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남을 위해서 봉사할 때 어떤 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보다 공적인 일을 할 때 공덕이 더 크다. 예를 들면 마을에 개천이 있는데 비만 오면 건널 수 없어서 불편하다. 이때 다리를 놔주면 그 공덕이 크다. 왜냐하면 그 다리로 수천수만 명이 몇십 년 동안 혜택 받기 때문이다. 대지도론 (大智度論)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대면 수업할 때 칠판에 잔뜩 판서하고 강의 끝나고 교수님이 혹시 못 지우고 나갔을 때 누군가 지워 주면 공덕이 크다. 이 또한 다음 수업을 듣는 학생들과 그 교수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덕을 짓더라도 개인적인 공덕보다 집단적인 혜택을 주는 공덕을 짓는 것이 과보가 크다.
인과응보(因果應報)는 정연(整然)하다. 이것을 어떻게 믿을까? 악한 데도 잘 사는 것 같은데 인과응보를 믿을 수 있는가? 합리적으로 과학적으로 말하면 인과응보는 불교에서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 말한다. 절대자가 있어서 벌을 주고, 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업자득, 내가 업을 짓고 내가 받는다. 심리학의 용어로는 초자아의, 양심의 자기 처벌, 양심의 자기 보상이라고 한다. 아무도 모르게 내가 착한 일을 하면 나의 무의식이 나를 행복으로 데리고 간다. 모든 것을 판단할 때마다 나를 행복으로 데리고 간다. 또한 아무도 안 볼 때, 정말 아무런 목격자도 없을 때 내가 악행을 했을 때라도 목격자가 딱 한 명 있다. 나 자신, 내가 항상 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양심에는 죄책감이 있다. 결국 나에게 양심이 있기 때문에, 내가 불행을 당하고 내가 불행으로 자꾸 몰고 간다. 이것은 인간에게만 있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선과 악은 사회적 동물에게만 있다. 축생에게는 선과 악이 없다. 축생과 천상은 과보를 받는 곳이지 새롭게 과보를 짓는 곳이 아니다. 육도 윤회의 세계에서 인간계 이외의 곳은 과보를 받는 곳이다. 업을 짓는 것은 인간계에서 가장 강력하다. 업의 의미에서 선악이 있는 곳은 사회적 동물이 사는 인간계이다.
남에게 잘하면 선이고, 남에게 함부로 하고 못되게 하면서 나만 위하는 것은 악이다. 악행을 저지르고 아무런 목격자가 없더라도 인간은 날 때부터 DNA 유전자 속에 양심이 각인 되어 있어서 무의식에서부터 내가 나를 처벌하게 된다는 설이 있다. 그래서 악행을 많이 할 경우, 모든 일에서 판단할 때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불행으로 몰고 간다고 한다.
많은 사람을 위해서 큰 공덕을 지으면 과보가 크다. 이것은 종교적으로 믿으라는 것은 아니고 불교의 인과응보에 대해서 합리적으로 설명은 한 것이다.
양심의 자기 처벌은 프로이드의 심리학에 보면 아주 유명한 테마이다. ‘self-punishment’ 자기 처벌, self-reward 자기 보상이라 해도 된다. 착한 일을 하면 괜히 뿌듯하다. 그러면 무의식에서 어떤 게 좋은 길인지 판단하고, 그 길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판단을 하게 된다. 그러면 나의 인생이 밝아진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나쁜 짓 많이 한 사람은 처벌을 받게 될 텐데 어떻게 하면 될까? 악업을 소멸시키는 방법은 참회 기도이다. 절의 법당에 가서 자신의 악행을 떠올리면서 참회하면 된다. 이렇게 사소한 행동들이 쌓여서 세속에서의 나의 미래가 결정된다.
