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관학 강의 7강: 중관학이란 무엇인가? (계속)
중관학은 불교학의 다른 분야의 어떤 학문과 다르게 교법을 익히는 학문이지 어떤 개념을 암기하는 학문이 아니다. 중관학은 하나의 테크닉이기 때문에 한 학기 동안 공부할 내용은 훈련을 통해서 어떤 문제가 닥치더라도 어떤 사상이든지, 어떤 이론이든지 중관학의 반 논리적인 테크닉으로 해체시킬 수 있는 혹은 근거가 없다는 점을 폭로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이번 학기 강의의 목표이다.
중관학의 교과서 격인 책이 중도를 진정한 체득하게 해주는 논문서인『중론』이다. 이 책은 중도의 개념적 지식, 중도의 이론을 암기하게 해 주는 책이 아니다. 『중론』의 문답 형식 질문과 답변 형식의 연습 문제를 풀다 보면 중도를 알 수 있게 되고 또한 연기가 무엇인지 연기의 본질도 알게 된다.
보통 연기하면 원인에서 결과 나온다는 인과법을 말하지만 진정한 연기는 그냥 인과론이 아니라 중도 인과론이다. 인과론에는 원인과 결과가 이어져 있다는 상견적 인과론과 원인과 결과가 끊어져 있다는 단견적 인과론 두 가지가 있다. 그런데 『중론』은 둘 다 배격하고 비판한다. 원인과 결과가 이어진 것도 아니고, 끊어지는 것도 아닌, 중도 인과론이다. 원인과 결과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기에 불일불이(不一不異)하다. 하나도 아니고 둘이 아니다. 원인과 결과는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끊어지는 것도 아니기에 불상부단(不常不斷)이다.
이어졌다-끊어졌다, 같다-다르다. 이것이 다 흑백논리, 이분법이다. 크게 이야기하면 이분법을 비판하는 게 연기이다. 이분법 사고방식을 타파하는 것이 연기법이다. 이 연기법을 다른 말로 중도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양극단을 배격하고 이분법을 타파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중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하는 중용과 유가에서 말하는 중용과는 다르다. 불교의 중도는 철저한 이분법 타파, 양극단의 배격이다.
양극단 배격이 흑백논리 비판이기에 불교의 중도는 중도 인과론이다. 중도가 흑백논리 배격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이다. 그래서 공성과 일치한다. 공과 중도와 연기가 같은 말이다. 긍정성으로 이야기하면 연기이고, 비판을 이야기하면 공이고, 흑백논리 비판으로 이야기하면 중도이다. 궁극적으로는 아무것도 없다. 공이다.
중관학에 공부할 때 가장 중요한 세 가지 개념이 중도, 공, 연기이다.
『중론』은 중도론이고 다른 말로 공을 논증하는 공론, 공성론이라고 해도 된다. 다른 말로 연기에 대해서 지식을 주는 게 아니고 연기를 체득하게 해주는 문헌이라서 연기론이라고 해도 된다.
『중론』은 총 27장, 455수의 게송으로 되어 있다. 문제는 체계 없이 질문과 답변이 나열되어 있어서『중론』을 읽으면서 중관 논리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학문을 이해하려면 체계가 있어야 한다. 초등학교 공부할 때 수련장 문제집만 풀면 안 된다. 전과를 통해서 전체를 조망하고, 그것에 근거해서 수련장 문제를 풀어야만 시험을 잘 볼 수 있다. 그런데 중관학은 논법이기 때문에 체계를 조망하는 전과는 없고 오직 문제를 푸는 수련장만 있다.
총 27장에 걸쳐서 여러 가지를 비판하는데, 제1장부터 비판의 소재 대상만 달라지고 부처님이 가르치셨던 모든 것이 의존적 발생한다는 연기법을 비판한다. 제1장부터 큰 폭탄선언을 하는 것이다.
무엇을 비판하냐면 연기에 대한 분별적 이해를 비판한다. 진정한 연기는 의존해서 발생한다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도 있다. 이것도 아니다. 이것은 말로 표현된 연기법이기 때문이다.
『중론』제1장 관인연품(觀因緣品)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는 초기불전에서 말하는 연기의 공식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이것이 왜 잘못되었는지 그대로 비판한다.
