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없다-연료 없는 불은 없다]
눈의 실체가 없다. 반야심경에서 이야기하는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의 가운데 ‘무안(無眼)’ 눈이 없다는 경문을 ‘눈은 자기를 볼 수 없다’는『중론』3장 관6종품(觀六精品)의 두 번째 게송을 통해서 눈이 없는 이유를 알아보고, 눈이 사라지기 때문에 시각 대상도 사라진다는 능견(能見), 소견(所見) 관계를 통해 설명하였다.
공사상에 근거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단 하나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즉 컵, 산, 나, 너 등 모두 다 머리가 만든 것이지 실제 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실제 하는 게 없다고 할 때 착각하면 안 되는 게 아무것도 안 보이고 컴컴해진다는 것이 아니다. 나타나 보이는 게 바깥에 실제 하는 게 아니고 머리가 구성한 것이다. 내 머리가 만든 것이다. 내 마음이 만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실제 하는 게 없다는 말과 모든 게 마음이 만든 것이라는 말은 같은 이야기이다.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것이 ‘내 마음이 만들었다. 내 생각이 만들어졌다. 내 뇌가 만들었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게 실제 한다고 착각한다. 지금까지 하나하나 예를 들면서 내가 생각하는 게 왜 실제 하지 않는 지를 지금 논쟁하고 있다. 큰 방-작은 방, 긴 거-짧은 거, 아름다움-추함 등을 보았다. ‘모두 다 내 마음이 만들었구나. 내가 생각 속에서 지어낸 것이구나’하고 알게 되었고 눈과 시각 대상도 생각이 만든 것이지 실제 하지 않은 것임을 알았다. 그다음 예로 [불도 없는가?]하고 문제를 내었다.
[불이 없다-연료 없는 불은 없다]
최근에 인터넷 유튜브 상생 방송에서 한 중관학 강의 10개의 강의를 원고 정리해서 책으로 만들었다. 이 내용 중에 불이 없다는 것을 논증하는 내용이 있어서 한번 읽어보면서 이해해 보도록 하겠다.
먼저 불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반야 공사상에서는 모든 것에 실체가 없다고 하고 선불교에서는 어떤 것도 실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활활 타는 ‘불’은 절대 없을 리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면 이제 ‘불의 실체성’에 대해 검토해 보겠습니다. 불이 뭘까요? 활활 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캠프파이어할 때 장작을 쌓아놓고서 불을 붙입니다. 이때 장작이 연료가 됩니다. 성냥불을 켜서 연료인 장작에 불을 붙입니다. 보통 ‘성냥불’은 불이고 ‘장작’은 연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냥불’에 불만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연료도 있습니다. 성냥불의 연료는 성냥개비입니다. 성냥개비의 나무 조각이 없으면 성냥불을 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조금만 생각하면 아는데 이런 생각을 정밀하게 하지 않는다. 장작 쌓아놓고 여기에 장작이 있으니‘불 갖고 와. 불 붙혀’라고 말한다. 불을 켜서 이것은 불이고, 이것은 장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도 불을 켜는 순간 성냥개비가 연료가 된다.
“불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불은 외따로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은 독립적으로 실제 하지 않는다. “불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불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연료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연료 없는 불은 없습니다. 연료 없는 불을 생각해 보라. 성냥개비 없는 불이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라이터 불은 불만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불 밑에는 가스가 출렁거린다. 가스가 떨어지면 라이트에 불이 안 켜진다. 액화 가스가 연료구나 하고 알 수 있다. 연료 없이 불만 따로 있는 것을 또 생각해 보라. 불이 따로 존재하는 것을 전문용어로 고기(孤記)라고 한다. 불전에 있는 이야기이다. 세상만사가 고기(孤記)-홀로 발생하는 줄 안다. 죽음이 원래 홀로 발생하고 홀로 존재하고 삶이 따로, 원래 홀로 있고, 아름다운 게 원래 따로 있고, 못생긴 게 따로 있고, 내가 따로 있고, 세상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다 엉터리다. 고기(孤記)는 다 틀린 것이다. 모든 게 다 연기한다. 진상은 다 연기이다. 모든 게 다 대립쌍과 함께 나타난다.
‘나’라고 할 때 대립쌍은 어떤 의미에서 나를 얘기하느냐에 따라 대립쌍이 달라진다.
