 부처라고 하면 그 사람은 삿된 길로 가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이 말은 부처님 살아계실 때도 못 본다는 말이다. 금강경에서조차 이렇게 이야기한다.
살아 있으려면 10년 전 사람과 20년 후의 사람이 똑같아야 한다. 상일주재성(常一主宰性),
항상 변하지 않고, 단일하고, 내가 내 마음대로 해야지만 살아 있는 것이다. 살아 있다.
동일한 사람이다. 아이덴티티 identity 라고 말한다.
이 질문도 자기 나름대로 여래를 그린 다음 ‘계신가? 안 계신가?’하고 찾는 마음이다. 그래서 잘못된 질문이다. 연기법을 사용해서 그런 사고방식을 치유한다. 지금까지의 요점은 회광반조(回光返照), 질문을 점검하는 것이다.
종교적 철학적 의문이 생길 경우, 그 의문에 답을 내는 게 아니고, 중관학적인 해결 방식, 불교적인 해결 방식은 초기 불교든 선불교든 중관학이든 모두 똑같다. 그 문제 자체를 점검하게 한다. 즉 문제를 내는 사람이 입각점 stand point을 보고 그것이 옳은 건지, 정확한 질문인지, 올바른 질문인지 따져보게 한다. 이로써 그 질문이 가짜 질문, 흑백 논리적으로 작동하는 우리의 머리가 만든 허구의 질문임을 알게 된다.
흑백 논리적으로 작동하는, 즉 머리 굴려서 만든 사고를 꿰뚫어 보면 그것이 엉터리라는 것, 세상과 무관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면 종교적, 철학적 의문이 해소된다.
이 깨달음에는 앎의 차원에서 인지적 깨달음과 감성적 깨달음, 두 가지가 있다. 이 2가지가 모두 되어야 깨달음이다.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것은 인지 깨달음이다. 인지 깨달음은 돈오(頓悟)이다. 왜냐하면 쌓는 것이 아니고,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집을 지으려면 최소 3개월, 오래 걸린다. 그러나 집을 허물려면은 한 10초 만에 우르르 무너진다. 돈오(頓悟), 견성(見性)은 허무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확고하다고 생각했던 사고방식, 흑백 논리에 근거한 의문들이 우르르 무너져서 단박에 깨진다는 것이다. 왜 우르르 무너지는지, 왜 사상누각인지 그런 의문들을 한 학기 동안에 논리적인 논증을 통해서 우리의 생각이 엉터리임을 알게 된다.
지금까지 판단의 사실성 비판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그 방식이 중관학만의 고유한 방식이 아니고 선불교, 초기 불교도 똑같다고 설명했다.
간화선은 흑백논리 비판이다. 조주불자(趙州拂子)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무(無)하고 조주 스님이 답하셨다.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모든 생명이 다 부처님 성품이 있는데 거꾸로 말씀하셨다. 여기서 ‘무(無)’자는 화두를 들 때, 없을 ‘無’도 아니고, 있을 ‘有’도 아니고 ‘有無’도 아니고 ‘비유비무(非有非無)’도 아니라고 오조 법연 스님이 말씀하신다. 대혜종고 스님도 똑같이 말씀하신다. 오직 ‘무(無)라’고 말한다. 이것은 ‘有’로 가도 안 되고, 無로 가도 안 되고 중도 자리에 머물라는 것이다. 생각의 중도,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자리이다. 중도의 자리, 생각의 궁지로 몰고 가는 것이다. 중도의 궁지는 흑백 논리가 끊어진 곳이다. 간화선이든 선승들이든 부처님이든 용수 보살이든 흑백 논리가 끊어진 자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단 간화선은 흑백 논리가 끊어진 자리를 논리가 아닌 직관하게 한다. 중관학에서는 논리가 끊어진 자리를 따따부따하면서 분석적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그래서 간화선도 무 대포로 그냥 하면 안 된다. 10년, 20년이 지나도 소득이 없다. 왜냐하면 왜 간화선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관학의 논리를 가지고 대충 감을 잡아야 그 취지를 알게 된다. 그 후에 화두를 들면 그냥 깨진다는 것이다.
간화선도 화두 들라고 하니까 시키니까 그냥 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중도 자리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이분법적으로 작동하는 생각이 엉터리라는 것을 자각하기 위해서, 체득하기 위해서 선 수행을 한다고 알면 된다.
어쨌든 불교는 다 한 맛, 일미(一味)이다. 초기 불교든 중관학이든 선이든 선승이든 선승의 교화든 현대 한국불교의 간화선이든 다 똑같다. 변한 게 없다. 그 핵심은 중도의 추구이다.
[비가 내린다] 하나 비판하면서 곁다리로 이야기했는데 이제 이해가 된다.
창밖에 비는 내리고 있기에, 거기에 비가 내린다고 해버리면 내림이 2번 있게 되니까 의미 중복의 오류에 빠진다. 이것이 첫 번째 오류이다. 다른 예를 들면 비슷한 게 역전(驛前) 앞의 前은 ‘앞 전’자이다. ‘앞’자가 두 번 중복되는 것이다. 의미가 중복되었다. 또 처갓집(妻家집)의(妻家집) 집과 家도 의미 중복이다.
이렇듯이 ‘비가 내린다.’ 할 때도 의미 중복이다. 지금 눈앞에 내리고 있는 비 말고 저 하늘의 비가 내린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 헬리콥터 타고 하늘 위로 올라가 보면 내리지 않는 비가 있는가? 내리지 않으면 비가 아니고 구름이다. 구름은 비가 아니다. 그러면 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구름의 수증기가 응결되어서 무거워지면 내리게 된다. 처음 생기는 비도 내려야지만 비가 된다.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가도 내리지 않는 비를 절대 찾을 수 없다. 없다는 말이다. 비가 되려면 그냥 딱 하고 내려야 한다. 그러니까 ‘내리지 않는 비’는 사실과 다르다. ‘사실 위배의 오류’에 빠진다. 지금은 ‘비’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다. 이 ‘비’가 어떤 의미인지 즉 내리는 비인지, 내리지 않는 비인지 살펴보고 있다. 내리는 비는 의미 중복의 오류이고, 내리지 않는 비는 사실 위배의 오류이다.
‘비가 내린다’고 할 때 내리는 비가 내린다고 해도 틀렸고 내리지 않는 비가 내린다 해도 틀린 것이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다. 오도 가도 못한다. 이것이 중도의 궁지이다.
비가 내리는 게 중도적 현상이다. 중도는 흑백 논리가 안 들어가는 것이다. 비가 내리는 게 흑백 논리가 안 들어가는 현상이다. 흑백 논리가 안 들어가는 게 머리가 작동 못하는 것이다. 머리가 작동해서 묘사할 수 없다는 말이다. ‘머리가 작동해서 묘사할 수 없다’를 전문용어로 ‘불가사의하다’라고 한다. 불가사의(不可思議)- 생각할 수 없다. 비가 내리는 게 불가사의한 현상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비가 내린다’하면 틀렸다.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말의 길이 끊어졌다. 불가사의(不可思議)와 언어도단(言語道斷)이 생명의 세계 속에서 만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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