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관학 관련 서적 소개
1. 중론
중관학의 교과서가 『중론』이다. 원래는 경서원에서 책을 냈다가 다시 새롭게 개정해서 낸 책이다. 제일 처음 쓴 책이 중론 총목서의 주석서이다. 구마라습 스님께서 한문으로 번역하신 중론 총목서로 가장 널리 보급되었다. 동아시아에서 공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처음으로 가능하게끔 만들었던 책이 바로 중론 총목서이다. 이것을 번역한 책이다.
네모 안은 인도의 용수 스님께서 직접 쓰신 중론 게송이다. 네모 바깥의 것은 삔갈라라(한문으로 청목)는 인도 스님의 한문 해석이다. 청목 스님의 한문 해석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한문 해석문을 읽을 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어서 게송 부분만을 따로 범어 원문으로 네모 안에 별도 기재하여 대조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원문의 문법 또한 주석으로 달아 이해를 도울 수 있도록 하였다.
범어 공부하려면은 원문과 함께 문법 주석 다 해놨기 때문에 이 책을 보면 좋다. 문법을 공부한 다음에 문장 강독 독학하고 싶은 사람들은 이 책 보면서 중문도 공부하고 문법도 익히고 문장 해석하는 능력 훈련할 수 있다.
불교 공부는 판사, 검사, 변호사 되는 시험공부 그 이상으로 해야 한다. 그 이상으로 하더라도 불교에 발도 못 내민다. 명함도 못 내민다. 또 다른 어떤 의지가 있어야 한다. 항상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 나의 의문에 대해서, 내가 풀지 못한 것에 대해서 하루 종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 삶이 무엇일까? 내가 왜 살아 있는가? 등이 화두이다. 나는 화두를 특별히 받지 않는다. ‘이 뭣고?’가 제일 좋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인가? 도대체 내가 무엇인가? 도대체 지금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제일 좋다. 도대체 왜 이렇게 살아 있느냐? 이것이 살아 있는 건가? 삶과 죽음도 없다는 것을 이야기했지만 이 뭣꼬? 가 제일 좋다. 경에 보면 답이 나오지만 이렇게 풀지 못한 것들을 하나하나 풀면서 생각의 지평이 넓어진다. 부처님 삶의 방식이 똑같다. 우리가 불자인 이유는 부처님 삶의 방식을 흉내 내는 것이다. 부처님은 어릴 때부터 항상 생각하면서 사신 분이다. 종교적 철학적 문제를 가지고 의문을 품고서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 사신 분이다. 이것이 부처님을 닮는 것이다. 자비심도 있지만 그것은 2차적인 것이다. 일단 불자들은 그것이 투철해야 한다. 불자들은 종교적 문제가 아니더라도 나에게 어떤 문제가 닥쳤을 때 항상 곰곰이 생각해서 최고의 분별을 하고, 그 해결 방안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을 닮은 삶이다. 이것이 바로 선이다.
선이 다리 꼬고 하는 것만이 아니다.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 선이다. 항상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하고, 그것이 꼭 학문만이 아니라 나의 가정이든지 내가 있는 직장이든지 삶이든지 내 친구 관계든지 여기에서 있는 그대로 관찰할 때 항상 좋게 끌고 나갈 수 있다.
그리고 공부 시간도 처음부터 6시간, 7시간 할 수 없다. 1시간도 못 앉아 있는다. 오래 하려면 중요한 것은 동기다.
자기 마음속에서 진짜 그 삶과 죽음에 대한 의문이 투철해야 한다. 그래야 여러 가지 소득이 있고 내 삶이 변할 수 있다.
2. 회쟁론
「회쟁론」은 문법 해설 책이다. 회쟁론은 범어, 티베트어 문법 해석이다. 그 당시에 우리나라에서 범어, 티베트어로 불교를 공부를 해야 했는데 학자들 중에 하는 사람 별로 없었다. 그래서 중론책을 내면서 주석을 달았지만 범어를 잘 몰랐기 때문에 거기에 실수가 많았다. 그래서 전혀 범어 문법에 오류가 없는 책을 내고자 해서 회쟁론은 용수 스님이 쓰신 범어 원문, 그다음 우리 말 번역문, 그 다음 티베어 번역문, 티베트어에 대한 우리말 번역문, 그다음 한역문 원문이 또 있어서 그 한역문 원문 다음에 또 우리말로 번역해서 세 개의 언어를 대조한 것이다. 이 책에서 티베트어, 범어를 단어 하나하나 전체를 문법 해설하여 다 합쳐 놓았다.