큰방-작은방의 연기를 말할 때 보통 연기를 큰 방이 원래 있는 게 아니고 작은 방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큰 방이 있다고 말한다. 어떤 방의 크기는 그 방에 들어가기 전에 염두에 두었던 방의 크기에 비교해서 현재의 방의 크기가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큰 방이 원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연기를 가르칠 때는 쓸모가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설명은 악순환의 오류, 순환논법의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연기의 궁극적 의미는 아니다.
큰 방이 왜 있냐 하면 작은 방이 있기 때문이다. 큰 방이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근거는 작은 방에 있다. 그런데 작은 방은 또 원래 있는가? 아니다. 작은 방이라고 이야기하려면 그전에 큰 방이 있어야 한다. 이 큰 방을 규정하기 위해서 작은 방을 근거로 삼았는데 근거를 삼으려는 작은 방도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전 단계의 큰 방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닭이 먼저인가, 닭알이 먼저인가 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연기 공식 가운데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면 이것이 있다는 우리가 흔히 하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용수 스님의 중관 논리 분석에 의하면 악순환의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이렇게 아무리 훌륭한 연기법이라고 하더라도 말로 표현된 이상은 전부 다 오류가 있다. 아무리 간단하고 단순한 말이라고 해도 다 틀린다. 또 말을 하지 않고 생각만 했어도 다 틀린다. 앞으로 한 학기 동안 부정하면서 그것이 어떻게 해서 틀린 것인지, 왜 문제가 있는지 공부할 것이다.
중관학의 가르침은 사람만 위한 것이 아니다. 생명 있는 모든 존재는 자기 자신을 위한 분별인 위자비량(爲自比量)을 가지고 있다. 모든 생명 있는 존재가 가지는 위자비량(爲自比量)을 비판하는 것이 중관학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전체가 인간의 언어로 돼 있지만 그 대상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이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 불교 용어로 중생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인간만을 위한 가르침이 아니다. 중관학은 논리적 사유를 비판하는 것이다.
『중론』이라는 연습문제를 아무리 풀어봤자 체계가 잡히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중론 연구는 신라 말까지 1000년 동안 끊어져 있었다. 신라의 원효 스님은 『중론』을 보았다. 원효 스님의 책 중에 ‘종요’라고 이름이 붙은 것은 모두 책을 요약한 요약본이다. 중관학 관련 종요는 『중관종요(中觀宗要)』, 『삼론종요(三論宗要)』두 가지이다. 이렇게 신라 시대에는 『중론』이 연구되었다. 신라 불교는 인도 불교이다. 고려, 조선부터는 선불교의 탄생으로 동아시아 중국 불교로 바뀐다. 그래서 신라 불교 공부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인도 불교의 원전 공부이다. 인도 불교에 정통한 사람만이 한국의 원효 스님을 연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원효 스님이 보았던 책을 다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원효 스님 봤던 책 다 보고서 연구하는 사람 단 한 명도 없다. 어쨌든 신라 시대 이후 천년 간은 중관학의 맥이 끊어졌다. 티벳 불교에서는 제일 중시하는 책이 『중론』인데 고려시대, 조선시대에는 『중론』이라는 말 자체가 단 한 글자도 안 나온다.
서울캠퍼스 동국대학교 김잉석 교수님, 김인덕 교수님, 고려대학교 김하우 교수님들이 근대 불교학을 연구하면서 우리나라에 『중론』연구가 다시 시작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불교학자는 아니었지만 원래 기독교 신자였다가 불교를 접하고 개종한 황산덕 씨가 우리나라 『중론』 관련 첫 번째 책인『중론송』이 있다. 이후 후학으로 세대를 이어서 중론 관련 논문들이 나오고 있다.
서양 논리와 대비시켜서 중관학을 이야기하면 조금 쉬워진다. 서양 논리에는 체계, 시스템이 있다. 서양의 일반 논리학은 개념론, 판단론, 추리론 3단계로 되어 있다. 제일 처음 개념이 무엇인지 내포와 외연에 관해서 설명한다. 개념에는 내포와 외연 2가지 속성이 있다. 내포는 의미이고 외연은 의미이다. 의미가 커지면 범위는 좁아지고 범위가 넓어지면 의미는 좁아진다. 예를 들어 ‘소’의 정의를 내려보자. 소는 머리에 뿔이 두 개가 달려있다고 할 때 그 의미를 보면 소가 맞지만, 머리에 뿔이 2개 있는 것은 소뿐만이 아니라 양도 있다. 그 의미의 범위가 너무 넓다. 그래서 그 의미를 좁히려고 머리에 뿔이 2개 달리고 ‘음매’하고 우는 것이라고 하면 그 범위가 조금 줄어든다. 이렇게 의미가 늘어나면 범위가 줄어든다. 의미와 범위는 역비례관계다.
