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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중관학노트

중관학6강: 중관학이란 무엇인가?

by 마음길 2022.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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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관학6강: 중관학의 문헌과 인물 그 유래

용수 스님의 저술 중에 가장 중요한 게 중론과 『회쟁론』이다.

중도는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色卽是空)할 때 공이 무엇인지 그 의미에 대해서 해명하는 논서로서 공에 대한 어떤 지식을 주는 게 아니다. 중론은 문답 형식으로 돼 있는 연습 문제집 같은 그런 문헌으로 읽어가면서 공을 체득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읽으면서 체득되게 만드는 방식의 책은 사상서 가운데 인류 역사에서 이 책이 유일할 것이다.

 

서양 철학자 칸트, 헤겔이든지 동아시아의 노자의 도덕경, 공자의 논어든지 보통은 어떤 도그마, 관념을 주입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중론만은 어떤 관념을 주입하는 게 아니고, 읽어가면서 계속 사고를 훈련하고 공성(空性)이 무엇인지 공의 어떤 테크닉을 익히게 만드는 책이다.

 

비유한다면 헬스클럽에 갔을 때 아령이나 운동기구 같은 것이 바로 중론이다. 아령, 운동기구로 운동하고 나면은 근육이 생기고 힘이 세진다. 운동이 끝나면 헬스클럽에서 아령, 운동기구를 다 두고 나온다. 내가 힘이 세진 만큼 바깥에서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무거운 것 들기도 하고 여러 가지 힘든 일을 하면서 훈련된 건강한 체력으로 살아간다. 중론도 이와 같다.

 

중론을 읽을 때 철저하게 분석적으로 논리적으로 그 문장을 따라가면서 의미를 이해하고, 읽고 나면 싹 잊어버리고, 훈련한 사고력으로 세상 모든 일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힘이 생긴다. 공사상은 테크닉이다.

 

공사상은 도그마가, 이론이 아니고 테크닉이다. 그래서 선어록에서 선승들이 선문답할 때 이렇게 말하면 저렇게 엎어버리고, 세우면 죽여버리고, 죽이면 살리면서 티각태각 한다. 이것이 선어록이다. 그래서 선어록은 종잡을 수 없다.

 

일반 여느 책과 똑같은 건 줄 알고 이론, 도그마, 어떤 좋은 구절 하나 얻으려고 선어록을 보면 얻을 게 하나도 없다.

 

선에 대한 오해 중 하나가 마조선(馬祖禪)이다. 마조선(馬祖禪)을 보면 보통 일상선(日常禪),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말한다.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가 마조선이 아니다. 도불용수(道不用修), 도란 행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다. 여기서 끝나면 안 된다. 이 말 하나만 가지고 수행을 해서 도가 되는 것이 아니구나하고 착각한다. 마조 스님은 도불용수(道不用修) 다음에 일반 속인과 도인의 다른 점을 말하면서 도 닦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서 또한 도 닦는 사람에게 도를 닦는다고 도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도를 안 닦으면 속인이라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마조 스님도 옛날의 선승처럼 도 닦는 사람을 중도의 궁지로 몰고 가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중에 하나만 포착해서 그 하나가 마조선인 줄 알만 큰일 난다. 마조선도 똑같다.

 

마조선, 모든 선은 중도의 궁지로 제자를 몰아붙이는 것이다. ‘부처가 뭡니까?’ 하고 질문하니 마조선이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고 답한다. 이것을 마조의 사상으로 알면 안 된다. 즉심시불(卽心是佛), 부처가 마음이라고 말한 후 비심비불(非心非佛),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고 또 부정한다. 마음이 부처라고 금방 얘기했는데 다시 아니라고 본인 말을 뒤집어엎어 버린다. 이렇게 변증법적으로 계속 달라진다.

 

마조선의 실제 취지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도를 닦을 필요 없다는 도그마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조선을 오해하는 것이다. 마조선의 취지는 항상 상대방을 중도, 생각이 끊어진 자리, 흑백 논리가 끊어진 자리로 몰고 가서 생각이 끊어지게 하는 것이다. 중도의 궁지, 즉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가서 분별적 생각, 앎의 생각, 앎의 세계가 끊어지게 하는 것이다.