중도인과론(中道因果論)이 연기(緣起)이다. 불교의 핵심은 연기론(緣起論)이다. 부처님의 대발견이 연기법의 발견이다. 연기론은 모든 것이 다른 것에 의존해서 발생한다는 ‘의존적 발생’이라 해도 된다. 선과 악, 행복과 불행도 그냥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연기(緣起)한다. 연기는 내가 지은 악업과 선업에 의존해서 미래의 행복과 불행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생각도 연기한다. ‘크다’, ‘작다’는 것도 원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방에 들어갔을 때 이 방이 ‘크구나’ 하는 것은 머릿속에 연기해 두었던 작은 방과 비교해서 큰 방을 보았기 때문이다. 연기에 의해서 방의 크기가 결정된다. 이것이 생각의 연기이다.
인식의 세계에서도 연기법이 있고 가치의 세계, 선과 도덕의 세계, 삶과 죽음의 문제와 종교적 세계에서도 연기법이 작용한다. 내가 지금 살아 있는데 죽음은 무섭고 공포스럽다.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부처님은 출가해서 구도자가 되어 수행하였다. 이 삶과 죽음의 문제도 연기법으로 풀린다. 삶의 죽음은 없고, 연기한 것이라는 것, 그것은 생각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죽음은 한 번도 내가 만난 적이 없다. 또한 나는 죽음을 만날 수 없다. 논리적으로 내가 죽은 다음에 ‘나 죽었구나’ 하면 그것은 죽은 사람 아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다. 이렇게 논리적으로 보면 우리는 죽음을 단 한 번이라도 만날 수 없다. 그런데 마치 죽음을 만날 수 있는 것처럼 설정해 두고 ‘나는 살아있구나’라고 착각한다.
죽음은 만날 수 없고, 죽음은 없기 때문에 지금 이 삶의 체험이 현장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지금 모두 하나도 살아있지 않다. 또 그렇다고 죽었다는 말도 아니다. 삶과 죽음은 모두 비교를 통해서 나의 생각이 만든 것이다. 한 번도 체험한 적도 없고, 체험 할 수도 없는 무(無)의 경지를 하나 만든 후, 마치 대면할 수 있는 것처럼 실정 한 다음, 지금 내가 존재하는구나(有), 살아 있구나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종교적 문제도 그것이 가짜구나,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구나 하고 연기법으로 해결된다. 도덕. 윤리와 인과응보도 연기법이다. 선악에 근거해서 고락(苦樂)이 생긴다. 행복과 불행이 그렇다.
생각의 세계에서 무엇이 어떠하다고 판단하는 것도 연기법이다. 큰방과 작은방이 그렇다. 연기법이 생명의 세계에 인식과 존재 가치를 모두 지배하는 법칙이다. 이 법칙 발견자는 유일무이(唯一無二) 석가모니 부처님 오직 한 분뿐이다. 서양 철학자, 종교인이 진리 알기 위해서 평생 목숨 바쳐 연구했는데 한 명도 연기법을 발견하지 못했다. 불교 불자는 경전과 논서를 바탕으로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연기법에 대해서 소상하게 알 수 있다. 그 지도가 있다는 말이다. 불교는 부처님이 남기신 연기에 대한 지도, 연기를 깨닫게 되는, 알게 되는 지도에 근거해서 세상의 법칙인 연기법을 자각하게 되고 이로써 세상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불교를 수행할 때 반드시 경전에 근거해야지만 정법으로 갈 수 있다. 혼자서 다 읽고, 아무리 생각해 봤자 죽음이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 답을 낼 수 없다. 서양 철학자 그 위대한 사람들도 발견 못하고, 해결 못했듯이 그렇게 힘든 것이 삶의 본질의 문제이다.
그래서 반드시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해서 한 2~3년, 4~5년 열심히 공부하면 누구든지 부처님 아신 내용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연기법이 세상을 지배하는 유일무이의 법칙이다.