개념론 다음은 판단론, 분석 판단과 경험 판단이 있다. 그다음은 추리론, 삼단논법을 말하고 마지막은 논리적 오류론 – 잘못된 삼단논법을 작성했을 때, 잘못된 추리를 했을 경우를 말한다. 악순환의 오류, 무한 소급의 오류, 선결문제, 미해결의 오류,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 이런 식으로 등 여러 가지 오류를 제시한다.
서양 논리학의 체계에 대응시켜서 중관학을 공부하면 중관학의 논리는 서양 논리학의 논리체계를 부수는 것이다. 논리학 전체를 다 부수는 것이다. 논리학의 논리 전체가 모두 근거가 없다는 것을, 폭로하는 것이 중관학이다.
논리학에 대비시켜서 개념은 어떻게 논파하는지, 왜 모든 판단이 다 틀렸는지, 왜 모든 개념은 세상에 다 없는 건지, 왜 모든 추리가 다 틀린 것인지를 하나하나 중론에서 추출해서 대비시킨 것이다. 『중론』이 문답으로 되어 있지만 어떤 것은 개념 비판이고, 어떤 것은 판단 비판이고, 어떤 것은 추리 비판으로 세 가지가 있다. 이 3가지가 섞여 있어서 그것을 잘 파악하지 못한다. 중관학을 논리학과 반 논리학적으로 대비시켜서 이해할 때 중관학을 이해하기 쉬워진다.
중관학에서 개념을 어떻게 논파하는지 공부할 것이다. 플라톤의 실재론, 이데아 사상에 근거한 서양 논리학의 모든 개념은 실체가 있다. 이데아, 그 관념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소’를 보고 ‘소’인 줄 알 수 있다. 이렇게 모든 개념은 실제 외부 대상으로 실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삶과 죽음도 실제이다. 살아 있다는 것과 죽음도 실재한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중관학에서는 ‘소’라는 개념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삶과 죽음도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은 불교 불자들 사이에서는 일상화된 흔한 말이지만 서양 역사에는 없는 말이었다. 삶이 있고 죽음도 있고 모든 개념 하나하나가 실재하는 줄 안다.
중관학에서 이 개념을 비판할 때 어떤 개념이든 연기에서 발생한다. 어떤 개념이든 혼자 발생하는 건 없다. 그래서 공 하다. 실체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삶과 죽음도 원래 있는 것이 아니다.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죽음도 없다. 무언가 살아 있으려면 계속 변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매찰나 계속 변한다. 현대 과학의 생물학으로 보아도 우리의 몸은 여러 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생물학에서 세포는 그 하나하나가 생물이다. 이 세포의 생명은 한 달이다. 이 세포들이 모여서 우리의 몸을 이룬다. 지금, 현재의 몸은 2달 전의 몸이 아니다. 근육과 피부는 한 달이면 100%가 다 바뀐다. 뼈도 마찬가지다. 오래가면 6개월이고 지나면 다 바뀐다. 이렇게 보면 작년에 있던 몸뚱이는 하나도 없다. 이렇게 현대 생물학으로 보더라도 살았다는 의미가 참 모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서양 논리학에서는 개념상으로 삶과 죽음이 모두 실재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분명하지 않다.
