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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중관학노트

중관학의 연원 부처님의 침묵

by 마음길 2022.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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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관학의 연원 부처님의 침묵

 

여러 가지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서 답을 안 하신 부처님의 침묵이 불교의 무기설이라고 해서 아주 너무나 유명한 중요한 테마이다. 부처님의 침묵을 계승한 것이 중관학이다. 차이점은 부처님은 세관과 자아의 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다시 말해 내가 죽은 다음에 끝납니까? 이어집니까?이어집니까? 하는 문제이다. 세간과 자아가 상주합니까? 무상합니까? 다시 말해 전생이 현생으로 이어졌습니까? 아니면 현생이 새롭게 시작했습니까? 하는 문제이다. 또 여래, 깨달은 분, 아라한이 돌아가신 다음에 어딘가 존재합니까? 아니면 아예 사라집니까? 하는 문제이다. 또 하나가 영혼과 육체가 영혼, 우리의 정신과 몸뚱이가 다 같을까? 다를까? 하는 문제이다. 여기에 답을 안 하시고서는 침묵 후에 연기법을 설하시는데 그 침묵에 근거해서 중관학이 개발된다. 차이점은 초기불전에 나오는 부처님의 가르침, 이 침묵은 어려운 문제들, 우리가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서 침묵하신다.

 

@khianey

 

 

그런데 용수 스님의 중관학은 그것을 무한 확장시킨다.. 세상만사 전체에 대해서 침묵이다. 여래가 돌아가신 다음 계십니까? 안 계십니까? 이것만 침묵이 아니고 밖에서 비가 내려도 침묵이다. 비가 내릴 때 말을 붙이면 틀리기 때문에, 침묵한 다음에 중관 논리로 연기법을 가르친다. 방식은 똑같은데 용수 스님의 중론에서의 범위가 훨씬 넓다. 어려운 문제, 난문, 여러 가지 철학적, 형이상학적 문제, 머릿속에서 생긴 문제들을 이어 줄 때 부처님께서 침묵하셨다가 그다음 연기법을 설해서 그런 사고방식을 치료해 주셨는데 이것이 초기불전의 가르침이다.

 

용수 스님의 중관학에서는 그런 어려운 문제, 형이상학적 난문만이 아니고 세상만사에 대해서 머리 굴려서 말을 떠올리든지 분별하든지 그것을 막아버린다. 그다음에 연기를 설해서 연기법을 가지고 그 사고방식을 치료한다.

 

초기불전의 무기설과 중관학은 방식은 똑같다. 중관학은 부처님 초기불전 무기설의 무한 확장이다. 그래서 용수 스님의 가르침의 근본 핵은 부처님에게 있다. 부처님의 무기설을 훨씬더 풍요롭게 발달시킨 것이 용수 스님의 중관학이다. 초기 불교 근본주의가 돼서 대승을 무시하면 안 된다. 부처님은 45년 설하셨다. 모든 말씀을 다 하지 못하셨다. 말씀하실 때도 1단계만 말씀하셨지 1단계를 이해한 사람들에게 나중에 생긴 2차적인 오해까지는 부처님이 접하지 못하셨기 때문에 그것은 이야기하지 못하셨다. 세월이 지나고 난 후 1단계 설법을 이해하고서 그다음에 2단계 오해가 생기니까 그것까지 붙잡아서 다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맞게끔 새로운 가르침을 개발한 것이 바로 대승이다.