만유인력의 법칙도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이다. 그러나 물질세계만 지배한다. 인과응보, 삶과 죽음은 지배하지 못한다. 상대성 원리도 마찬가지다. 물리의 세계만 지배한다. 그런데 물질, 마음, 삶, 죽음, 우주, 세계, 인식, 존재와 같이 모두를 지배하는 유일한 법칙을 발견하신 분이 바로 부처님이시고 그것이 바로 연기법이다. ‘
중관이 바로 연기관이다. 연기는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고 체득하는 것이다. 연기를 우리의 생각으로 잡을 수 없다. 우리 생각으로 잡을 수 없는 것이 진짜 연기이다. 생각으로 잡으면 전부 다 틀린다. 가짜이다. 생각으로 잡은 연기는 다 가짜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중론 제1장 관인연품(觀因緣品)이다. 중론이 총 27장으로 돼 있는데 여기에 제일 첫 번째 챕터, 1장이 관인연품이다. 언어와 분별로 이해된 연기를 비판하는 것이다. 즉, 중론 제1장은 연기 비판이다. 연기를 가르치는데 연기를 비판한다. 머리로 이해한 연기는 연기가 아니라고 계속 부정한다. 부정하면서 연기가 체득된다.
중론(中論)은 아주 신기한 책이다. 연기의 의미가 그 의미를 재생산할 수 있게 테크닉적으로 조작해놓은 책이다. 신기한 책이고, 살아있는 책이다. 앞으로 천년 만 년 지나도 중론은 연기의 진짜 의미를 체득할 수 있다. 연기의 지식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고 누구든지 읽다 보면 이것이 연기구나 하고 자각한다. 그래서 용수 스님은 보통 천재가 아니다. 자비심에서 후대가 지식이 아닌 진짜 연기를 체득할 수 있도록 절묘하게 고안하였다. 연기에 대한 자각을 객관화시킨 책이 바로 중론이다.
그렇다면 연기론이란 무엇이고 왜 연기론이 불교의 특징인가? 연기론은 인과론, 즉 원인 때문에 결과가 생기고, 선을 행하면은 복이 오고, 악을 행하면 불행이 온다는 것이다. 인과에서 선과 악이 원인이고 불행과 행복이 결과이다. 앞과 뒤의 관계 해석이 여러 가지 있지만 연기론은 중도 관계라고 말한다. 중도에서 중은 가운데 中(중)이다. 이분법 비판이 중도이다.
수행론에서는 어떤 비판이 있는가? 고행과 삼매를 비판하는 것이다. 고행과 삼매락의 비판이 실천적 중도이다. 지적인 중도는 흑백 논리 비판이다. 흑백 논리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이다. ‘살았다 & 죽었다’, ‘큰 방 & 작은 방’이 실제로 있는 줄 아는 것이 흑백 논리이다. 그런데 이것은 실제 있는 것이 아니다.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 큰 방도 원래 없고, 작은 방도 원래 없다. 모두 다 공(空)하다는 것이 중도에 대한 통찰이다.
원래 없다는 둘 다 배격하는 것이다. 둘 다 틀렸다. 흑도 틀렸고, 백도 틀렸다. 작은 방도 틀렸고 큰 방도 틀렸다. 원래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죽음은 한 번도 내가 체험한 적이 없고 지금 이 삶도 ‘삶’이 아니다. ‘삶’이라 할 것도 없다. 그래서 중도 인과론이다. 중도란 이분법의 비판 혹은 흑백 논리의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연기론이 등장하기 전까지 인도 내에서는 두 가지 인과론이 있었다.
인중유과적(因中有果的) 인과론과 인중무과적(因中無果的) 인과론이다.
인중유과(因中有果)는 원인 속에 결과가 있다. 내재하는 것이다. 즉 원인 속에 원래 결과가 다 들어 있다는 인과론이다. 인중무과(因中無果)는 원인 속에 결과가 없다. 결과는 새롭게 나타난다는 인과론이다.
인중유과를 상견(常見)이라고 한다. 상(常)은 이어졌다는 것으로 원인과 결과가 이어졌다는 견해이다. 인중무과론은 단견(斷見)이라고 한다. 원인과 결과가 끊어져 있다는 견해로 결과는 새로 발생하는 것이다. 상견, 단견은 모두 흑백 논리이다. 원인 결과의 관계에 대한 흑백 논리적 이해가 상견 또는 단견이다.
