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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중관학노트

화엄적 논법: 개념의 실체성비판-웃음, 울음, 정지와 움직임

by 마음길 2022.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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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웃음이 무엇인가? 웃음이라고 할 때 결론은 웃음도 모든 것이다가 되어야 한다. 생각해 보자. 언제 웃는가? 기쁘면 웃는다. 기쁠 때만 웃는가? 슬플 때도 웃고, 화가 나도 웃는다. 정신이 좀 나가도 웃기도 한다. 간지러워도 웃는다. 웃음이 모든 감정을 표현한다. 이것이 화엄이다. 웃음이 무엇이냐고 할 때 독특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감정을 다 표현한다. 웃음이 뭐냐 할 때 모든 게 다 웃음이다. 일체가 다 웃음을 유발한다.

 

울음

울음이 무엇인가? 슬플 때, 기쁠 때 즉 상반된 감정일 때도 운다. 무서워도 울고, 이유 없이 울기도 한다. 울음도 역시 마찬가지로 모든 감정을 다 표현한다.

 

감정이든, 욕심이든, 어떤 사물이든, 어떤 개념이든 그 모든 게 다 테두리가 없다는 것과 열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마가 어디인가? 사람에 따라 그 경계가 모호하다. 앞서 다루었던 시계와 같은 개념처럼 점차 그 경계가 흐려진다. 오전과 오후도 마찬가지다. 약속의 세계에서는 테두리가 선명하지만 그 외에는 테두리의 경계가 모호하다. 어떤 개념이든 그 테두리를 지을 수 없다.

 

우리가 제멋대로 테두리를 만들어서 이것은 시간적으로 아침 혹은 오후 공간적으로 이것은 이마, 개념적으로는 이것은 컵, 전화기, 컴퓨터, 책상, 의자, 하늘, 땅이라고 하고 사는 것이다. 세상을 확고부동하게 아는 것처럼 시늉하면서 뻔뻔스럽게 사는 게 일반 사람들이다.

 

우리가 생각을 조금만 더 하고, 한 걸음만 더 깊이 있게 들어가면 다 무너진다. 참 세상이 너무 모호한 게 세상임을 알게 되고 생각이 끝나는 자리까지 간다. 이것이 화엄에서 말하는 일즉일체이다. 하나의 개념을 끝까지 추가해서 들어가면 끝에 가서 다 폭로되어 터진다.

 

우주가 모든 것이고, 시계가 모든 것이고, 욕심, 시작, 종말 등이 모든 것이다.

웃음, 울음, ... 이마, , 머리, 어깨 등도 모두 모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교수, 학생, 아버지, 남편, 부인, 아저씨, 고깃덩어리, 괴물, 아들 등이기도 하다. 즉 나는 무한하다는 것이다. 원래 진짜 정확한 나의 그 명칭이 무엇일까? 무명, 무상 전체이다. 이름이 끊어져 있다.

 

의상대사의 법성게에 보면 무명-이름이 없다. 나뿐만이 아니고 다 무명이다. 컵도 원래 이름이 없다. 컵에 물을 담으면 컵이 되고, 흙을 담으면 화분이 된다. 물고기를 담으면 어항이 된다. 만두피 만들 때 사용하면 만두피 만드는 기계가 된다. 그러니 컵이 무엇이냐고 할 때 컵은 무한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중에 연기하는 것, 하나만 사용하는 것이다. 연기는 비교를 통해서 발생한다.

 

화엄의 연기는 모든 각론적인 연기를 총론으로 결합한 것이 포함한 법기연기이다. 법기 연기중 가장 최고의 통찰인 사사무애 연기이다. 일과 일이 무에 걸림이 없다. 충돌함이 없다. 화엄의 일즉일체, 일중일체이다. 나 하나 속에 교수, 아빠, 고깃덩어리, 괴물, 아저씨, 조카, 삼촌 등 다 들어가 있다. 그런데 하나도 걸리지 않는다. 내 속에서 아빠하고 아저씨하고 충돌하지 않는다.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충돌이 없다. 사사무애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역할이 있다. 연기한다. 집에 가면 아들이 되고, 딸이 되기도 하고, 밖에 나가면 선생님이 되기도 하고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니까 역할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하나도 그 역할이 내 속에 충돌하지 않는다. 화엄의 이치는 무슨 신기한 게 아니고 우리 세상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응용이 무궁무진한 통찰이다.

 

불교가 몸에 배면 세상 나가서 무서울 게 없다. 다 열려 있기에, 뭐든지 다 할 수 있다. 어쨌든 내가 누구냐 할 때 무한이다.

 

정지와 움직임

정지와 움직임은 무엇인가? 모든 움직임은 상대적이다. 절대적인 움직임은 없다. 모든 움직임이 가능하다. 정지와 움직임은 관찰자의 시점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사물에 대해서 관찰자의 시점에 따라간다, 온다, 내려간다, 올라간다, 정지해있다, 둥글게 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모든 움직임, 상태가 다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일즉일체, 일중일체, 하나 속에 무한이 있다는 뜻이다. 일체 모든 사물은 무한의 움직임을 담고 있다. 무한의 관찰자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학문에서도 얘기하지 않는 점이다. 불교의 어떤 교학에서도 얘기하지 않는 부분이다. 그래서 화엄이 위대하다. 모든 연기법에 총합이 화엄이다. 법기연기, 사사무애이다.

 

생각이 열려 있어야지 세상 살기 편하다. 항상 응용 가능하고, 누구든지 만나도 항상 어울릴 수 있다. 고정관념이 나의 인생관, 세계관, 성격이 된다. 내가 가진 고정관념이 얼마인지 그 정도에 따라 원만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성격이 편협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성격이 편협한 사람은 고정관념이 많은 사람이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생각 깨는 것을 잘못하는 사람이다. 고정관념을 다 깬 사람은 성격이 원만해서 남녀노소 누구든지 편안하고 전혀 갈등하지 않고 살 수 있다.

 

지금까지 생각 깨는 작업, 화엄의 개념 실체성을 비판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냥 우리의 생각만 깨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살아난다. 삶 속에서 명연기자가 되고 발명가가 되고 창의적인 사람이 되고 세상을 선도하고 항상 조고각하 -내 발밑을 보고 사는- 어떤 문제의 답을 찾으며 자기 인생이 밝아지는 생각의 사람이 된다.

 

화엄의 보문을 통해서 보법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것이다. 보법은 일체법-모든 것이 다 해당한다-이다.

 

시를 고정관념으로 쓰면 좋은 시가 아니다. 새로운 비유, 은유로 시를 써야 한다. 시의 상징이 가능한 이유가 다 보법이기 때문이다. 모든 개념과 다른 무한으로 의미가 열려 있기에, 시의 상징이 가능하다.

 

오도송도 마찬가지다. 언어가 다 무너져 있지만 그것이 실제 우리의 사유의 끝까지 가서 발견한 대발견을 글로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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