 

대승불교, 교학, 논서, 경전을 다 봐야지 초기 불교가 눈에 들어온다. 절대 초기불전만 봐서는 뭐가 뭔지 모른다. 초기불전의 부처님 침묵을 보통 무기설 혹은 답을 방치했다 해서 '치답'이라 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침묵도 설법이다. 그래서 유마의 침묵도 침묵이 아니다. 거꾸로 설법도 침묵이다. 설법을 설법으로 아는 사람들은 말에 대한 고정 관념이 있는 사람이다. ‘말과 말 아닌 게 따로 있다. 입에서 나오는 것만이 말이 있다. 글로 쓴 것만이 말이다.’는 착각을 하는 사람이다. 말의 정체가 무언인지 추구해 들어가면 세상 전체가 다 말이다.. 전부 다 의미를 방출한다. 수화도 말이다. 어떤 모습이든 소리든 의미를 담으면 다 말이다. 점자도 말이다. 말이 무엇인지 추구해 들어가면 말의 테두리가 다 무너진다. 이것이 화엄의 일즉일체(一卽一切)이다. 말뿐 아니라 어떤 개념이든지 끝까지 추구하면 그 테두리가 다 무너진다. 원래 모든 개념들 단어는 테두리, 범위가 없다.

 

모든 개념이 다 무너지기 때문에 일상생활 속에서 생활할 때 쓰는 모든 말들에 대해서 당연한 일 알고 여러 가지 말을 하지만 부처님의 무기설에 근거해서 보면 그것은 세상과 무관하다. 중관학의 그 방식은 부처님의 침묵과 연기법을 설 하셔서 잘못된 사고방식을 치료해 주는 패턴과 똑같다.

 

()

내가 짓고 내가 받는가(自作自覺)?

남이 짓고 남이 받는가(他作他覺)?

무기

연기설(緣起說)

自作自覺則墮常見他作他覺則墮斷見義說法說離此二邊處於中道而說法所謂此有故彼有此起故彼起緣無明行乃至純大苦聚集無明滅則行滅乃至純大苦聚滅 

 

초기불전에 무기설이 굉장히 많다. 무기설의 소재가 62가지가 있다.

()는 내가 짓고 내가 받는가(自作自覺)? 남이 짓고 남이 받는가(他作他覺)? 자작자각(自作自覺), 타작타각他作他覺). 내가 어떤 업을 지으면 후에 과업을 받는다. 인과응보(因果應報)에서 과보를 받는 것이 처음에 그 업을 지었던 놈인가? 다른 놈인가를 물어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제 밥을 먹었는데 아침에 밥을 먹은 놈이 어제 밥을 먹은 그놈인가? 다른 놈인가? 이다. 어제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지만 다르지도 않다. 불일불이(不一不異)이다. 연기이다. 보통은 같은 나로 생각한다. 인과응보(因果應報)가 성립하려면 업을 지은 놈과 받는 놈이 같아야 한다. 이것은 자아가 있다는 말이다. 상견(常見)이다. 부처님이 무아(無我)를 얘기하셨는데 거기에 위배되는 얘기가 인과응보설(因果應報說)이다. 부처님이 인과응보(因果應報)도 이야기하셨고 무아(無我)도 이야기하셨는데 상충한다. 무아(無我)는 인과응보설(因果應報說)이 성립하지 않는다. 무상하기 때문이다. 어제 업을 지었던 그놈은 지금 이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질문을 한다.

 

남이 짓고 남이 받는다.((他作他覺)이 맞는 것 같다. 이때 남은 전에 업을 지었던 그놈이고, 받는 그놈은 내 뒤에 있는 지금 과보를 받는 남이다. 남이라고 썼지만 업을 지었던 입장에서 보면, 과보를 받는 이놈이 남이 돼 버리고 지금 과보를 받는 이놈의 입장에서 보면, 과보를 지었던 놈이 남이 된다. 이것이 타작타각((他作他覺)이다. 지은 놈과 받는 놈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하고 묻는 것이다.

 

내가 짓고 내가 받는가? 업을 짓고 과보 받는 놈이 같으냐? 남이 짓고 남이 받는가? 업을 짓고 과보를 받는 놈이 다른 놈인가?’를 여쭙는 것이다.

 

인과응보가 당연한 줄 알았는데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무상무아(無常無我)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여기에 답을 안 하신다. 침묵하신 후 연기법을 설하신다.