상견, 단견이 모두 틀렸다고 하면서 연기는 상견-불상부단(不常不斷)의 연기, 단견-불일불이(不一不異)의 연기라고 한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불래불거(不來不去)는 ‘삶&죽음’, ‘깨끗하다&더럽다’, ‘온다&간다’ 등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틀렸다고 말한다. 아니 不(불)자는 ‘틀렸다’는 뜻이다. 이것이 중도이다. 이런 식의 인과론이 바로 연기론이다.
상견도 틀렸고, 단견도 틀렸다는 것이 불상부단(不常不斷)이다. 이것이 연기론, 중도인과론이다. 인도에서 인중유가를 범어로 sat kārya vāda(유과론), 인중무과는 범어로 asat kārya vāda(무과론) 이다. 여기에 들어가는 사상은 상캬(Sāṃkhya, 數論), 베난따(우파니샤드 사상)이다. 이것은 니야야(正理)-와이셰시까(勝論)(정리-승론 사상)이다.
우리는 지금 모두 현대 과학의 최면에 빠져 있다. 지금 이 시대의 신정치는 현대 과학이다.. 현대 과학의 큰 문제점은 철저한 분견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시대 정신’이 정법이 아니다. 모두 유물론 혹은 물리주의다. 전부 단견((斷見)에 빠져 있다.
요즘 나오는 여러 가지 이론들은 모두 단견이다. 마음에 대한 것도 단견이다.
창발설(Emergent Theory). 세계적인 뇌과학자들이 말할 때 우리 마음은 창발 했다는 것이다. 진화 과정에서 고등 생명체가 되고, 뇌가 생기면서 뇌에서 신경세포가 새롭게 나온 것이라고 한다. 인중무과론이다. 원인, 뇌세포 속에 신경세포가 원래 없었는데 진화과정에서 신경세포가 뇌가 되면서 마음이 새롭게 나타났다고 말한다. 철저한 단견이고 엉터리다. 앞으로 불교의 역할은 정견(연기론)이 세계에 퍼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고대는 거꾸로 상견으로 세상을 봤다. 우빠니샤드의 범아일여(梵我一如)는 세상 전체가 넓은 것 같은데 전부 다 아트만(ātman)의 변형이다. 참된 내가 세상이 되었다. 아트만(ātma), 참된 자아가 세상과 같다는 말이다. 범아일여는 불교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패턴이 같다. 똑같다는 것은 아니고 일체유심조는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간다. '일체 유심'의 심(心)은 영원한 심이 아니고 무상한 ‘심’이다. 무상하고, 무아의 심이 불교이다. 그런데 범아일여는 무상, 무아는 모르고 영원한 ‘심(아트만)’이다.
범아일여(梵我一如), 혹은 최재우의 인내천(人乃天) 사상, ‘사람이 곧 하늘이다’는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말이다. 범(梵)은 브라만, 우주 전체이다. 아(我)는 아트만, 참된 나이다. 브라만과 참된 나는 같은 분이다. 이것이 범아일여이다. 내가 다 세상이다. 내 눈에 보이는 운전자 관점, 주관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나’ 하나밖에 없다. 운전자 관점에서 남들은 한 번도 내 주관 속에 들어온 적이 없다. 잠자면서 꿈에 들어갈 때 혼자 들어간다. 그러면 남들이 나타나고 세상만사가 나타난다. 그것이 남인 줄 알았더니, 나 혼자였다. 깨어 보니 꿈이었구나 하는 것이다. 깨어나서도 혼자 산다. 이 통찰이 범아일여, 일체유심조이다. 불교의 통찰로 들어가려면 ‘우주가 곧 나다’, ‘나 하나 밖에 안 산다’는’ 통찰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인도의 위대한 외도들이 있었기 때문에 불교가 탄생할 수 있었다. 위대한 외도의 사상을 다 섭렵한 다음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 불교이다. 그래서 절대 외도를 배척할 것이 아니다. 불교의 통서를 얻는 과정으로 수용해야 한다. 범아일여, 외도 사상을 거치지 않고 불교 끝까지 못 간다. 난데없이 갑자기 불교로 들어갈 수 없다. 반드시 ‘세상에 나 혼자 사는구나’, ‘내가 곧 우주구나’하는 통찰을 거친 다음, 그 ‘나’가 영원한 나가 아니고 찰나 생멸하는 알라야-식, 식(識)의 흐름까지 들어가면 불교이다.