‘내가 세상에 사는구나.’ 할 때는 이 세상의 관계 속에서의 ‘나’이다. 그리고 나를 이루고 있는 구성 요소가 있다. 몸통도 있고, 마음도 있고, 느낌도 있고, 감각도 있다. ‘이런 것들이 모여서 내가 되었구나’ 할 때는 이런 것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이런 나이다. 세상과의 관계가 아니고 오온(五蘊)과 나의 관계이다. 너와 나로 이야기할 때는 내가 아닌 다른 투사에 대한 내가 된다. 무아(無我)-자아가 없다는 걸 연구할 때 그냥 들어가면 안 되고 내가 생각하는 자아가 어떤 의미의 자아인가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단어 용어는 똑같이 ‘나’이지만 그 의미와 맥락을 먼저 찾은 다음에 논파해야 한다.
‘나’, 큰 방-작은 방, 눈-시각 대상은 다 연기이다. 최소 2개 쌍이 함께 발생한다. 세상에는 홀로 발생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홀로 발생하는 것을 고기(孤記)라고 하는데 불이 홀로 고립적으로 발생했는가를 검토해 보니 아니다.
연료 없는 불은 없습니다. 연기공식 중에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는 환멸 연기처럼 부정적으로 표현된 연기처럼 연료가 없으면 불이 없다는 것입니다. “연료가 없으면 불이 없다. 저것이 없으면 이것이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 발견하신 연기법이다. “연료가 없으면 불이 없다.”는 것입니다. 말로 “불 가져와”라고 하듯이 연료가 따로 있고 불이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가지만, 그게 세상의 진상과는 아무 상관 없는 엉터리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불이 따로 있고 불과 무관한 연료가 따로 있어서 그런 연료에 그런 불을 붙이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성냥을 긋는 순간에 벌써 연료가 개입되어서 불이 타는 것입니다. 연료가 없는 불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밤에 모닥불이 타오를 때 바람이 불면 불꽃이 허공으로 날아가다가 꺼집니다. 잠깐이지만 그때 허공에 너울거린 불꽃처럼 불만 있을까요?
따져보면 중관학은 인문학, 사회과학이 아니다. 불교 전체가 철저한 자연과학적 통찰 끝까지 가더라도 오류 하나 없다. 과학자가 되어서 따져보라는 이야기다. 밤에 모닥불을 피울 때 허공에 날아가는 그 불꽃에는 불만이 있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불꽃조차 장작에서 떨어져 나와 허공으로 날아간 미세한 탄소 알갱이들이 밝아져서 밝은 빛을 내는 것입니다.
노랗게, 빨갛게 보이는 것이 탄소 알갱이이다. 탄소 알갱이가 달궈진 것이다. 숯불 키울 때 숯이 탄소 덩어리이다. 거기에 열을 가하면 빨갛게 된다. 숯은 덩어리가 크다. 탄소 알갱이가 달궈진 것이다. 그래서 밝은 빛이 나는 것이다. 그 탄소 알갱이가 더 타면은 즉 더 산화되면 산소가 붙는다. 이산화탄소 co2가 되어서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산화탄소는 눈에 안 보인다. 탄소 알갱이는 그냥 탄소일 뿐이다. 이때는 빨갛게 달궈졌기 때문에 눈에 보인다. 여기에 산소가 더 달라붙어서 일산화탄소, 이산화탄소가 되면 눈에 안 보인다. 뜨겁기는 하지만 시야에서 사라진다. 불꽃의 윤곽을 구성하는 것이다. 아주 정밀하게 분석하면 불꽃이 탈 때 안쪽은 탄소 알갱이가 있는 것이고 바깥쪽은 co2이다. 아무리 정밀하게 분석해도 연료 없는 불은 없다. 산소 알갱이가 연료가 되어서 불이 생긴 것이다.