 

自作自覺則墮常見. 내가 짓고 내가 받는다 하면 상견-이어진다는 사고방식-에 떨어진다. 동일한 내가 이어진다는 사고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他作他覺則墮斷見。남이 짓고 남이 받는다. 짓는 놈과 받는 놈이 다르다고 생각하면 단견-끊어졌다는 사고방식-에 떨어진다. 상견(常見), 단견(斷見) 모두 잘못된 것이다. 흑백 논리이다. 義說法說, 離此二邊 뜻으로 이야기 하든, 이치, 이변으로 이야기하든 2가지 극단을 벗어난다. 상견, 단견 모두 틀렸다는 것이다. 處於中道而說法 그래서 중도에 의거해서 법을 설하는 것이 맞다. 중도를 근거해서 설하라는 이야기이다. 所謂此有故彼有이른바 이것이 있음에 저것이 있고, 此起故彼起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빛나고, 緣無明行, 무명을 조건으로 삼아 행이 있고, 乃至純大苦聚集이하동문 無明滅則行滅무명이 사라지면 행이 사라진다. 이것이 진상이고 연기법이다.

 

상견-업을 지은 놈과 받은 놈이 같은가? 다른가? 이것은 상견, 단견이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생명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연기법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이다. 찰나 생존하면서 계속 콸콸 흘러간다는 것이다. 이 과정 중에서 욕망이 있고, 취가 있고, 애가 있고 12연기가 나타난다. 12연기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처(六處)→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 하나하나가 모두 오온(五蘊)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몸과 마음이다. 몸이 색(), 마음이 수상행식(受想行識)이다. 12연기 하나하나가 오온의 흐름이다. 12연기는 하나하나의 관계가 증상연(增上緣) 관계이다.

 

연기를 세분화하면 4가지가 있다.(조건의 종류 4가지) 인연, 씨를 심으면 싹이 나온다 할 때 씨가 인연이다. 차제연((次第緣), 순서대로 시간적인 인과이다. 앞의 찰나 사건 때문에, 다음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손이 움직이는 것이, 앞의 찰나가 차제연 작용하는 것이다. 앞 찰나와 뒤 찰나의 관계가 연기한 것이다. 연연 혹은 소연연(所緣緣), 감각 기관에 비치는 대상들과 앎의 관계이다. 감각 지각 대상으로서의 조건은 소연연(所緣緣)으로 이것도 연기이다. 소리가 들릴 때 귀에 소리가 있고 귀가 있기에 그것이 결합해서 소리가 들린다. 마지막으로 증상연(增上緣)이 있다. 가장 강력한 조건이라는 뜻이다. 말을 할 때 소리가 들린다. 이 소리가 결과이다. 이 소리가 무엇 때문에 생긴 것인가? 여러 가지 조건이 모였기 때문에, 목소리가 있는 것이다. 그 소리가 원래 있는 게 아니고 여러 가지 조건이 모여서 소리가 있는 것이다. 조건 중에 하나만 빠져도 소리가 성립하지 못한다. 이것이 연기이다. 증상연은 앞서 이야기한 3가지 연기가 모두 겹치는 이야기이다. 따로 분류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가장 강력한 연기이다. 어떤 인과관계든 증상연이 꼭 있다.

 

불교에서 연기를 분석할 때는 4가지가 있는데 증상연이 가장 강력한 원인이다. 불교 인과법, 연기법은 현대 물리학, 자연과학의 인과론을 아주 상상 초월로 표현한다. 전제 조건은 연기법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연기법을 제대로 알면은 자연과학의 현대 학문에서 이야기하는 여러 가지 이론에 대해서 아주 탁월한 통찰을 할 수 있다. 연기법을 이해하지 못하면 무의미하다. 12연기의 관계 하나하나가 모두 증상연 관계이다. 12연기는 무명(無明)()()명색(名色)육처(六處)()()()()()()노사(老死)가 하나하나가 그 원인으로 누적되어 발생한다. 12연기는 동시에 있기도 하고 펼쳐져 있기도 하다.