범아일여이기 때문에 일체유심조, 내 마음속에 있던 일체가 나타났다는 말이다. 인중유과이다. 인중유과의 인은 아트만, 아트만 속에 인이 있고, 일체가 과, 즉 결과가 일체 세상만사에 모두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상캬(Sāṃkhya, 學派) 사상은 뿌르샤(정신원리), 쁘라끄리띠(물질원리) 2개의 원리가 있다.
뿌르샤가 정신 원리, 극적인 정신, 우리의 마음의 저 끝에 있는 것. 아주 깊은 삼매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을 한자로 명아(冥我)라고 번역한다. 명아, 어두울 冥, 컴컴한 자아이다. 삼매 속에서 발견하는 항상 살아계신 분인 뿌르샤는 누구든지 갖고 있다.
쁘라끄리띠는 원질(原質)은 원초적 물질, 원래의 물질이란 뜻이다. 자아(뿌르샤)는 주관, 내 마음이고, 쁘라끄리띠는 객관, 대상 그 전체이다. 이 두 분이 만나면은 쁘라끄리띠가 요동치며 변한다. 객관, 대상이 요동치면서 세상만사가 나타난다. 쁘라끄리띠(원질, 원래 원초적 물질) 속에 세상만사가 원래 다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세상만사가 결과이고, 쁘라끄리띠가 원인이다. 인중유과이다. 지금 이 시대의 현대 학문에서는 전혀 유통되지 않는 이론이다. 지금 이 시대에는 현대 학문에서는 현대 과학 때문에 인중무과 인과론만 기승을 부리고 있다. 지금은 치우친 시대이다.
예를 들어 보면, 자동차는 두 가지 모습이 있다. 이 두 가지 모습은 서로 전혀 다르다. 밖에서 본 모습이 있고, 안에 들어가서 핸들 잡고 본모습이 있다. 핸들을 잡고 보면 밖에서 전혀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갈 때도 두 가지 시점이 있다. 하나는 나를 거울에 비추듯이 밖에서 바라본 시점(객관), 즉 남이 나를 보듯이 생각하는 시점과 다른 하나는 운전자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점(주관)이다.
객관적 시점으로 살아가는 것이 현대 사회이다. 지금은 전부 숫자나 양적으로 환산하고 계량화 quantification 해서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주관적 시점에서는 양이 아니고 질의 세계(quality)이다. 주관과 객관이라고 흔히 우리가 대등하게 말하지만, 실제 세계에서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본 적은 단 한 번도 없고 그렇게 할 수 없다. 객관은 허구이다.
그러나 주간은 원래 항상 실재한다. 지금 주관적으로 운전자 관점에서 모니터도 보고 있고, 의자에 앉아서 등받이에 닿는 느낌이 들고 있고, 옷을 입고 있고, 이런 것은 모두 주관적 시점에서의 느낌이다.
객관적으로 나를 남이 바라보듯이 본 적이 있는가? 없다. 거울에 비춰 볼 때도 실제 나는 거울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거울 바깥에서 보는 내가 있는 것이다. 거울에 비친 나는 실재가 아니다. 나는 거울 바깥에서 거울에 비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한 번도 내가 나를 객관화시킨 적이 없다. 이것은 그 누구든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객관은 모두 이 시대가 만드는 허구이다.
객관은 없다. ‘나 혼자 산다’고 명심해야 한다. 항상 자동차 핸들 잡고서 운전석에 앉아 있는 그 자세로 평생 살다가 죽는다. 죽을 때도 그 상태, 주관 속에서 빠져나간다. 내가 어디 영원히 떠나가서 저 구름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그냥 세상이 딱 꺼진다. 꺼지면 사라진다. 그러면서 빠져나간다. 주관 속에서 운전자가 세상을 운전하면서 있다가 운전석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죽음이다.