회쟁론이 중요한데 중문학 공부할 때 두 가지 책을 보아야 하는데 하나가 중론 그리고 회쟁론이다. 중론은 공에 대한 설명으로 공이 무언지 알려준다. 회쟁론은 중론이 널리 퍼진 다음에 공에 대해서 자가당착에 빠지지 않았느냐 하며 공에 대해서 오해를 한다. 왜냐하면 모든 게 공하다면 ‘모든 게 공하다’는 그 말도 공해야 된다고 공격한다. 패러독스. 여기에 대한 반박이다. 공에 대한 오해를 하나하나 반박하는 책이다. 위대한 책이다.
20개의 공격 20수에 걸친 용수스님의 공에 대한 외도의 공격이 나온다. 외도의 20수를 보면 의도가 보통 천재가 아니다. 공 사상이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공한 것도 공해야 되기 때문에 그 말 무의미하다 이렇게 시작한다. 논박을 못하겠구나 했는데 용수 스님이 21번째 게송부터 총 70개의 노래인데 50수의 게송에 걸쳐서 낱낱이 논박한다. 외도에서 진짜 용수 스님은 위대한 분이라고 더 놀란다. 공에 대한 오해를 시정하는 내용이다.
3. 백론 십이문론
『백론 십이문론』 보통 동아시아의 중관학을 삼론학이라 부른다. 중론, 백론, 십이문론 이 세 개의 논서를 합해서 삼론학이라 한다. 동아시아에서 중국하고 일본서 중관학을 공부하려면 이 세 가지를 다 해야 했다. 그래서 번역한 것이다.
4. 불교 중심 철학
『불교의 중심 철학』은 중관학 개론서 중에서 가장 정평 있는 인도 학자가 쓴 책을 번역한 것이다. 므리띠라는 사람의 영어로 된 박사학위 논문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5. 용수의 중관논리의 기원
『용수의 중관논리의 기원』은 박사학위 논문이다. 이것을 쓰면서 중관학에 대한 조망이 생겼다. 항상 중관학 얘기할 때 사고 비판으로 얘기하는데 전 세계 어떤 중관 학자도 사고 비판을 가지고 중관학을 말하는 사람은 없다. 중관 논리는 사고 비판 논리이고 중관학은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논법이다.
6. 역설과 중관 논리
『역설과 중관논리』는 논문 모집이다. 80가지가 넘도록 쓴 논문들 가운데 대표 논문라고 할 수 있다. 패러독스, 수학의 집합론의 오류가 있다. 버틀란트 러셀의 수학이론과 중관논리를 비교하면서 러셀의 사상을 비판한 것이다. 만용 부린 게 아니고 읽어보면 러셀보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중관학에 대해 썼던 논문들을 모은 책이다.
7.공과 윤리
『공과 윤리』는 불교 윤리 관련 논문 모음집이다.
8.선불교의 뿌리
『선불교의 뿌리』가 가장 최근에 낸 것으로 논문 모음집이다. 선불교의 선문답은 모두 다 철저하게 중관 사상의 실천적 균형임을 밝혔다.
9. 중론, 논리로부터의 해날 논리에 의한 해탈
『중론, 논리로부터의 해탈 논리에 의한 해탈』 원래 제목은 ‘중학생을 위한 중론’이었는데 출판사 편집자와 협의해서 정한 것이다. 필자 서문에 중관학은 논리로부터의 해탈, 논리적 사유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중관학의 목적인데 그 방법이 바로 논리이다. 논리에서 벗어나는 논리를 통해 벗어난다. 자가당착이다. 중관학에서는 언어와 분별을 타파한다고 말했는데 한 학기 내내 언어와 분별로 강의한다.
자가당착적인 학문이 중관학이다. 중관학만이 아니라 불교 전체가 자가당착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할 수도 있는 이유는 언어에서 벗어나는데 언어를 이용하는 게 정당하다. 그 이유를 『회쟁론』에서 알 수 있다.