더 이야기하면 지금, 이 순간 우리는 하나의 생명체이다. 같이 소리 듣고 같이 공유한다. 그러나 강의 끝나면 다시 흩어진다. 똑 같다. 지렁이가 한 마리가 있는데 반으로 잘랐다. 그러면 이 지렁이가 윤회하는가? 지렁이가 두 마리가 되었다. 하여간 티베트 불교에서는 한 사람이 둘이 되기도 하고, 둘이 하나가 되기도 한다. 윤회할 때 그냥 하나가 되는 것이 윤회가 아니다. 하나가 둘이 되기도 하고 둘이 하나가 되기도 한다. 쿤둔 영화를 보면 여자 어린아이와 남자 어린아이가 춤을 추는 장면이 나오는 데 이것은 한 명의 고승이 둘로 나타난 것이다. 또한 둘이 하나가 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지렁이도 반으로 자르면 그다음부터는 두 마리가 되는 것이다. 아메바, 짚신벌레가 한 마리인데 그것을 반으로 자르면 이분법에 의해서 두 마리가 된다. 아메바 한 마리를 바늘로 꼭꼭 눌러서 찔렀는데 그 한 마리가 두 마리가 되었다. 그 후 아까 바늘로 찔렸던 아메바가 누구인지 물으면 그 두 마리가 모두 자기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 두 마리중 한쪽만 바늘로 찌른 후 찔린 아메바가 어느 것이냐고 물으면 한 마리만 답할 것이다. 그래서 그 순간부터 하나가 둘이 된다. 이렇게 하나가 둘이 되기도 하고 둘이 하나가 되기도 한다.
물고기 떼도 보면 한 마리처럼 떼를 지어 몰려다닌다. 그러다 흩어지기도 하고 다시 한 마리처럼 떼를 지어 다니기도 한다. 그래서 무아라는 이야기다. 개인으로는 세포가 마스게임을 하면서 하나의 개체처럼 시늉하고 있지만, 강의 시간에 일심동체처럼 같이 강의를 듣고 같이 공감하고 있지만 강의가 끝나면 다시 흩어진다. 그러니까 죽었다, 살았다, 한 사람이다, 등 이것이 모두 무의미한 말이다.
초기불전 경에 보면 살아 있으려면 상(常), 일(一), 주재성(主宰性). 이 3가지가 동일해야 한다. 작년의 나와 지금의 나가 똑같이 변하지 않아야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단일해야 한다. 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보면 한 사람이 아니다. 여러 마리가 모여서 왔다 갔다 수억 마리의 세포들이 모여서 마스게임, 세포 카드섹션 하면서 시늉하고 변한다. 주재성(主宰性),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을 주재성이라고 한다. 아침부터 굶어서 나도 모르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은 주재성이 없다는 것이다. 내 몸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공부할 때 무언가 떠오른다. 이것이 내 마음대로 떠오른 것인가? 모른다. 그냥 떠오른 것이다. 마치 창문 바깥에서 갑자기 참새 한 마리가 날아가듯이 내 머릿속에서 생각이 그냥 떠오른다. 그러니까 안쪽이다. 바깥쪽이다. 내가 한다. 남이 한다. 말할 수 없다. 주재성이 없다는 말이다. 태어날 때 내 모습을 내가 디자인에서 태어날 수 없다. 태어나 보니까 남자이고 여자이다. 다 연기한 것이지만 주재성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무아이고 무상이다. 상. 일. 주재성이 있어야지만 살아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상. 일. 주재성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살아 있지 않다. 살아 있어야지만 죽을 수 있는데 살아 있지 않으니까 죽을 수도 없고 죽음도 무의미하다. 살았다-죽었다는 굵게 본 착각 위에서 만들어진 환상이다.
플라톤 이후의 세계 존재론, 서양 논리학사는 삶, 죽음 이런 개념들, 이 콘셉트 하나의 단어, 그 개념이 실체가 있다고 착각한다. 그런데 중관학에서는 어떤 개념이든 연기한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살아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한다. 또 죽음을 염두 하니, 나는 살아 있구나 하고 착각한다. 어떻게 죽음을 염두하는가?? 내가 죽은 다음에 없어질 것이다. 내가 왜 태어났는가? 그전에는 내가 없었는데 지금 생겼기 때문이다. 탄생 전에 업을 無를 떠올리고 죽음 다음에 있을 有를 떠올린다. 생각 속에서는 이렇게 생각 수 있다. 그러나 탄생 전에 有를 체험할 수 없고 죽음 전에 無를 체험할 수 없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한 번도 체험한 적도 없고 체험할 수도 없는 것을, 마치 체험한 적 있는 것처럼, 실제 하는 것처럼 상정한 다음 나는 실제 지금 있다고 하는 것이다. 탄생 전에 無를 체험한 적이 없기에, 죽음 후에 無를 체험할 수 없기에, 양쪽이 다 지워진다. 지금, 이 순간은 내가 살아있는 것을 체험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살아있다 할 것도 없다. 우리는 지금 살아있지 않다. 그렇다고 죽었다는 것도 아니다. 삶과 죽음의 개념을 갖다 붙이는 게 무의미하다는 말이다.