 

업을 지은 놈과 과보를 받는 놈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이런 질문에 대해서 부처님께서 침묵하셨다가 연기를 설하시는데 12연기를 설하신다. 12연기는 오온의 흐름이기 때문에, 제행무상(諸行無常)과 같은 이야기이다. 12연기설과 제행무상이 같은 이야기이다. 12연기를 펼쳐놓으면 오온이 계속 멸하고 있다. 사실 삼법인(三法印), 12연기(十二緣起), 사성제(四聖諦)가 같은 이야기이다. 무기설을 설하실 때 침묵 후에 12연기를 설하시기도 하고, 삼법인을 설하시기도 하고, 사성제를 설하기도 한다. 공통점은 모두 연기법을 설하신다는 것이다.

 

12연기의 각 지분의 관계마다 모두 사성제가 들어가 있다. 12연기를 사성제와 대응시키는 경전 문구가 아함경에 나와 있다. 12연기의 한쌍 한쌍의 관계마다 인과관계와 사성제가 작용한다. 12연기와 사성제가 같은 이야기이다. 12연기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 제행무상이다. 12연기는 어떤 것이라는 실체가 없다. 이것이 제법무아( 諸法無我)이다. 12연기가 다 무너지면 열반적정(涅槃寂靜)이다.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 삼법인은 같은 말이다. 삼법인, 사성제, 12연기 이 3가지가 같은 연기법에 대한 다면적 통찰이다.

부처님께서 고의 자작자각(自作自覺), 타작타각(他作他覺)의 의문에 대해서 침묵하신 다음에 12연기를 설 하셨지만, 사성제 혹은 삼법인을 설하신 것과 같다. 콸콸 흘러가는 현상의 흐름만 있을 뿐이지 내가 있고, 내가 없을 받는 일은 없다. 전 우주적인 흐름의 통찰, 신심 탈락-몸과 마음이 다 떨어져 나간 통찰- 나도 없고, 남도 없고, 바깥도 없고, 안도 없고, 내 몸도 없고, 마음도 없다. 다 떨어져 나갔다. 이때 코가 있고, 내가 있고, 업을 짓는 등의 질문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모두 분별이 만든 가짜 생각이기 때문이다. 방편적으로는 이 말이 가능하다. 내가 업을 지어서 나중에 과보를 받는다는 것은 모두 다 속제의 이야기이다. 속제는 전부 다 거짓말이다. 속제는 모두 방편성이다.

 

[중관학의 연원 부처님의 침묵 정리]

자아가 존재하는가? 침묵어째서 답하지 않으셨습니까?(아난의 질문) 존재한다고 답하면 그의 잘못된 생각이 더 늘어나게 되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답하면, 어리석음만 더하게 된다. 자아가 있다는 생각은 상견(常見)이고, 자아가 없다는 생각은 단견(斷見)이 된다. 여래는 양 극단에서 벗어나 중도에 처하여 설한다. 이것이 있음에 저것이 있고 …… (12연기설)

 

부처님은 침묵 후 반드시 연기법을 설하셨다. 질문을 만든 사고방식이 잘못됐기 때문에, 연기법을 알려주고 그 사고방식을 치료했다.

 

이러한 무기설의 처리 과정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미세하고 정밀한 문답 형식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중론이다. 초기불전의 무기설만 봐서는 연기법을 체득하기 어렵다. 중론으로 훈련하면 공성이 무엇인지 체득이 된다.

 

[무기설의 구조]

 

형이상학적 의문

침묵 (無記, 置答)

연기설(십이연기, 사성제, 삼법인)

열반

 

난제의 의문이 있을 때 부처님께서는 침묵 혹은 치답을 하신 후 연기를 설하셨다.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것이 열반이다. 불교의 최고 목표는 편안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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