아무리 미세하게 분석해 보아도 연료 없는 불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불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큰 방이 실재하지 않듯이 마치 눈이 이 세상에 실재하지 않듯이 불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중론』 청목소에서는 이에 대해 “불을 떠나서 연료가 없고, 연료를 떠나서 불이 없다.(離燃無可燃 離可燃憮然) ”라고 표현합니다. 연기공식 가운데 환멸 연기입니다.. 즉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라는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불이 따로 있고 연료가 있는 줄 알았는데 불이 따로 있는 것을 아무리 정밀하게 분석해도 대상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모든 게 다 연기한다고 알 수 있다. 불은 외따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불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연료에 불이 붙었기 때문이다. 반드시 연료가 있어야지만 불이 있다. 이렇게 하나하나 큰 방도 원래 세상에, 외부 세계, 실제 세계에 큰 방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머리, 마음이, 생각이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작은 방을 염두에 두고 있다가 방문을 열면은 ‘크구나’ 하고 큰 방이 떠오른다. 이것은 큰 방이 생각 속에서 떠오르는 것이지 바깥에 있는 방이 원래 큰 방이 아니다. 그 바깥에 있는 방은 작은 방도 될 수 있다. 방에 들어갈 때 더 큰 방을 염두에 두고서 들어가면 그 방은 작은 방이 된다. 실제 바깥 세계에 큰 방, 작은 방이 없듯이 눈도 없고 시각 대상도 없다. 또한 불도 연료 없이 외따로 존재할 수 없다. 불은 외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맞는 이야기다. 무서운 논리이다. 반야의 지혜를 취모검(吹毛劍)이라고 한다. 취모검(吹毛劍)-반야의 분석력 analysis-머리카락analysis- 하나를 뽑아서 세로로 자를 수 있는 칼이다. 우리의 사유가 취모검 정도까지의 분석력이 있어야지 반야지가 열린다. 불교의 공사상 공부할 때 그냥 ‘아무것도 없다.’ 하면 큰일 난다. 그러면 바보 된다. 지독하게 논리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계속 머리 굴려서 한계까지 가서 이렇게 작동하는구나 하고서 내 손에다가 올려놔서 볼 수 있을 정도까지 가야지 공을 알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다음부터는 머리 굴려도 머리 굴리는 것이 아니다. 말을 해도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두 공 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다음부터는 장광설, 이 말도 하고 저 말도 하고 8만 4천 법문을 부처님께서 다 설하신다. 말이 말인 줄 아는 사람들은 아직 먼 사람들이다. 불교 통찰이 아직 유치원 수준이다.
유마경이 참 대단하다는 얘기 하지만 유마의 침묵보다 더 위대한 게 부처님의 8만 4천 법문이다. 왜냐하면 유마의 침묵은 말과 침묵을 분별했기 때문이다. 문수 보살께서 질문을 하니까 32분의 보살님이 그 답을 갖가지로 말하는데 유마가 침묵을 한다. 그랬더니 문수 보살께서 이게 가장 훌륭한 답이라고 칭송하였다. 그러나 유마경은 말과 침묵을 분별하기 때문에 사실은 높은 차원의 경은 아니다. 물론 말만 가지고 사는 사람들, 말에 집착하는 사람들인 경우는 유마경이 위대하다. 그러나 더 나아가면 침묵과 말의 구분이 사라진다.
불이 있다. 연료가 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단어를 쓰고 살지만, 엄밀히 살펴보면 다 무너진다. 세상 전체가 다 무너진다. 무너지고 나면 불이 불이 아니고, 눈이 눈이 아니다. 눈이라는 말을 쓰지만 없는 것이다. 눈이 없는 것을 확실히 안다. 불이 외따로 없다는 것을 안다.
큰 방에 원래 없다는 것을 안다. 잘생긴 것, 못생긴 것이 원래 없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쓰고 산다. 말과 사유를 가지고 손바닥 위에다 올려놓고서 쓰고 산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침묵보다 더 위대하다.
반야의 분석력은 반야 공은 생각을 비우고, 마음을 비우고, 생각하지 않고 체득되는 게 절대 아님을 아주 명심해야 한다. 지독하게 머리 굴려서, 머리 굴리는 끝까지 가서 그 한계를 자각하는 그것이 바로 반야 공에 대한 체득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제 불이 없는 것도 알았다. 연료가 없는 불은 절대 없다. 장작에 불이 붙든지, 성냥개비 나무토막에 불이 붙던지, 가스라이터의 출렁거리는 액화 가스에 불이 붙던지 해야 불이 붙는다. 불은 반드시 연료가 있어야 한다. 거꾸로 연료가 없는 불은 없지만 ‘불이 없는 연료는 있지 않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불이 없는 연료. 그러니까 아직 성냥개비에 불을 안 붙였을 경우는 불이 아닌 연료이다. 가스 라이트의 출렁이는 액화 가스에 아직 불을 안 켜면 이것은 연료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틀렸다. 계속해서 그다음 글을 읽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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