불교 전체가 말을 이용해서 말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자가 장착이지만 말을 자꾸 하면서 말에서 벗어난다. 말의 세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공능, 작용, 효능이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응병여약(應病與藥)이다. 불교도 같다. ‘공하다. 공화다’하고 배우니까 ‘공하구나.’하고 살면 허무주의에 빠진다. ‘공 하다’는 것은 세상에 실체가 있는 것들이 있구나. 삶도 진짜 있고, 죽음도 진짜 있고, 세상도 실재가 있고, 나도 실재가 있고 이렇게 착각이 심할 때 ‘공 하다’하고 씻어주는 것이다. 이것이 응병여약(應病與藥)이다. 그런데 아무 생각도 없고, 세상에 대해서 별로 의식이 없이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에게 ‘공 하다.’고 가르치면 공이 도그마가 되기 때문에 허무주의에 빠진다. 한 학기 동안 중관학의 공 사상을 공부할 텐데 조심해야 한다. 나에게 아무 문제도 없는데 공에 도그마를 적용해서 허무주의자가 될 수 있다.
책 제목이 ‘논리부터의 해탈’이지만 이 방법 또한 논리에 의해서 해결하는 것이다. 얼핏 자가당착 속에 빠진 학문 같지만, 이것이 논리의 ‘공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 말하는 것은 용수 스님의 『회쟁론』의 이야기이다. 역설을 소재로 엄청난 수학 이론을 만든 서양 영국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버틀란트 러셀이 수학이 집합론을 연구하다가 역설을 발견하고 수학 이론을 정립할 수 없어서 당황한다. 전문적으로 얘기하면 버틀란트 러셀이 화이트 헤드라는 철학자와 함께 모든 수학 공식을 논리학 기호로 대체하는 작업을 한다. 책 이름이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이다. 책 제목 중에 『역설과 중간 논리』가 이 책의 큰 전제를 비판한 논문이다. 용수 스님의 역설을 해결하는 내용을 ‘회생론’에서 찾아서 그것을 소개한 것이다.
용수 스님, 나가르주나, 중관학의 창시자는 정말 어마어마하다. 서양 철학자 야스퍼스는 자신의 책 『붓따와 용수』에서 용수, 나가르주나에 대해서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철학자라고 말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금 한 학기 동안 배우는 게 인간이 사유를 통해서 만든 최고의 학문을 배우는 것이다. 사유, 머리 굴려서 만든 학문 중에서 제일 꼭대기이다. 머리 굴린 학문 전체를 사유를 통해서 비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을 『중론, 논리로부터의 해탈 논리에 의한 해탈』이라고 하였다. 논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목적인데 그 방법은 논리다. 그래서 중관학의 논리를 다른 말로 ‘반논리’라고 한다. 논리는 영어로 ‘Logic’이고 반논리는 counter-logic 이다. clock wise는 시계 방향이고 counterclock wise는 반시계 방향이다. logic는 논리이고 counterlogic은 논리를 부수는 것이다. 반논리, 거꾸로 된 논리이다.
우리가 정밀하게 살려고 하고 내가 있고, 세상이 있고, 죽음이 있고, 삶이 있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이렇게 살았는데 논리적 사유로 다 가짜라고 이야기한다. 세상과 무관하다 하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논증한다. 그전까지는 확고부동한 것처럼 보였던 세상 전체가 와르르 다 무너진다. 이것이 십이연기의 환멸문이다.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하면서 십이연기 열두 가지 문이 세상만사인데 이것이 모두 다 우르르 무너진다.
