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화엄의 법기연기 사상,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사상 혹은 무한대와 무한소의 중첩 사상, 상즉상입(相卽相入) 사상(서로 동치, 서로 일치하고 서로 들어간다)-하나가 곧 모든 것이요. 모든 것이 곧 하나요는 서로 동일하다는 상즉사상이고, 상입은 하나 속에 모든 것이 들어가고 모든 것 속에 하나가 다 들어간다는 일중일체다중일이다.-의 패턴(공식)을 통해서 개념의 실체성을 비판하는 훈련을 해 보았다.
화엄에서만 가지고 있는 틀을 가지고(우리가 체험하는 세상만사 전체가 다 눈에 보이는 것이든 귀에 들리는 것이든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든 그 무엇이든 모든 것이) 하나의 그 개념에 대해서 집요하게 추구하면 하나의 의미가 해체되고 다 무너져버리는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 즉 모든 것이 무한을 향해서 열려 있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서 여러 가지 사상이 나타났는데 화엄의 관점에서 보면 그 여러 가지 다양한 사상이 하나의 어떤 개념을 가지고 끝까지 추구해서 그 개념의 의미의 범위가 열리는 ‘보문(普聞:어디든지 문이 있다.=대도무문大道無門: 큰 도에는 문이 없다. 즉 모든 것이 문이다)’의 이치를 단편적으로 이끌어낸 것이라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프로이트,, 헤겔, 마르크스 등 서양 철학자들의 사상을 화엄의 통찰로 표현하면 손바닥 위의 모래알 몇 개라고 정도이다. 평생 목숨 바쳐서 연구한 것을 화엄적 통찰로 비교하면 그것은 하나의 보법의 원리를 자신이 발견한 진리인 것처럼 착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과 영향력은 진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불교의 통찰은 그 하나하나가 다 생명의 비밀을 담고 있는 삶과 죽음의 통찰이다.
하나를 들으면 즉 ‘우주’라는 개념 하나를 들으면 모든 것에 다 해당하고, 시계라는 개념 하나를 들으면 모든 것으로 그 의미가 열린다. 이 이야기는 의상대사의 저술인『화엄경문답』에 있다. ‘제법을 색으로 설명하려면 일체가 색이 되고 심으로 설명하려면 일체가 심이 된다. 다른 법도 마찬가지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색이 물질인데 물질을 설명하려면 일체가 물질이 되고 마음으로 이야기하면 일체가 마음이 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우주를 설명하려면 모든 것이 우주가 되고, 시계를 이야기하려면 다 시계가 된다는 것이다.
화엄의 일중일체(一中一切), 일즉일체(一卽一切)의 통찰은 전통적으로 의상스님의『화엄경문답』에 아주 명료한 문장으로 쓰여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통찰로 개념의 실체성 비판의 공식을 훈련한 것이다.
앞으로 어떤 개념이든 그 개념을 집요하게 추구하면 그 의미가 해제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의 고정관념을 없앨 때 이 공식을 활용할 수 있다.
우주가 모든 것이고 시계가 모든 것이다. 그러면 우주가 시계이다. 시계가 모든 것이고 욕심이 모든 것이니까 시계가 욕심이다. 욕심이 시작인데 시작이 종말이고 물질이 욕심인데 시계가 살이고, 마음이 물질이고 부처님이 마음이 똥 막대기이다.. 화두공안의 경지이다. 언어가 다 깨진다. 분별의 세계에서는 우주, 시계, 욕심 등이 각각 따로 있다고 알았는데 각각 집요하게 추구해 들어가면 이 모든 것이 다 해체된다. 해체 후에 보니 사사무애(事事無礙), 우주가 시계인데 서로 걸림이 없다. 충돌하지 않는다. 시계가 욕심이고 욕심이 시작이고 시작이 종말이고 종말이 물질이고 물질이 부처님이고 부처님이 마음이고 마음이 똥이고 똥이 밥이다. 이렇게 선승들의 화두공안 즉 ‘부처님이 마른 똥막대기’이고 ‘달마가 서쪽에서 온 이유가 뜰 앞에 잣나무’라는 여러 가지의 오도송의 세계가 나타나게 된다.
[화두(話頭), 선문답(禪問答)]
부처님은 어떤 분인가?
→ 마른 똥 막대기다!
달마스님이 중국에 오신 까닭은?
→ 뜰 앞의 잣나무다!
개에게도 부처의 성품이 있는가?
→ 없다!
분별이 다 무너지면 화두의 선문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오도송과 선문답의 화두도 옛날 것을 자꾸 되풀이해서 사용하는 것은 안 좋다. 그것은 다 죽은 말들이다. 화두는 상대의 근기에 따라서 새로운 화두를 제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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