 

서울의 도선사 사찰 입구에 가면 일주문에 ‘입차문래 막존지혜(入此門來 莫存知慧)’라는 말이 쓰여 있다. 입차문래(入此門來), 이 문안에 들어온 다음부터는 막존지혜(莫存知慧), 지혜, 알음알이가 남아 있게 하지 말라는 뜻이다. 사찰 문안에 들어온 다음부터는 머리 굴리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앎의 세계가 끊어진 자리, 중도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승들이 중도의 궁지로 모는 것이 앎이 끊어지는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앎이 끊어진 자리를, 앎이 없기 때문에 무지(無智)라고 부른다. 무지(無智), 모름자리를 계속 강조하신 선승이 바로 숭산 행원 큰스님이시다. Only Don't Know!-오직 모를 뿐. 이 숭산 스님의 사상은 승조 스님의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에 실린 사상이다. 모든 선은 교학적 토대 위에서 성립한 것이다. 선은 글로 쓰여 있는 가르침(敎學)의 토대 위에서 글이 끊어진 자리,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선'에만 그냥 들어가면 큰일 난다. 지도 없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반드시 교학의 지도가 있어야지만 길을 잃지 않는다.

 

'사교입선(捨敎入禪)'은 '교'를 버리고 '선'에 들어간다. '교'를 버리려면은 버릴 '교'를 알아야 버린다. 버릴 '교'를 알지 못하면 버릴 수 없다. 그러니까 교학을 배운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옛날 선승들은 어마어마한 교학자들이다. 전기를 보면 대지도론등 읽은 책의 양이 상상을 초월한다. 그 다음이 선이다.

 

성철 큰 스님의 방에 가면 도서관이다. 처음 출가해서 행자가 오면 당장 책 읽기부터 시작하셨다. 그리고 난 다음 선에 들어온 다음부터는 책 읽지 말고, 경을 보지 말라고 말한다. 그때부터는 당신이 끌어줄 자신이 있기 때문에 경을 보거나 책을 보면 방해만 된다.

 

히말라야 산 에레베스트 꼭대기 올라갈 때 지도 보면서 올라가면 오래 걸린다. 그런데 다녀온 온 사람의 손을 잡고서 따라가면 금방 올라간다. 그래서 책 보고 경보지 말라는 얘기는 당신께서 끌어줄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신다. 그러면 경을 보고 책을 보면서 내가 지도를 보고 올라가야 한다.

 

「중론」은 선승들의 교화 방식이나 중론에서 글을 읽었는데 글의 내용을 내 마음에 남기는 게 아니라 글을 읽는 행위를 통해서 공이 무언지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아주 신기한 책이다.

 

중론, 중관 사상에 근거해서 성립한 새로운 동아시아의 불교의 한 종파가 바로 선종이다. 선종의 토대는 철저하게 중관학이다. 선종의 토대는 역사적으로 문헌적으로 추적해 봐도 그렇다. 사상적으로 비교해도 철저하게 중관학을 실천적으로 변형시킨 것이 바로 선이다.

 

승조의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에서 일체지(一切智)를 말한다. 반야가 일체지이다. 모든 것이 반야이다. 이 컵이 뭔지도 알고, 컴퓨터 모니터가 뭔지도 알고, 내가 누군지도 알고, 삶이 뭔지도 알고, 그 정체를 분명히 안다는 말이다. 삶이 뭔지 알아야 죽음이 뭔지도 안다.

 

겉보기에는 삶, 죽음, 하얀색, 빨간색, 병 들었다가 나았다가 천둥, 벼락, 번개, 인생, 우주 등 겉보기에는 삼라만상이다. 국어사전에 단어들이 여러 개가 있는데 겉보기에는 다 다르지만, 그 궁극의 정체를 끝까지 추구하니까 하나이다. 다 똑같다. 일체의 공성. 공하다는 것. 실체가 없다는 것은 다 똑같다. 컵에 대해서 컵이 뭔지를 집요하게 추구하니까 컵의 실체가 없다. 또 이마에 대해서 이마가 뭔지 집요하게 추구하니까 이마의 실체가 없다. 어디까지가 이미인지 알 수 없다. 이마가 점점 흐려질 뿐 그 경계선이 없다. 모든 개념은 경계부가 없다. 모든 개념은 테두리가 없다. 우리가 뻔뻔스럽게 이마가 어디인 줄 알고, 컵이 뭔 줄 알고, 삶이 뭔 줄 알고 이렇게 아는 척하고 지냈다. 조금 앉아서 조금만 생각해 보더라도 하나도 모르면서 진짜 너무 뻔뻔스럽게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마에 뭐 묻었어’, ‘컵에 물 받아와하면서 뻔뻔스럽게 말을 하면서 살았다. 원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모른다는 말은 무식해서 모르는 게 아니라 끝까지 들어가면 공성을 만나기 때문에 모른다는 것이다.

 

이 공성은 '일체지'가 공성이다. '공성', '공함'을 아는 지혜가 바로 '일체지'이다. 겉보기에는 삶, 죽음, 하늘, , 천당, 지옥 등 다 있지만 본질은 다 똑같다. 본질은 공성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의 본질을 다 안다는 것이 일체지이다.