꿈에 들어갈 때도 운전석에 앉아 있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꿈에 들어갈 때 나를 객관화하지 않는다. 운전석에서 꿈이 나타난다. 아침에 깨어날 때도 또 운전석에 앉아 있다. 하루 종일 운전석에 앉아 있다. 평생을 운전석에 앉아 있다. 모두 다 주관이다. 명심해야 한다.
불교 공부할 때 이 시점부터 먼저 내가 아주 명심하고 공부해야 한다. 이 시점이 처음 설법하실 때부터 석가모니 부처님의 시점이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부처님께 세상에 도대체 뭐가 있습니까? 하고 여쭈어 볼 때 부처님은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인간이 살아간다는 말씀 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6가지 지각 기관이 있고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6가지 지각 대상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부처님 당신께 보인 세상의 모습이 그러한 것이다. 세상을 보니 세상에는 눈.귀.코.입.몸.뜻이 있고, 그 대상들이 있더라 말씀이다. 너희들도 각자 그렇게 봐라. 눈에 보이는 세상, 각자의 눈으로 보고, 각자의 귀에 들리는 소리들의 세계, 이것이 세상이다. 이런 말씀은 전 세계 어떤 사상과 철학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다. 세상에 무엇이 있습니까? 할 때 감각 기관 6개하고 감각 개성 6개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이 말 자체가 운전석에서 운전대를 잡고 주관적 시점에서 말씀하셨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점이 화엄경에서 말하는 일불승(一佛乘)의 시점이다. 초기 불교의 가르침과 화엄의 일불승, 일승 사상의 시점과 똑같다. 일불승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내가 부처’라는 일불승이다. 실제 우리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다. 주관적 관점에서 운전대에 앉아서 세상을 바라보면 살아있는 생명체는 나 하나밖에 없다. 세상을 바라보는 살아있는 생명체는 나 자신 하나밖에 없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소금을 맛보면 짜고, 설탕은 달콤하다. 그 맛을 느껴보는 생명체는 나 하나밖에 없다. 남이 소금 먹을 때 그 짠맛이 나에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처음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영원히 혼자 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다’, ‘내가 절대자이다’, ‘내가 부처이다’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부처이다. 객관적 시점에서 내가 부처인 것이 아니다. 객관적 시점에서 내가 부처다 하면은 그냥 교주가 된다. 누가 그것을 인정하겠는가? 하지만 주관적 시점에서는 내가 부처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두든 사람들이 부처이다.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고 강아지도 부처이다. 강아지도 세상 바라볼 때 6가지 지각 기관, 6가지 지각 대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강아지가 바라볼 때도 살아있는 생명체는 자기 혼자뿐이다.
그래서 화엄경에서 신불급중생시상무차별, 마음과 부처와 생명체 이 세 가지는 차이가 없다고 대 선언을 하는 것이다. 운전자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 내 마음이 부처이다. 곧 내가 부처이고, 내가 세상의 중심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남도 그렇고 다른 생명체도 똑같다. 모두 다 구심점에 살고 있다. 세상의 구심점이 어디에 무슨 저기 태양계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든지 생명체가 있는 그곳이 구심점이다. 이것이 바로 일승(一乘) 사상이다. 일승, 일불승, 그냥 그 자리에서 부처님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 가르침은 후대의 대승불교에서 또 외국을 거쳐 오면서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초기 불교의 부처님 첫 번째 설법부터 오온설, 12처설, 18계설, 일체에 대한 분류법에서부터 일불승의 시점 분류였다고 알 수 있다. 불교는 변한 것이 없다. 대승은 위대하다. 초기불교는 아무리 봐도 이해하기 힘들다. 구전되었기 때문에 생략이 많다. 후대의 상상력을 통해서 초기 불전에 근거해서 형성된 대승 사상들을 이해하면 초기 불전이 쉬워진다. 초기 불전의 그 진가가 드러난다.
