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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지선공부모임_10년결사/저녁공부

2023년 몽지선공부모임 10년결사 저녁공부_육조단경1-3

by 마음길 2023.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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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9일 목요일]

 

p26

7.혜능선의 의의

 

대개 선은 좌선으로 자성을 철견하는 것이 기본방식이다.▶

대부분은 좌선으로 자성을 꿰뚫어 본다고 말한다.

 

그런데 혜능 조사에 있어서는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좌선이 아닌 견성이며

앉아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깨닫는 것이며

 

철견이 아닌 행상삼매이다. 

▶일행一行삼매, 일상一相 삼매이다.

 

한행의 삼매이다.

일행一行이라함은 한 행一行의 삼매이다.

한 행一行으로 삼매이다.

 

이 한 행은 내가하는 행이 아니다.

내가 있고 행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따로 있는 것은 이행二이다.

 

일행一行은 '이것'을 말한다.

이 작용이 하나의 행이다. 

 

일상一相은 무엇인가?

내가 어떤 상( 법상)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보는대상과 보는 이가 있어서 이상二相이 된다.

 

일상一相이라하면  한 모양은

'바로 이것'이다.

 

일행은 무행無行이요.

일상은 무상無相이다.

하나만 있으면 없는 것이다.

 

일심一心은 무심無心이다.

마음 하나밖에 없으면 마음이란 것은 없다.

 

컵이 왜 있는가?

둘이기 때문에 컵이 있다.

내가 컵을 봐주기 때문에 컵이 있다.

 

진짜 컵만 있으면 

컵이 컵을 알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컵은 컵이다.

 

컵만 있으면

다시 컵이 되거나 안되거나 할 수는 없다.

 

바로 이것이다.

 

진리만 있다는 것은

다시 진리를 얻거나 깨닫거나 잃거나 하는 것이 없다.

바로 이것이다.

틈이 없다.

 

그러니까 이렇게 밋밋하고.

그래서 아무일 없이.

 

그래서 중생의 분별심은

'심심해. 아무 특별한 것이 없어.'라고 한다.

 

내세울 것이 없다.

아상을 펼 수 없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하고 싶은 것이다. 

행위자여, 그것이 자아이고 에고이다.

우리의 망상이다.

 

그래서 에고는 업을 지을 수 밖에 없다.

에고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안다.

에고는 행위를 해야만 있는 것 같아 한다.

아무것도 안하면 삶의 의미를 잃는다.

 

그러나 진짜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의 행위가 아니다.

 

삶의 의미는

나의 행위를 가능하게 해주는

이렇게 펼쳐져 있는 현실이다.

 

이렇게 펼쳐져 있는 현실은 내가 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있지?

이것이 스스로 있을까? 

무언가에 의해서 자각되고 있는 이것.

 

꿈이 왜 있지?

꿈 속의 시간과 감각. 공간. 사람들 어떻게 있지?

무엇에 의지해 있지?

한 마음에 의지해 있다.

 

그 마음이 변형된 것이 꿈이다.

마음의 변성 상태가 꿈이다.

 

그러니까 이 의식을

이 마음은 바꾸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바꿀려고 수행한다.

괴로운 마음을 편안한마음으로.

불쾌한 감정을 유쾌한 감정으로.

바꿀려고 한다.

 

바뀐다면 이것 또한 바뀐다.

그러니까 아무리 바꾸려고 해도 원위치 된다. 

 

현대의 뇌과학. 신경 가소성.

우리의 신경. 의식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생멸하는 의식은 변한다.

변하는 의식은 언제든지 변한다.

불편함->편안함->다시 불편함

 

불편함이 편안함으로 변하면 안바뀌어야 하는데

자꾸만 변한다.

 

황홀경의 체험. 절정 체험 좋은 것이 아니다.

그 누구도 그 체험에 머물 수 없다.

 

우리는 착각한다.

우리가 초인적으로 노력해서

완전함을 얻으면 절대 안변할 것이라고.

그런 일은 없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계속 변한다.

이것은 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상. 모양은 어디서 떠오르는가?

그 상. 모양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 성품에 의지해 있다.

 

이 성품은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자아가 노력해서

호흡하거나 호두를 들거나 주문을 외거나

몸의 기운을 돌려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밑 바탕이다.

 

그러니 관점을 바꾸라는 이야기이다.

추구하지 마라. 

노력하지 마라.

그저 있으라.

그것이 도로 가는 첩경이다.

 

우리의 분별심이 전혀 가지 않는 길이다.

그래서 방향바꾸기가 이렇게 어렵다.

 

그 길을 간 사람이 알려 주어야 알 수 있다.

혼자 발견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석가모니도 죽을지경에 다가서 겨우 돌입했다.

혼자서 깨닫기는 정말 힘들다.

 

그래서 선에서 급히 사람을 찾아나서라.

선지식에 의지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렵지 않다.

부작용없이 깨달을 수 있다.

깨닫고 단련을 받아라.

 

여전히 예전의 습관을 가지고 법을 재단하려고 할테니

그것이 다시는 어떤 임계점을 넘어가지 않도록

습관을 조복시켜라.

 

이것은 어떤 감정 상태처럼

이랬다 저랬다하는 것이 아니라

늘 여여한 것이다.

 

이것은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어떤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기에

다시 이랬다 저랬다가 불가능하다.

 

진아는 여여하다.


중요한 이야기들이 많으므로

1강은 시간이 걸려도 천천히 공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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