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설, 중관, 선문답]
무기설: 의문 → 침묵 → 연기설 → 해소
의문이 있으면 침묵했다가 연기법을 설해서 해소하셨다. 해소가 열반이다.
중관학: 의문 → 중관논적 비판 → 해소
중관학은 의문이 있으면 중관 논리로 비판하고 해소한다.
선문답: 의문 → 의문의 파기 → 해소
선승들에게 부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고 질문하니 “마른 똥막대기” 하면서 확 소리 지르면 깜짝 놀라서 무슨 질문했는지 잊어버린다. 철저한 초기불교의 계승이다. 현학에서 쓰는 말들을 이용한다. 중국 불교 전체가 노장적인 면이 있다. 노장의 소재를 가져다가 사용한다. 유(有), 무(無)의 개념이다. 중국 전체를 한마디로 평하면 인도 불교를 현학에서 이용하는 유(有), 무(無)라는 개념으로 재조직한 것이다. 숭유론, 귀무론의 논쟁이 현학이다.(현학논쟁) 이 유(有), 무(無)의 개념을 가져와서 인도 불교의 논법에 대입시켜서 유(有), 무(無)로 계속 풀어나가는 것이 중국의 불교 사상 전체이다. 중국 불교 사상 전체가 유(有), 무(無)라는 두 개의 개념으로 인도 불교를 재조직한 것이다. 동아시아의 불교는 인도 불교를 유(有), 무(無)라는 현학의 핵심 개념으로 재조직한 것이다.
[결론-간화선, 중론, 부처님의 침묵]
선불교는 철저하게 초기불교의 계승이다.
『중론 논리로부터의 해탈 논리에 의한 해탈』의 마지막 결론:
간화선에서 ‘개에게 불성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조주 스님의 ‘무’(無)라는 대답을
①‘있다’거나 ②‘없다’거나 ④‘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이해하는 것이 모두 틀리듯이, ‘이 세상과 자아의 한계’에 대한 물음에 대해 4구(四句) 중 그 어떤 판단으로 이해해도 모두 옳지 않은 것이다.
이 세상의 끝이 있습니까? 옳지 않다. 이 세상의 끝이 없습니까? 옳지 않다. 끝이 있으면서 없습니까? 이것도 옳지 않다.. 끝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닙니까? 이것도 옳지 않다. 4가지가 모두 다 틀린다. 무無도 틀리고 유有도 틀리고, 비유(非有)도 틀리고, 비무(非無)도 틀린다.
간화선 수행자는 4구분별의 출구를 모두 막고 은산철벽(銀山鐵壁)과 같은 화두를 대면하고 앉아 있는데,
나가는 출구를 모두 막고 너무나 강력해서 생각이 빠져나갈 수 없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선수행이다.
초기불전의 무기설에서는 4구로 배열된 형이상학적 의문들에 대해 부처님이 은산철벽과 같이 침묵하신다.
초기불전의 부처님께서 은산철벽과 같이 침묵하듯이 화두들은 수행자도 은산철벽을 마주한다. 같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중론》에서는 논리적 분석의 몽둥이로 우리의 4구분별 하나하나를 모두 부수어 버린다. 용수의 《중론》은 우리 한국불교의 간화선 수행과 초기불교의 무기설을 잇는 논리적 가교(架橋)인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