그냥 콸콸 흘러가는 무상한 현상의 흐름만 있을 뿐이다.
온 우주적인 흐름이다. 이쪽도 없고 저쪽도 없다. 안쪽도 없고, 바깥도 없다. 심신탈락, 몸과 마음이 다 떨어져 나갔다. 세상에 다 우르르 무너진다. 불교학에서는 삶, 죽음도 분석해서 실체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데 서양 논리 역사는 실체가 있다고 착각한다. 반 논리학인 중관학에서는 연기한 것이기에 공 하다. 삶과 죽음도 다 연기한 것이기에 공하다는 것이다.
내가 살았다는 착각에 연기해서 죽음이 있다는 착각이 생긴다. 삶과 죽음은 연기한 의존 개념이다. 큰 방을 염두하면 작은 방이 있듯이 살았다는 착각을 하면 죽음이 가시화되고 무서워진다. 죽음 다음에 無, 죽음 다음에도 사라지는구나 하고 마치 체험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니까 살아 있구나 하고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면서 착각하면서 사는 것이다.
이것이 연기이다. 삶과 죽음의 개념조차 연기한 것이기에 공한 것이다. 실체가 없다.
삶과 죽음이 원래 없다는 말이 어려운 게 아니고 불교 입문할 때 그냥 더하기 빼기 문제처럼 생각된다. 불자가 되면 먼저 삶과 죽음부터 초월해야 한다.
유가 사상도 철저하게 실재론이다. 도가 사상은 실재성이 많지만, 불교와 비슷하다. 도가의 노자는 독각 이야기를 많이 한다. 상하, 고저, 장단 등 연기법도 도덕경에 나와 있다.
동아시아 삼론학의 뼈대가 되는 학문이 유가의 현학(玄學)이다. 동아시아의 형이상학이 현학이다. 동아시아의 노자, 장자, 주역 등에 근거한 학문이 현학이다. 중국 유가 내에서 위나라 정시년(正始年)에 유무(有無)를 소재로 한 현학 논쟁이 벌어진다. 세상의 본질이 有인지 無인지를 두고 유무 논쟁을 하였다. 노자에서는 무에서 유가 나오고 유에서 만물이 나왔다고 말한다. 일생, 이생, 삼생이라는 말도 있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이 노자 『도덕경』의 근본 사상이다. 그래서 無가 먼저라는 말이다. 이것을 귀무론(貴無論)이라고 한다. 하안, 왕필 사상가가 있다. 이 이론에 반발하면서 숭유론(崇有論)이 등장한다. 여기에는 배위가 있다. 이후에 양자를 종합해서 사물 하나하나는 그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독화론(獨化論)이 나온다. 모든 유의 세계, 존재자는 무를 내재한다는 것이다. 홀로 변화했다는 뜻으로 사물 하나하나가 본질을 내재한다는 뜻이다. 곽상이 있다.
후 한 말에 유교 이념에 의해서 통치하다 보니까는 서로 파가 나뉘고 정권에 참여하고 싸우면서 잔혹한 일들이 일어나자 유교 지식인들이 은둔 도피 생활을 하였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 죽림칠현이다. 유교 통치 이념으로 인해 잔혹한 일들이 발생하자 통치 이념을 바꿔보자는 철학적 논쟁이 벌어진다. 이것이 위나라 정시년의 현학 논쟁이다. 유가적으로 통치할 것인가, 도가적으로 통치할 것인가를 두고 싸우는 것이다.
이때 실재론 때문에 유가론이 너무 잔혹하다며 하안, 왕필의 귀무론이 제일 먼저 등장한다.
노자, 장자의 무위자연의 무를 중시하는 통치가 세상을 행복하게 한다는 귀무론이 등장하였다. 귀무론이 퍼지고 나니 허무주의에 빠져서 세상에 질서가 없어지니 무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유만이 중요하다는 숭유론이 등장하게 되었다.