고집멸도 사성제의 멸성제, 그전까지 확고부동하게, 있는 줄 알았는데 세상이 다 무너진다. 반야경의 공사상, ‘공 하구나’하고 안다. 선에서 말하는 본래무일물, 무너진 것이 아니고 ‘원래 없었구나’라고 아는 것이다. 반야경처럼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하면서 그냥 없다고 주장만 한다. 그래서 반야심경은 말은 좋은데 왜 그런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중관학은 그것이 왜 무너지는지, 왜 눈이 없고 코가 없는지 따따부따 다 설득한다. 중관학은 말만 할 줄 알고 남의 말만 이해할 수 있으면 다 체득할 수 있다. 어렵지 않다. 중관학은 논리적으로 말하지만, 그 목적은 논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선에서 이언견언(以言遣言), 말로써 말을 버린다는 말이 있다. 이것이 불교이다. 더 나가면은 우리는 고기 몸뚱이를 가지고 태어났다. 몸뚱이, 뇌, 눈, 귀 목적은 먹이, 섹스 딱 두 가지이다. 몸은 먹고, 섹스하려고 사는 것이다. 이 두 가지만 하면 계속 풍성하게 번식한다. 그런데 이것이 고통의 세계이다. 부처님이 이 고기 몸의 세계, 입과 섹스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길을 드디어 발견하셨는데 먹이와 섹스의 몸을 통해 발견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몸뚱이 가지고서 몸뚱이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길을 발견하셨다. 몸뚱이 통해서 그 길을 발견하신 것이다.
몸뚱이의 세계에 대해서 가장 정확하게 이해한 생물학자가 찰스 다윈이다. 먹이와 섹스의 세계는 종족 간에는 먹이 싸움, 섹스 싸움이다. 이 두 가지가 생명체의 자기 보존의 원동력이다. 그래서 약육강식에 죽고 죽이고, 잡아먹고 잡아 먹히고 찰스 다윈이 이것을 보았다. 불교 공부하려면 다윈의 진화 생물학이 굉장히 도움 된다. 진화해서 변화한다는 것이 아니다. 연기법, 조건에 의해서 생명체의 형태가 형성된다는 것이 연기이다. 연기법의 실천적 훈련이 찰스 다윈의 진화 생물학이다.
진화 생물학은 불교의 사성제 중 고성제 ,집성제만 말한다. 약육강식의 고통의 세계와 집성제, 번뇌, 성욕과 식욕 때문에 싸우고, 죽이면서 산다는 것이다. 이것만 아는 게 찰스 다윈이다. 여기에서 탈출하는 일은 몰랐다. 찰스 다윈은 우울증 환자였다. 고성제, 집성제만 알기 때문이다. 부처님도 출가하시기 전까지 항상 우울하신다. 동체자비(同體慈悲)하신 분인데 잡아먹히고 잡아먹고 하는 이 장면을 보시니까 도저히 가슴 떨려서 그것을 못 보신다. 왜 생명체로 태어나는지 우울증에 안 빠질 수 없었다. 자비심이 있고 감수성 예민한 사람들은 가슴을 많이 다치고 종교적 천재들이다. 남의 어떤 감정을 공감하는 것이 대비심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종교적 천재가 아니고 종교적 박약자들일 경우 그런 것이 없다. 후안무치하고 얼굴 두껍고 남의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이런 인간들이 비종교적인 인간들이고, 반사회적 인격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감수성이 어마어마하게 예민한 분이시다. 불교학을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은 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릴 때, 젊을 때 험한 것을 보면 자꾸 가슴을 다친다.
찰스 다윈은 고성제, 집성제만 추구하고 알았기 때문에 가슴을 다쳤다. 그래서 그의 전기에 보면 죽을 때까지 평생 우울하게 산다. 하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은 똑같이 고성제, 집성제를 목격하시고 출가하신 후 드디어 탈출의 길을 발견한다. 이것이 멸성제, 도성제이다. 멸성제가 열반이고 도성제가 수행하는 것, 팔정도 혹은 계정의 삼학, 도 닦는 것, 번뇌 제거하는 것이다. 보니까 편안한 게 있구나. 편안한 것-멸, 고통의 소멸, 열반이다. 고성제, 집성제 대로 살 게 아니고 집을 제거하면 멸도, 식욕과 성욕을 다 제거하면 편안해지는구나 하는 것이 요점이다. 이것이 팔정도 닦아서, 수행해서 섹스와 식욕에 대한 욕망, 욕심을 다 제거해 버리면 남과 싸울 일, 분노도 사라지고 편안해진다.
불교의 열반은 깨달서 짜릿해지는 행복이 아니다. 불교의 최종 목표는 편안한 것이다. 우리 몸에서 벗어나는 것, 고기 몸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교의 수행인데 그 방법, 그 도구는 고기 몸이다. 고집멸도의 발견자는 인류 역사에서 오직 부처님뿐이다.