 

공성(空城)은 법성(法性)이다. 같은 말이다.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법과 법성은 다르다. 법은 잘게 나누면 갖가지 개념들, 굵게 나누면 오온-색수상행식-이 다섯 가지 법이다. 세상을 다섯으로 나눴다. 또 좀 잘게 나눈 것은 12처-색수상행식과 색성향미촉법-이다. 이것도 법이다. 이보다 더 작게 나누면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단어 숫자만큼의 법이 있다. , 하늘, , 간다, 온다 등 개념들이 모두 법이다. 개념들, 머리 굴릴 때, 생각할 때 생각의 기초가 되는 토대가 법이다.

 

법성은 법의 본질이다. 영어에서 ness 붙이는 것이다. 다르마가 법이면은 다르마-네스가 법성이다. 법의 본질은 추구해 보니 공성으로 다 똑같다는 말이다. 모든 세상만사 그 본질을 법성이라고 부르는데 그 법성의 내용은 공성이다. 아무것도 없다. 이것을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고 한다. 제법실상(諸法實相), 모든 법의 참된 모습이 공성이다. 세상만사의 참된 모습이 공성이다. 법성-법의 본질-이나 제법의 실상-제법실상-이나 같은 말이다. 실상-참된모습-이 공성이다. 그래서 일체지가 공에 대한 앎이다. 아무것도 없는 정체불명이다.

 

승조의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에서 일체지는 무지(無知)이다. 그래서 책의 제목이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이다. 반야가 공성이고 공성과 반야는 같은 말이다. 반야가 공성이고 모든 법의 본질이고 법성이고 그다음 어떤 것이라도 끝까지 추구하면 반야, 공성이 나오기 때문에 일체에 대한 앎이다. 일체에 대한 앎은 앎이 끊어진 자리이다. 그래서 앎이 없어진 무지(無知)이다. 무지를 숭산 스님께서 Only Don't Know! 라고 말한 것이다. Don't Know-모른다. 모름자리. 불교 공부할 때 앞으로 모름자리를 추구하고 만나는 것이다.

 

왜냐하면은 생각이 병이기 때문에 불교의 인지적 수행의 목표는 두 가지가 있다. 인지수행과 감성 수행이 있다. 인지 수행은 불교 수행의 반쪽 수행이다. 탐욕-욕심내는 것, 분노-화내는 것, 교만-잘난 체하는 것-의 수행을 따로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먼저 해야 할 수행은 인지부터 정화해야 한다. 인지 정화(cognition purification)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이다. 중관학이 바로 인지 정화이다. 생각을 씻는 것이다. 불교 수행의 목표는 머리가 뇌가 머리가 돌아가면 뇌를 제거하라는 것이 불교 수행이다.

 

뇌가 생물학적으로 보면 몸의 주인이 아니라 몸의 종이다. 뇌가 없는 생명체도 많다. 지렁이는 뇌가 없다. 먹이 들어가는 입과 생식기만 있으면 번식한다. 그런데 고등동물이 되면서 점점 뇌가 생기고 발달하면서 원래는 몸의 종이였는데 인간 사회에서 몸의 주인 역할을 한다. 주객이 전도되어서 뇌가 자기 몸의 주인인 줄 안다. 그래서 뇌가 자기 주제를 알게 하는 게 불교 수행이다. 그렇다고 뇌가 몸에 종이니까 먹이 섹스에 종사하라는 것이 아니다. 먹이, 섹스의 세계는 짐승의 세계이다. 이 세계를 진작에 벗어난 다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계. 정. 혜 삼학에서 윤리, 도덕을 지키는 게 나의 짐승성, 동물성을 뽑아버리는 겁이다. 동물성이 다 사라진 상태의 사람에 한해서 뇌가 주인 역할을 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 정혜쌍수, 공성의 발견이다. 뇌가 종이라 하니까는 몸에 종사해야지 하면서 짐승처럼 살면 안 된다. 짐승은 뇌가 종이다. 불교 수행은 그런 짐승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짐승성을 초월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계를 지키는 사람에 한해서 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다시는 생명의 세계에 태어나지 않는다. 동물에 대해서 그러니까 머리와 섹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다음 뇌가 자꾸 돌아가서 여러 가지 잡념이 있다. 나는 누굴까? 세상이 뭘까? 왜 태어났나? 죽으면 어떻게 될까? 이랬는데 이것조차도 다 씻어 버린다. 죽을 때도 머리가 시원하기 때문에 전혀 찜찜한 게 없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를 떠올려도, 어떤 종교적 철학적 의미를 떠올려도 다 가짜이기 때문이다. 세상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죽음이 너무 무서웠는데 알고 나니 죽음이 없다. 죽음이 없고 나는 살아 있구나했는데 이것도 아니다. 삶도 없다. 여러분 지금 살아 있지 않다. 삶과 죽음은 다 머리가 만든 것이다. 죽음이 없다고 하니까 죽음만 없고 삶이 있는 줄 안다. 또 지옥과 천당 이게 다 마음이 만든 것이고 실제 있는 게 아니다. 천당, 지옥이 마음이 만든 거고 현재 이것은 실제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유물론이다. 천당 지옥이 다 마음이 만든 거라고 말하려면, 지금 이 순간도 마음이 만든 것이다. 이 순간도 지금도 없다는 통찰이 있는 사람만이 그 말을 할 자격이 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꼬집을 때 아프고 지금 살아 있고, 내가 깨어 있다. 이것은 분명히 있는데 천당 지옥은 마음이 만든 것이라고 하면 큰일 날 얘기이다. 이것은 유물론자의 허무주의이다. 지금 이 순간이 있는 사람에게는 천당 지옥도 있다. 천당도 있고 지옥도 있고 아귀 축생이 다 있다. 지금 이 순간이 없는 사람에게는 육도윤회가 일체유심조-다 마음이 만든 거다-라고- 말할 자격이 있다.