왕필에게 공자와 노자 가운데 누가 더 뛰어난가? 하고 질문하니 공자가 더 높다고 답하였다. 공자는 무를 통달했기에 유를 논했다. 무를 통달해서 시시비비, 분별만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자는 아직도 무를 추구하고 있다. 그래서 공자가 더 높다고 답변하였다. 유가 사상도 실재론이다. 왕필의 해석에 의하면 그냥 실재론이 아니라 철저한 본질을 토대로 한 실재론이다. 무의 세계, 공의 세계를 꿰뚫어 본 사람 만이 시비 분별을 정확히 할 수 있다.
부처님도 똑같다. 불전 가운데 가장 심오하고 난해한 불전이『율장』이다. 『율장』이 철저한 유의 세계이다. 공자의 논어와 똑같다. 『율장』을 보면 공은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전부 다 시시콜콜 이러면 된다. 저러면 안 된다. 이것은 옳다. 저것은 그르다. 꾸짖었다가 야단쳤다가 계속 그 이야기이다. 율(律)은 깨달은 분이 아니면 한 글자도 손대지 못한다. 마치 공자의 『논어』가 심오하듯이 그렇게 심오한 것이 율(律이)다. 불교 공부할 때도 어려운 게 제일 어려운 게 응용 불교이다.
공사상은 조금만 연습하면 쉽다. 생각 깨는 것은 쉽다. 그런데 세속에서 어떻게 분별하고 살아갈 것인가? 이것을 정확하게 불교에 근거해서 얘기 수 있는 것은 아주 힘들다. 응용 불교가 이것이다. 생명윤리, 사회윤리, 남북문제, 빈부차이, 사회혼란, 사회분열, 소통 등 철저하게 불교의 불전에 근거해서 말하기는 어렵다.
도가는 실재론보다는 무, 허무주의에 치우쳐 있고, 유가론은 실재론, 유의 사상이다. 그렇다고 단순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이 왕필의 설명에서 공자가 유만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무를 통달한 유를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관학 공부할 때 최종 목표는 공을 아는 것이 아니다. 공을 끝내고 세속에서 분별하면서 시비를 가리고 살아가기 위해서이다. 항상 앞에 결정할 문제가 닥친다. 그때 가장 올바른 판단과 선택을 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관학이다. 분별의 때가 씻어지니까 선입견과 고정관념이 없어지고 모든 삶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이 중관학 공부의 목표이다. 모든 불자가 부처님처럼 그렇게 살아야 한다.
부처님은 항상 사유하면 살았다. 불교도는 부처님 흉내를 내야 한다. 곰곰이 생각하면서 모든 것을 사유하고, 곰곰이 생각하면서 어떤 결정이든 허투루 내지 않고, 항상 어떤 식의 조건 관계가 있는지 연기의 관계를 살피면서,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해 항상 정답을 내 것이 불자이다. 그래야 불교도라고 말할 수 있다. 불교도는 항상 사유하고 바른 판단을 하면서 그 앞을 밝게 만드는 삶을 사는 것이다.
지금 삶과 죽음을 따져보니 삶과 죽음이 없다. 개념 논파, 개념에 실체가 없다는 논파를 한참 훈련해야지 된다. 큰 방-작은 방, 긴 것-짧은 것은 쉽다. 긴 것이 세상에 원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길다고 할 때 그냥 긴 것이 아니다. 짧은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길어진 것이다. 더 긴 것을 염두하면 짧아진다. 같은 길이라고 하더라도 무엇을 염두하였는지에 따라서 길이가 길어지기도 하고 짧아지기도 한다. 길다-짧다는 밖에 있는 것이다. 우리 머리가 만든 것이다. 우리 마음이 만든 것이다. 큰 방-작은 방도 원래 있는 것이 아니다. 전부 다 생각이 만든 것이다. 내가 작은 방을 염두에 두고 들어가면 큰 방이 돼 버리고 작은 방을 염두하면 큰방이 된다.