찰스 다윈의 진화생물학으로 연기를 설명한 책이 『붓다의 과학 이야기』이다. 독은 쓰다. 독이 들어오면 빨리 뱉어야 한다. 침이 없으면 빨리 뱉을 수 없다. 빨리 뱉지 못하면 체내 세포에 흡수되어서 죽게 된다. 침이 나와서 깔끔하게 다 뱉을 수 있어야지 한다. 이런 DNA가 있는 사람이 생존했다는 것이 진화생물학이다. 쓴 것과 신 것을 먹을 때 침이 많이 나오는 것이 연기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두 연기법이다. 그리고 불교 수행하려면 그런 것 하나하나 의심 품어야 한다. 신 것을 먹으면 침 나오는 것이 당연하지 하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실체론적 사고방식이다.
왜 우리가 좌우가 대칭인지. 그것은 다 연기한 것이다. 왼쪽, 오른쪽에 이렇게 양쪽으로 한 개씩 두 개가 있다. 이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신의 모상대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왜 양쪽으로 나누어져 있는가? 먹이를 찾기 위해 앞으로 직립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가면서 풍경이 둘로 갈라지는 것은 그래서이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겠다. 모든 것에 대해서 전부 다 의문을 품고서 연기적으로 볼 수 있는 훈련을 해야 한다. 단어 논리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논리이다. 그 논리를 쉽게 쓴 책이 바로 이 책이다.
10. 중관사상
『중관 사상』은 조계종 교육원 이러닝 사이트의 중관학 강의 교재이다. 내용은 여기저기 강의할 때 강의록처럼 책을 썼다.
11.승랑, 그 생애와 사상의 분석적 탐구
『승랑, 그 생애와 사상의 분석적 탐구』 중관학이 동아시아에 들어와서 중론, 백론, 십이문록 삼문학이 되었다. 삼론학, 세 가지 논에 의거해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삼론학의 부흥조가 고구려의 승랑 스님이다. 고구려의 승랑 스님이 삼론학을 재부흥시켰다. 양나라의 양무제가 죽은 후 양나라가 망한다. 양무제가 원래 소승 불교도이다..
양무제 통치 당시 그 근처에 승랑 스님이 있었다. 승랑 스님은 은둔자라서 양무제가 모시려고 해도 가지 않았다. 양무제가 불심이 돈독해서 야단치지 않고 10명의 젊은 스님을 양나라의 수도인 남경의 섭산의 지관사라는 절에 있는 승랑 스님에게 보내서 배우게 한다. 그때 그 젊은 스님들을 통해서 양무제에게 간접적으로 가르침을 준다. 이때부터 양무제의 불교관이 대승으로 바뀐다. 양무제를 대승으로 전향시킨 분이 바로 승랑 스님이다. 이후 워낙 뛰어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양무제 본인이 스님보다 더 법을 설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반야경 계품 반야경, 마하반야바라밀경에 대한 주석서를 양무제가 쓰고 강의도 한다. 주석서는 다 없어지고 서문만 남아 있다. 그러면서 동아시아 전체가 대승으로 바뀌었다. 양무제 전까지는 아비달마(소승)이었고, 양무제 이후부터 퍼지면서 대승으로 바뀐다. 기록이 다 있다. 승랑 스님이 아니었으면 동아시아는 아직까지 소승불교이다. 원효 스님보다 150년 전에 활동했는데 영향력은 동아시아 불교에서 몇십 배다. 은둔 수행자였기 때문에 전기도 없고, 남겨진 책도 없어서 후대가 알 수 없었다. 이분의 증손 제자인 길장 스님이(승랑→ 승전→법랑→길장) 스승에게 배운 강의를 책으로 전해져서 알려지게 되었다. 길장 스님이 중국 불교사 역사상 저술량이 제일 많은 최대의 저술가이다. 그 저술이 전부 본인 서술이 아니라 강의록이다. 길장 스님을 책을 보면 승랑 스님을 용수 스님에 버금가는 성자처럼 추앙한다. 일제 강점기 때 승랑 스님의 논문이 있었지만 내용을 많이 쓰거나 정확하게 분석해서 쓰지는 못했다. 전공이 같은 분야여서 이 책을 쓰기 시작했는데 만 7년 이상을 두문 분출하며 오직 이 책만 썼다. 데이터베이스 검색을 통해서 자료 수입을 먼저 하고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의 『사고전서』를 데이터베이스화 한 CD를 구매해서 승랑 관계된 데이터를 모두 검색하고 대장경 문서도 찾아보고 승랑에 대한 자료를 분류하여 그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분석적 탐구, 분석해서 탐구한 것이다. 평생 한 작업 중에 제일 큰 작업이었다. 판비량론은 2년 걸렸고 이 책은 한 7년 걸렸다. 이 책은 제일 힘들게 쓴 것이고 우리나라 고대 사상사, 한국 사상사라는 책이 만약 서술된다면 원효, 율곡, 퇴계 이황 등 가장 이른 시기의 인물이 바로 승랑이다.