 

지금 중관학 전체와 선불교 그다음에 승조의 『반야무지론』과 숭산 스님의 Only Don't Know!를 연관시켰는데 다 같은 이야기이다.

 

초기불교의 고집멸도 멸성제, 사성제의 멸성제가 Only Don't Know! 지적인 측면에서 '모름 자리'이다. 멸, 번뇌를 제거하니까 괴로움의 세계가 우르르 다 무너지고 사라진다. ()라고 해도 되고 해도 된다. 멸성제는 12연기의 환멸문(還滅門)이다.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처(六處)·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 12가지 지분이 나타나서 계속 되풀이된다. 이것이 생명체의 생존 방식이다. 무명-어리석음이다. 어리석기 때문에 계속 살았다 죽었다 태어난다. 그런데 무명이 멸하니까는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니까 식이 멸하고 12가지 세상만사가 다 사라진다. 이것을 환멸문(還滅門)-돌이켜 소멸하는 방식-이라고 부른다. 12연기의 환멸문이 멸성제이고, 멸성제가 공성이고, 공성이 반야이고, 반야가 바로 Only Don't Know! 이다.

 

더 얘기한다면 선에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본래 아무것도 없다- 이것도 다 같은 이야기이다. 본래 아무것도 없다. 불교는 초기 불교부터 저 끝까지 그 맛이 다 똑같다. 불교는 다 한 맛-일미(一味)-이다. 일미(一味)는 해탈 맛이다. 이것이 다 경에 쓰여 있는 말이다. 해탈 맛-벗어나는 맛이다. 뭐가 있는 줄 알고 집착하고 살았는데 탁 놔버리는 그런 맛이다.

 

열반, 깨달음은 무슨 어마어마한 체험이 있고 휘황찬란하고 황홀경에 드는 것이 아니다. 그냥 해탈이다. 벗어나는 것. 편안한 것. 편안함. 이것이 불교의 끝이다. 살아도 편안하고, 죽을 때도 편안하다. 편안함으로 수행이 되었구나하는 것이다. 뭔가 큰 체험을 하고, 우주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중론의 가르침에 대해서 다시 한번 좀 상세하게 불교의 다른 가르침들과 연관시켜서 이야기해보았다. 이런 선의 통찰이 생기려면 반드시 교학에 대해서 아주 정통해야지만 한다. 그래야만 선에 들어가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중론은 공성이 무엇인지 불교의 본질을 얘기하는 문헌이다. 불교의 본질, 인지적 깨달음의 본질, 지적인 깨달음의 본질을 말하는 문헌이다. 감성적 깨달음은 따로 닦아야 한다. 초기불전 아비달마 문헌에서부터 감성과 인지를 철저하게 분리한다. 교학이 어렵다. 어려워서 잘 안 퍼져 있었다. 탐욕, 교만, 분노 이 감성은 따로 닦아야 한다. 이것까지 제거가 돼야지만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다. 머리만 깨달으면 깨닫는 것이 아니다.

 

『회쟁론(廻諍論)』은 논적이 공에 대해서 시비를 걸었더니 그것을 돌려 쳤다는 뜻으로 논쟁 돌려치기라고 해도 된다. 논쟁 걸어 놓은 것을 돌려 치는 것이다.

 

중관학 공부할 때 중론과 『회쟁론』 이 두 개의 책만 보면 중관학이 무엇인지 다 통달한다. 다른 책들도 다 중복된 이야기이다.