큰 방-작은방, 길다-짧다, 삶-죽음 6개의 개념은 세상에 실제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의 6개의 개념, 단어는 의미에서 전부 다 해탈했다. 해탈이 다른 것이 아니다. 비눗방울 터뜨리듯 터뜨리고 증발시키면 해탈이다. 우리의 삶의 세계에서, 지금 생각하고 있는 실제 세계에서, 긴 것도 사라졌고, 짧은 것도 사라졌고, 큰 방도 사라졌고, 작은 방도 사라졌고, 싸움도 사라졌고, 죽음도 사라졌다. 그런데 아직 참 많이 남았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단어 숫자만큼 남았다. 이것을 훈련, 연습하는 게 중관학이다. 개념 비판하는 것이 중관학이다. 이쁘다-못났다는 기준도 시대나 나라에 따라 모두 다르다. 현대의 미의 기준은 힘 있는 서양의 미가 기준이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한 얘기가 있다. 달이 지평선에 뜰 때는 굉장히 크다. 그러나 하늘 중천에 뜨면 달이 작아진다. 이것은 렌즈 효과이다. 지평선을 바라보는 것은 볼록렌즈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그래서 달이 커 보인다. 뉴턴 물리학자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달이 중천으로 올라가면 작아진다. 달의 크기에 변화가 없는 것은, 분석해서 우리 모두 다 알지만 알지만은 달이 크게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지평선의 달을 아무리 분석해도 달의 크기에는 변화가 없다. 그냥 렌즈 효과로 인해서 크게 보이는 것이다. 그렇듯이 지금 미의 기준도 서양 사람의 기준을 흉내 내는 것이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이쁘고- 잘생기고의 기준에는 소용이 없다. 그러나 이것을 초월해서 있는 그대로 그냥 바라볼 수 있는 관이 생기면 좋다. 이쁘다-잘생겼다는 모두 무의미하다는 말이다. 시대가 만든 착각이다. 미-추의 기준이 없다는 이야기다.
불전에 나오는 예를 들면 부처님 제자 중에 난다(難陀, Nanda)라는 제자가 있었다. 난다는 부처님의 이복동생이었다. 마야부인이 석가모니 부처님을 낳고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여동생이자 부처님의 이모인 마하빠자빠띠가 부처님의 계모(앞의 어머니를 계승하신 분, 이어서 어머니 역할을 하신 분)가 되었다. 이분의 아들이 난다이다. 부처님이 출가하신 후 속가족을 거의 다 출가시킨다. 깨닫고 나니 친척들에게 가장 잘해주는 것이 출가시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생명의 세계에서 출가만큼 좋은 것이 없다. 난타도 결혼한 상태이고 부인도 있지만 강제로 출가하였다. 그런데 부인이 너무 미인이어서 출가를 한 후에도 너무나 집에 가고 싶어 한다. 하루는 부처님께서 이 난다를 데리고 인근의 원숭이 동산으로 데리고 간다. 나무 위에 앉아 있는 애꾸눈 원숭이 한 마리와 네 부인 중에 누가 더 이쁘냐고 하니까 부인이 더 이쁘다고 말했다. 그다음에는 부처님이 신통력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천녀를 보여주며 천녀와 부인 중에 누가 더 이쁘냐고 물어보니 자신의 부인이 애꾸눈 원숭이만도 못하다고 답한다. 그러자 부처님이 만약에 네가 열심히 수행하고 계를 잘 지치면 내세에 천상에 태어나면 천녀와 같은 여인들이 500명에 둘러싸여 살게 된다고 말씀하시자 난다는 부인을 잊어버리고 열심히 수행하였다. 사촌 동생 아난다가 난다의 이 모든 스토리를 알고서 게송을 써서 난다를 비판하였다. 숫양 두 마리가 앞으로 가려고 뛰어가다가 머리를 부딪히면 뒤로 물러난다. 그대가 음욕을 위해서 수행하면, 그 결과도 이와 같으리라 하고 비판한다. 언젠가 봉변당한다는 이야기다. 그래도 난다는 곧이듣지 않고 음욕을 위해 열심히 수행한다. 수행이 어느 정도 쌓인 후 부처님께서 난다를 다시 불러서 신통력으로 지옥을 보여주셨다. 지옥에 큰 가마솥이 있는데 지옥의 옥졸들이 물을 펄펄 끓이고 있었다. 그 가마솥은 텅텅 비어 있었다. 난다가 무엇을 하고 있냐고 물으니 옥졸들의 대답이 여기에 조금 있으면 누가 올 텐데 물을 끓이면서 기다리고 있다고 답하였다. 누가 오냐고 물으니 부처님의 난다라는 제자가 지금 열심히 수행해서 천상에 태어날 텐데 복락이 소진되게 되면 여기에 올 것이라 기다리고 있다고 답하였다. 그러자 난다가 마음을 바로잡고 천상에도 태어나지 않고 지옥도 가지 않는 해탈 열반을 위해서 수행했다는 이야기가 초기불전에 있다.