한국 사상에서 승랑이 제일 첫 번째이다. 승랑 사상도 원효와 같다. 승랑 스님의 별명이 ‘무쟁자’(싸우지 않는자)였다. 회통사상이었다. 원효도 승랑처럼 모든 사상을 다 회통한다. 한국 사상의 특징이다. 어떤 특정 사상을 배격하든지, 특정 사상 하나만 취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걸 다 흡수한다. 그래서 별명이 ‘무쟁자’이다. 이것도 『진서』(진나라 역사책)에서 찾아낸 것이다.
‘섭산 대사께서는 무쟁자다’라는 말이 있다. 동아시아 삼론학, 인도, 티벳, 중관학도 정리해서 썼고 고구려 승랑 스님 그리고 승랑 스님의 『불성론』, 불성이 무엇이냐 할 때 중도 불성론이다. 중도 불성론은 승랑 스님이 처음 퍼뜨린 것이다. 우리나라 선방에서 때 간화선 할 때 ‘간화선’, 화두를 들고 올 때 그 목적은 견성(불성을 보는 것)하는 것이다. 누구나 불성이 있기 때문이다. 불성에 대한 이론은 옛날부터 많았다. 승랑 스님 당시에 12가지가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다 쓸어버리고 ‘불성은 중도다. 중도 불성론을 퍼뜨린 분이 승랑 스님이었다. 승랑 이후 천태도 중도 불성론이다. 같이 계승한다.
화두, 조조 문자 화두 들을 때 이 문자는 없을 無도 아니고 있을 有도 아니다. 유무도 아니고 비유비무(非有非無)이 아니다는 해설이 있다. 오조법연(五祖法演)오 조법 연(五祖法演) 스님 해설서에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는 것은 흑백 논리를 지양하고 배격하라는 것이다. 흑백 논리 배격이 중도이다. 마음을 중도의 궁지로 몰고 들어가는 것이 간화선의 목적이다. 중도의 궁지는 생각이 끊어진 자리이다. 이것을 처음 제창한 분이 승랑 스님이다.
간화선이 중국의 임재종 계통의 선, 임재 이전에 육조 혜능 스님이 있었다. 혜능 스님이 삼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삼론학의 교학의 계승자가 육조 혜능 스님이다. 삼론학이 선으로 변한 것이 육조 혜능 스님이다. 혜능 스님이 인용하는 경전 문구가 열반경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는데 열반경 찾아봐도 문구가 좀 다르다. 길장이 인용한 문구를 재인용한 것이다. 길장의 열반경을 인용 하고,, 길장의 삼론학을 통독, 정독한 분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래서 선불교의 사상적 토대가 중관학이 된 것이다. 중도의 궁지로 마음을 몰고 가는 것. 이번 한 학기 동안 중도가 무엇인지를 수행을 통해서가 아니고 따따부타 말을 통해서 왜 흑이 틀리고, 왜 백이 틀렸는지 계속 몰고 가면서 한 학기 동안 강의하겠다. 간화선 수행도 거슬러 올라가 보니 그 시조가 승랑 스님이다.
12. 중관학 특강-색즉시공의 논리
『중관학 특강-색즉시공의 논리』는 방학 동안에 계속 쓰고 있는 책인데 중관학 특강에서 좀 쉽게 풀어서 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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