 

「육십송여리론」도 공에 대해서 말한다. 그 게송의 숫자가 60 수로 짤막하다. 「공칠십론」로 공에 대해서 말하는 데 게송의 숫자가 70수이다. 「광파론(廣破論)」은 좀 독특하다. 이것은 널리 논파한다는 책이다. 이 책은 니야야 외도 논파이다. 니야야 수뜨라(Nyayasutra)에서 16가지 범주에 의해서 논리학 이론을 소개한다. 그런데 용수 스님의 광파론에서 이 16가지 범주를 하나하나 거론하면서 전부 다 실체가 없다. 전부 다 오류에 빠진다고 논증하고 있다. 니야야 외도의 1616 범주 논파가 광파론이다.

 

대지도론은 『마하반야바라밀경』에 대한 주석서이다. 용수 스님이 화엄에 대한 주석서 『십주비바사론』을 저술하였다. 화엄경의 십주품 주석서도 썼지만 반야경 주석서인 대지도론도 썼다. 100권으로 양이 무지무지 많다. 중국 근대 철학자 가운데 캉유웨이는 구마라습 스님이 대지론번역한 이후에 이 논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본 사람은 양이 너무 많아서 아마 10명도 안 될 것이라 했다. 대지론이 왜 중요하냐면 아비달마 교학의 교리가 굉장히 많이 나온다. 용수 스님은 절대 아비달마 교학을 부정하지 않으신다. 대지론을 보면 철저하게 아비달마 교학에 근거해서 공성을 조작한다.

 

불교를 공부하다 보니 아무 행동이나 막 하면 도인이라는 말이 있어서 좀 이상했다. 그래서 용수 스님이 공사상의 전문가이니까 이분의 책에서 뭔가 세상에 대해서 긍정적인 것을 찾아보자 해서 번역도 없이 신수대장경 사서 재미있는 교리를 필기하면서 대지도론을 공부하였다. 당시에는 불교를 잘 몰라서 긍정적인 교리는 화엄적인 교리로 생각했다. 화엄은 절대 긍정이고 반야는 절대 부정이다.

 

화엄은 모든 게 다 생명이다. 해도 생명이고, 달도 생명이고, 일광보살, 월광보살, '주산신'- 산도 생명이고, '주하신'-강도 생명이고, '주해신'-바다도 생명이고 모든 것이 살아 있다. 그런데 금강경 반야에서는 거꾸로 살았다는 생각하지 말라고 말한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사상을 가지면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중생상이 살아있다는 생각이다. 살아있지 않다는 것이 금강경 가르침이다. 금강경에서는 세상에 살아 있다 할 것도 없다. 어떤 생명도 살아 있다는 할 것도 없다고 이야기하고 화엄경에서는 모든 게 살아있다고 말한다.

 

화엄경의 논조는 절대 긍정이고, 금강 반야 바라밀다경의 논조는 절대 부정이다. 그래서 그 당시 생각에는 화엄사상이 혹시 대지도론에 있지 않을까 해서 책을 보았다. 6개월이 지나면서 발견했는데 이제설(二諦論)에서 속제(俗諦)를 발견했다.

 

불교 가르침에는 진제(眞諦)-참된 가르침, 속제(俗諦)-세속 가르침 두 개의 가르침이 있다. 세속 가르침에서는 세상을 다 긍정한다. 악을 행하지 말고 선을 행하는 것이 속제(俗諦)이다. 선도 악도 없다는 것이 진제(眞諦)이다. 이처럼 다 연기한 것이기에 선도 악도 없다는 말도 있지만 문제가 지악향선-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말라는 말도 있다. 어느 것이 옳은가? 둘 다 옳다. 카테고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는 속제(俗諦)이고 하나는 진제(眞諦)이기 때문에 다 부처님 말씀이다.

 

그다음, 과거, 현재, 미래, 시간이 다 실체가 없다. 공 하다. 금강경에서는 과거신 불가하다. 현재신 불가하다. 미래신 불가하다. 즉 과거, 현재, 미래가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오후 불식-오후에는 식사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이야기한다. 어느 것이 맞는가? 둘 다 맞다. 오후 불식 이 계는 속제(俗諦), 과거, 현재, 미래가 없다는 진제(眞諦)이다. 이렇게 읽다 보니 열몇 가지 이런 충돌이 나왔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고 용수 스님께 여쭈어보니 하나는 진제(眞諦)고 하나는 속제(俗諦)라고 말한다. 그래서 공사상 공부할 때 제일 중요한 게 공이 아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진속이제(眞俗二諦)이다. 길장 스님이 말한 내용이다.