틀림없이 부인이 이뻤는데 천녀와 비교하니 못생겨지고, 애꾸눈 원숭이랑 비교하니 부인이 이뻐진다. 미모에 실체가 없다는 이야기다. 다 연기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문화적으로 예쁘다-잘생겼다는 현대 문명의 힘이 만든 착각이지 원래 미추의 기준은 없다. 미추는 실체가 없다. 연기한 것이기에 공 하다. 실체가 없다. 비교를 통한 연기법이다.
아름답다-추하다는 문명이 만든 것이다. 문명이 만든 것은 경험적 결론이다. 연역적으로는 더 이쁜 사람을 보면 못생겨지고, 더 못생긴 사람을 보면 이뻐지는 것이다. 이처럼 아름답다-추하다가 전혀 실체가 없다.
지금까지 미-추, 대-소, 장-단, 생-사 8개 개념은 모두 실체가 없다. 연기한 것이 공 하다는 논리에 근거해서 8가지의 개념을 논파한 것이다.
머리가 좋다- 나쁘다. 어떤 사람은 진짜로 정말 머리가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도 실체가 없는 것이다. 머리가 좋은 것도 옆에 머리가 좋지 않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전교 1등은 꼴찌가 있어야 있을 수 있다.
머리 좋다는 것도, 실체가 없다. 총명하다는 것도, 비교를 통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전교 꼴등만 한 머리 나쁜 사람이어도 집에 가면 강아지 앞에서는 강아지보다 총명하다.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나보다 더 멍청한 놈이 있고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나보다 더 잘난 놈이 있다. 총명-우둔도 실체가 없고 연기한 것이기에 공 하다고 할 수 있다.
부유함과 가난도 마찬가지다. 경주에서 내가 최고 부자이지만 서울 한남동 빌라촌에 가면 명함도 내밀 수 없다. 한남동에서 부자로 살지만, 미국의 비버리힐즈에 가면 입구에도 못 들어가고 경비에게 명함도 못 내민다. 부유함 역시 실체가 없다.
내가 하루 세끼 겨우 밥을 먹고 찢어지게 가난하다. 그런데 들짐승을 보니 이놈들은 먹을 것이 아예 없다. 나는 그나마 냉장고에 김치도 있고 라면도 있는데 짐승은 코끼리든 사자든 아침부터 저녁까지 먹을 것이 하나도 없다. 매일 주워 먹거나 잡아먹기 위해 나가야 한다. 먹을 것을 찾지 못하면, 굶어야 한다. 아무리 밀림의 왕자라 사자, 코끼리라고 해도 똑같다. 인간이 아무리 가난해도 들짐승보다 낫다. 내가 인간인 것 자체가 참 희귀한 일이고, 삶이 너무나 소중하다. 내가 혜택받았구나. 생명의 세계에서 내가 로또이다. 집에 가서 수도꼭지 틀면 물이 나온다. 세상에 그런 일이 없다. 인간 사회 속에서만 있다. 내가 아무리 가난해도 수도를 틀면 물이 나온다. 우리는 물을 풍족하게 먹는다. 물만 풍족하게 먹어도 정말 호사이다.
연기를 통해서 남보다 많다-적다는 비교를 통해서 가난이 생겼는데 이것도 실체가 없다.
삶과 죽음, 대소, 총명-우둔등 12개의 개념이 내가 실제 한다고 생각한 세계에서 모두 증발하였다. 바깥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 내 머리가 만든 것이다. 다 내 마음이 만든 것이다. 일체(一切) 이 12가지가 유심조(唯心造)이다. 오직 마음이 만들었다고 알 수 있다. 지금까지는 쉽다. 반야심경에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눈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왜 눈이 없을까? 눈도 없고 시각 대상도 없다. 이런 것은 어렵다. 왜 눈이 없는지 혼자 연구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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