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대사의 <화엄경> 법성게 – 상즉상입(相卽相入)]
상즉: 일즉일체 다즉일 一卽一切 多卽一 , 상입: 일중일체 다중일 一中一切 多中一
일체 속에 무한이 있다. “하나 속에 무한 있고 무한 속에 하나 있고 하나가 곧 무한이요 무한이 곧 하나일세.”
[<반야경>의 절대부정과 <화엄경>의 절대긍정]
공(空), 무(無) = 우주 = 모든 것(일체)
공(空), 무(無) = 시계 = 모든 것(일체)
공(空), 무(無) = 욕심 = 모든 것(일체)
공(空), 무(無) = 시작 = 모든 것(일체)
공(空), 무(無) = 종말 = 모든 것(일체)
공(空), 무(無) = 물질 = 모든 것(일체)
공(空), 무(無) = 살 = 모든 것(일체)
공(空), 무(無) = 마음 = 모든 것(일체)
공(空), 무(無) = 부처 = 모든 것(일체)
공(空), 무(無) = 밥 = 모든 것(일체)
공(空), 무(無) = 똥 = 모든 것(일체)
지금까지 얘기한 거는 모든 것(일체)의 측면을 이야기한 것이다. 이것은 화엄의 절대 긍정의 통찰이다. 어떤 것을 하나만 들더라도 무한이 나타나는 것이다. 화엄경에 일중해무량(一中解無量)이라는 경구가 있다. 하나 속에서 무량, 무한을 해석한다는 뜻이다.
이 반대되는 통찰도 가능하다. 절대부정이다. 절대 긍정의 통찰까지 가면 절대부정의 통찰은 저절로 된다. 예를 들어 모든 게 다 우주다. 그러면 우주라고 할 것도 없다. 모두가 다 우주이기 때문이다. 우주 아닌 게 있어야지 우주라는 말이 성립하는데 우주가 아닌 게 없기에, 우주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주라 할 것이 없다. 그래서 공과 무의 통찰이 반대 끝에 있다.
모든 것이 마음이기 때문에, 마음이 모든 것이기에 그러면 마음이라 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마음 아닌 게 있어야지만 이것은 마음이구나 하고 마음이라는 개념이 성립하는데, 모든 것이 다 마음이기 때문에 마음이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컵, 컴퓨터가 지금 여기 존재한다. 벽도 있고 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말할 때 존재하고 있는 컵을 가져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냥 컵 가지고 와 하고 말한다. 또 ‘나는 있는 컴퓨터를 보고 있어. 있는 컵을 보고 있어.’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있다고 하는 존재가 당연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존재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우주라고 할 경우, 우주라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존재이기 때문에 존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과 같다.
화엄의 절대긍정의 반대 극에는 반야경에서 이야기하는 무와 공이라는 반야의 조망이 있다.
이 조망은 생각을 무너뜨리는 조망이다. 그래서 반야와 화엄의 목적은 똑같다. 취지는 똑같다. 우리의 분별을 다 무너뜨리는 것이, 반야와 화엄의 목표다.
우주, 시계, 욕심, 시작, 끝, 물질, 살, 마음, 부처님, 밥, 똥 등은 분별의 세계이다. 이 하나하나의 분별들을 끝까지 추구하면 다 무너지는 것이다. 다 무너지면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반야경이다. 사람의 분별을 깬다는 면에서 반야경과 화엄경은 같다.
그러나 하나 조심할 것은 이렇게 분별을 깼다고 해서 세상 살면서 그냥 분별이 깨진 상태로 살면 공병이 든다. 가치 판단의 상실 상태에 빠진다. 세상에서는 반드시 분별로 살아간다.
생각이 깨진 사람들은 철저하게 하나의 분별을 내면서 살아가야 한다. 이때의 분별은 절묘한 최고의 분별이다. 내가 사는 삶 속에서 가장 분별을 잘할 수 있는 사람, 가장 판단을 잘할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화엄과 반야의 공과 일즉일체, 보법을 가장 정확히 체득한 사람이다. 불교를 공부하고 안 다음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율장에서 하신 것처럼 삶 속에서 불교의 통찰이 철저하게 분별로 나타난다.
율장에서는 공에 대한 말씀을 한마디도 하지 않으신다. 전부 ‘~하면 안된다.’는 계율에 관한 이야기만 하신다. 분별만 하신다. 삶의 세계는 율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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