 

중관학이 동아시아에 들어와서 삼론학으로 변했다. 삼론학의 논문이 길장 스님의 저술이다. 길장 스님의 저술을 보면 이제(二諦)를 모르면 불교를 오해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진제(眞諦)-타파하는 가르침-를 모르면 중론을 알 수 없다. 중론서에서 가르치는 것이 모두 진제(眞諦)이다. 앞으로 한 학기 동안 진제(眞諦)만 배울 것이다. 나중에 다른 강의에서 불교 윤리학에서 속제(俗諦)를 배울 것이다. 불교의 윤리학 율장에서는 공 하다는 말이 단 한 번도 없다. 전체가 다 악을 행하지 말고 선을 향하라. 석가모니 부처님의 분별이다. 이것이 속제(俗諦)이기 때문에 속제(俗諦)는 여러분 율장에서 배우고, 진제(眞諦)만 배우는 것이 이번 학기에 중관학 강의이다.

 

진제를 모르고 속제만 알면 아무리 수행해도 해탈하지 못한다. 열반하지 못한다.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속제, 계를 잘 지키면서 아무리 남에게 많이 베풀고 수행해도, 기껏해야 천상, 하늘나라에 태어나고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거꾸로 속제를 모르고서 진제만을 알 경우에는 사견, 삿된 견해에 빠진다. 공만 알면 인생 망친다는 이야기이다. 반드시 속제와 진제를 같이 알아야지만 진정한 공사상이라고 쓰여 있다.

 

다시 정리하면 진제를 모르고 속제만 알 경우에는 깨닫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한다.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기껏 해봤자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다시 윤회한다. 거꾸로 속제를 모르고 진제만 알면 폐인이 된다. 그래서 공 사상이 무섭다. 이런 경고를 길장 스님과 용수 스님이 계속 말한다.

 

 

진제, 속제 개념은 다 알고 있었지만 대지도론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실천적 의미를 알게 되었고 이제설(二諦論)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용수 스님의 사상 전반을 알려면 대지도론을 보면 좋다. 용수 스님의 사상 중에서 공에 대해서만 알려면 중론이지만 전체를 알려면 『대지도론』 이다.

 

「십이문론」도 용수 스님의 저술이다. 십이문은 12개의 관문이다. 이것은 총 12 Chapter로 양은 작지만, 내용은 중론과 대동소이하다.

 

광파론는 니야야 외도 논파론으로 내용이 독특하고 대지도론은 아비달마 교학의 교리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용수 스님의 사상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알 수 있다. 대지도론속에 공을 이야기할 때 중론도 많이 인용된다.

 

 

용수 스님의 저술이 전승되는 것이 한 40여 가지가 있다. 후대에 이름만 붙인 저술도 있다고 한다. 600~ 700년 이후에 나타난 밀교 저술도 용수 스님 저술로 되어 있다. 티베트에서는 거의 다 용수 스님의 저술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면 용수 스님의 수명이 한 600~ 700년이라고도 말한다.

그다음 중요한 것은 문헌과 인물은 용수 스님의 직제자인 아리야제바(阿利耶提婆: Āryadeva, 170~270)이다. 티베트 불교계에서 용수 스님과 아리야제바(阿利耶提婆)를 묶어서 성부자(聖父子)’라고 말한다. 티벳 불교에서 밀교를 제외하고 분별적으로 공부하는 교학 가운데 가장 중시하는 교학이 중관학이다.

 

용수 스님과 아리야제바 스님과 원효 스님은 논사이다. 아리야제바 스님은 원한 맺힌 외도에 의해서 살해당한다. 신화적인 이야기이지만 살해당하면서 살해범에게 의발을 전수한다.

 

선불교는 하극상의 선불교이다. 스승을 잡아야지만 인가해 준다. 하극상인 집안이 발전하는 집안이다. 아버지보다 아들이 잘나야 하고, 아들보다 손자가 더 잘나야 한다. 이것이 선의 전통이 된다. 그래서 선불교에서 인가할 때 제자가 스승보다 잘나야 인가한다. 선불교의 전통 용어로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한다. 되는 집안은 자식이 아버지보다 낫다. 아버지의 통솔화에 들어가서 꼼짝 못 하면 점점 망하는 집안이 된다. 학문의 세계도 똑같다. 내 제자가 나를 밟으면 기뻐해야 한다.

 

아리야이제바가 논리적으로 외도를 박살을 내니까 자기 스승이 망신당한 것에 원한을 품고서 몰래 칼을 들고 들어가서 혼자 있을 때 칼을 찌른다. 그런데 아리야제바가 의발을 준 다음(인가했다는 뜻) 나를 죽였기 때문에 내 제자들이 지금 이 장면을 보면 너를 죽일 것이다. 그러니 빨리 피신하라고 말한다. 제자들을 악업 짓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살인범 외도를 도망가게 만든다. 구마라집 스님의 한문 번역 제바보살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또 하나 젊을 때는 중관학 논산인데 용수 스님과 역할이 다르다. 용수 스님은 불교 내적으로 소승불교, 아비달마 논사들의 법을 대하는 태도를 시정하면서 불교 내에서 내부를 평정한 분이다. 불교 내부 평정 후 바깥 외도를 주로 공격한 분이 아리야제바이다. 아리야제바의 저술은 거의 다 외도 공격이다. 외도의 이론들을 제시한 다음에 잘못된 것을 논증한다. 스승인 용수 스님에 의해서 불교 내부가 평정되고 나니까 직제자인 아리야제바의 역할은 불교 박의 외도들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원한을 사서 돌아가신다. 용수 스님도 소승불교의 원한을 계속 산다. 소승불교의 계속된 살해 위협 속에서 소승불교도에게 내가 죽기를 바라느냐?’하고 묻고 난 후, 그것을 원한다고 하니 당신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은 다음에 앉아서 좌탈입망하신다. 티베트 불교의 후기 중관파인 까말라실라 선승도 중국의 선승 마현 선승을 논쟁에서 제압한 다음 원한 산 중국의 선승들에 의해서 허리를 졸려서 죽었다는 설도 있다. 이렇게 중관학의 역사를 보면 아주 비극적이다. 세치혀가 아주 세서 원한을 많이 산다. 「조론(肇論)」의 저자인 승조 스님은 31살에 돌아가시는데 선어록에 보면 사형당했다고 나와 있다. 승조 스님의 전기에는 없는 이야기지만 진나라 후진의 황제에게 보여서 돌아가신 걸로 추정할 수 있다.

 

중관학 공부할 경우 깨달음에 대한 길이 멀지 않기 때문에 하여간 중관학의 공부가 독약과 같다. 독약은 기사회생의 명약으로 쓰일 수 있다. 항암제는 암 환자에게는 약이지만 일반 사람이 먹으면 독약이 된다. 깨달음이 멀지 않았기 때문에 전생에 지었던 과부가 한꺼번에 몰려온다고 말한다. 중관학 공부하려면 이것에 자신이 있어야 공부할 수 있다. 도고마성(道高魔盛), 도가 높아지면 마가 성한다는 말이다. 중관 논사들의 일생을 보면 그런 공통점이 있다. 평탄하게 사시다가 편안히 눈을 감는 사람은 적다. 특이하게 살해당했던 분이 많았다.

 

아리야제바는 젊은 시절 당시에는 힌두교, 바라문교에서 말하는 절대자인 천신인 대자재천(大自在天, Mahesvara)을 조각으로 만들어서 섬기고 기도하는 풍습이 퍼져 있었다. 아리야제바가 신사 신당에 들어가서 마혜수라신왕의 눈을 뽑아버리면서 신은 없고 모두 미신이라고 말한다. 그 당시에는 불상은 퍼져 있지 않았다. 불멸 후 500년 이후부터 불상이 생긴다. 그전까지는 부처님을 조각하지 않았다. 후대에 와서 불상을 모시기 시작하였다. 아리야제바가 눈을 뽑고 내려오는 길에 애꾸눈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누구냐고 물으나 내가 바로 네가 눈알을 뽑은 마혜수라천신이라고 답하면서 너는 불교도이기 때문에 자부심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네 눈을 뽑아서 나에게 달라고 말한다. 그래서 아리야제바가 자기 눈을 뽑아서 준다. 아리야제바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아리야제바가 애꾸눈이다. 아리야제바는 눈이 하나 없는 분이다.

 

 

아리야제바의 저술은 「백론」, 「사백관론」 한문 번역으로 남아 있다.  백론」100수의 계송을 쓴 다음 해석한 것이다. 내용은 외도 논파이다. 「사백관론」은 400수의 게송으로 티베트어 번역도 있다.  백론」은 구마라습 스님의 번역인데 실제 한문 번역을 보면 100론이 아니고 50론이다. 반만 번역했다. 제목은  백론」이지만 50수의 게송과 해설만 있다.

 

중관학파를 삼론학파라고 부르는데 삼론학은  백론」, 「십이문론」, 「중론」 세 가지 논서를 합해서 삼론이라고 한다. 구마라습 스님이 번역하신 이 세 가지 논서에 의거해서 수행과 신행을 하는 학파이기 때문에 삼론학파, 삼론학이라고 말한다.

 

보통 삼론종(三論宗)이라는 말을 쓰는데 삼론학은 종파의 형성은 안 된다. 일본에는 삼론종이 있다. 우리나라도 삼론종이 있지만 그냥 이름 붙인 것이다. 대륙(중국) 쪽에서도 없었다.

 

지금까지 인물과 문헌에 대해서 아주 간략하게 이야기했고 이제 중관학의 중관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야기하겠다.. 티베트어로 중관, 중관사상은 Madhyamaka(dbu ma), 중관사상의 인물, 중관 논사를 말할 때 Mādhyamika(dbu ma pa)이다.

 

일본 불교학자들이 Madhyamaka(dbu ma)현대어로 번역할 때 중관(中觀)이라고 번역했다. 중관(中觀)이라는 말은 승조 스님의 저술에 나온다. 승조의 논문 모음집은 「조론(肇論)」이다. 4개의 논문이 있는데 物不遷論(물불천론), 「般若無知論(반야무지론)」, 「부진공론(不眞空論」, 「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이다. 이 4개의 논문이 따로따로 흩어져서 전승되다가 후대에 진나라 때 묶여서 한 권의 책이 되는데 그것이 조론이다. 승조의 논문 모음집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묶어지면서 서문격의 논문인 종본의(宗本義)가 앞에 하나 더 생긴다. 이렇게 해서 지금 전해지는 것은 총 5개의 논문이다. 원래는 4개의 논문이었는데 후대에 종본의(宗本義)하나를 추가하면서 승전 스님의 이름을 붙여서 오늘날의 5개의 논문이 되었다고 추정한다.

 

승조의 조론논문을 보면 中觀 중관에서 말하기를 觀方知彼去(관방지피거)-관찰해서 그가 가는 것을 안다. 去者不至方(거자부지방)-그 방향으로 가는 사람은 도달하지 못한다.. 이렇게 계속 中觀이 계속 나온다. 「반야무지론」에서도 ‘中觀이 나온다. 여기에서 현대 일본 학자들이 인용해서 Madhyamaka중관이라고 번역했다.

 

원래 전통적으로 중관학파가 아닌 삼론학파, 삼론 이라고 불렀다. 동아시아 현대 불교학에서Madhyamaka를 번역해서 중관이라고 부른다. Madhyamaka(가운데-Madhya)’이라는 뜻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ya는 범어에서 명사를 어미이다. 명사어미 ya가 붙어서 Madhya가 명사이다. ma형용사 최상급을 쓸 때 ma가 붙는다. Gautama 할 때 ma도 가장 최고를 나타나기 위한 것이다. 가장 궁극적인 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Madhyama는 가장 가운데의 것이라는 뜻이다. ka가 붙으면 형용사형 축소 의미가 되는데 학파 혹은 사상-Mādhyamika 중관학파, 중관사상-이 된다. Madhyamaka이렇게 분석하면 네 가지 범어의 요소가 합해져서 만들어진 말임을 알 수 있다. 중관학은 가장 가운데를 지향하는 사상이고 논서이다.

 

지금까지 중관학의 문헌과 중관학의 인물과 중관학의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 설명했다. 중관학의 인물에 대해서 조금 더 추가하겠다..

 

중관학파를 나눈 다면은 초기. 중기. 후기.중기. 중관학파로 나눌 수 있다. 지금까지 현존하는 초기 중관학파 인물은 용수 스님, 아리야제바이다. 중기 중관학파는 청변(淸弁,Bhāvaviveka-자립(自立)논증파)과 월칭(月稱,Candrakīrti-귀류(歸謬)논증파()이다. 『중론게송은 455455 수로 용수 스님께서 저술하신 것으로 내용이 어렵다. 여기에 주석을 다는데 그 방식에서 자립 논증파와 귀류 논증파로 대립하여 큰 논쟁이 일어난 시기이다. 당시 인도에서는 자립 논증파, 귀류 논증파라는 구분이 없었지만 티베트에 불교가 전해지고 재정립하는 가운데 생긴 말이다. 자립 논증, 귀류 논증은 인도에 없는 말이고 티베트 어이다.. 이것을 현대 학자들이 범어로 복원하면서 전해진 현대 서양 학자들이 만든 것이다. 일본 학자들이 Svātantrika, Prāsangika를 한문으로 자립 논증파, 귀류 논증파로 번역했다. 1930년대 대륙(중국)의 법존(法尊) 스님이 자속파(自續派), 응성파(應成派)라고 번역했다. 후기 중관학파를 유가행 중관파라고 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후기 중관학 사상이 나타날 때 유식 불교가 탄생했다. 불교 교학 중에 유식학과 중관학을 종합한 사상이 후기 중관학파이다. 그래서 유식불교를 유식학파, 유가행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모든 게 마음이라는 발견을, 수행을 통해서 체득했기 때문에 수행-요가(yoga)를 한자로 유가(瑜伽)고 번역한다. 요가 수행을 통해서 이런 교리를 체득했기 때문에 유가행파라고 부르기도 하고 합해서 유가행 유식학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식학파는 교리 사상을 중심으로 번역한 것이고 유가행 파는 수행을 중심으로 번역한 것이다. 유가행 유식학파는 둘을 합해서 부르는 말이다. 유가행 유식학파의 교리와 중관 교리를 결합한 것이 후기 중관학파이다. 특징은 중관학적 통찰을 제일 위에 놓고 그다음이 유가행의 통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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