지금 이 시대는 과학이 지배하기 때문에 세상을 인중무과론적으로 바라본다. 객관주의, 물리주의(physicalism), 유물론(Materialismus), 세상 자료만 가지고 해석하는 유물론, 객관주의, 물리주의 다 같은 말이다. 이러니까 사람들이 전부 다 허구 속에 산다. 있지도 않은 객관이 있는 것처럼 만들어서 시대 정신으로 삼았다. 객관 세계에서 비교가 가능하다. 내가 내 자동차 바깥에 나와 보니 내 차도 있고 그 옆에 더 큰 차도 있고 또 그 옆에 조그마한 차도 있다. 우월감과 열등감이 생긴다. 피곤하다. 그래서 더 큰 차를 사야지 하고 노력하기 시작한다. 요즘 살기 힘든 이유가 이렇게 서로 비교하기 때문이다. 전부 다 자기 마음이 바깥에 빠져나와 있다. 원래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인데 빠져나오는 가상 설정을 하고, 서로 비교한다. 아파트 평수 비교하고, 자동차 종류 비교하고, 그다음에 학벌 비교하고, 월급 비교하고, 얼굴 비교하고, 키 비교하고 아주 못되게 산다. 그래서 이것을 시정하는 것이, 앞으로 불자들의 역할이다. 누구나 전 국민이, 전 인류가 운전자 관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여실지(如實智)하게 원래 그대로, 원래 태어난 그대로, 원래 본질 그대로 살아가게끔 허구 속에 살지 말고, 가짜 속에 살지 말고, 가짜 객관 속에 살지 않도록 계도하는 것이 앞으로 불교를 아는 분들, 불자들의 큰 시대적 역할이다.
지금 물질적으로는 너무나 훌륭한데 마음은 너무나 불행하다. 통계조사에 의하면 지구에서 가장 불행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200개 나라 중에서 자살률 세계 최고, 출산율도 세계 최저이다. 사람이 목숨 끊는다는 것은 살 곳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이 아기를 안 낳는 것은 아기 키울 곳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곳이 대한민국이다. 기가 막힌 이야기이다. 시급하고 시급하다. 부자들이 지금 빨리 사회에 나서서 운전자 관점으로 사랑하기 운동부터 먼저 해야 한다. 세끼 밥만 먹고, 굶어 죽지 않고, 얼어 죽지 않고, 더워 죽지 않으면 그때는 다들 당당할 수 있다. 언제가 죽기 때문에 내 재산이 몇백억 있어봤자 다 무의미하다. 재산이 100억 있다고 해서 순두부에다가 금칠해서 먹지 않는다. 똑같이 먹는 것이다. 던킨도너츠 3개 먹으면 배부른 거 똑같다. 그런데 관념 속에서 재산이 300억이래. 월세 집에 사는데 한다. 월세 집도 얼어 죽지 않는다. 다 똑같다. 이 시대가 이런 운동을 벌일 경우 금욕과 권력이 골방의 족보처럼 변해서 무의미해질 것이다. 누구나 한평생 사는데 요새 젊은 사람들은 벌써 그 흐름을 타고 있다. 소확행이 이 흐름이다. 어차피 한평생에 사는데 쌓아 둘 필요 없다. 쓰고 살다가 그냥 죽는 것이다. 집은 고시원에 있는데 벤츠 사버린다. 물론 이것이 좋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쨌든 어차피 죽기 때문에 그냥 유지만 하면 된다는 이야기이다. 물질적으로 절대 빈곤만 벗어나면 모든 사람들이 운전자 관점에서 살면서 돈이 많다고 부러워하지 않고 살 수 있다. 돈이 많으면 관리하려고 평생 돈의 노예가 된다. 노예는 관리하는 놈, 좀비이다. 은행의 통장에 돈은 많지만 관리하는데 좀비처럼 평생 산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다. 돈 계산하면서 인공지능처럼 사니까 그렇다. 물론 돈이 필요하다. 적당히 기본은 돼야 한다. 그다음부터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내 인격을 형성시키고, 내 주변을 위해서 사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어쨌든 연기법은 중도 인과론이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사상을 불자들이 앞장서서 퍼뜨리고 현대의 인과론인 인중무가론적인 단견적 인과론의 폐해를 여기저기에서 자꾸 알려야 된다. 학문적으로 꼭 불교학을 하지 않더라도 자연 과학하는 사람도 현대 인과론의 잘못된 점을 찾고 알려야 된다.
촛불에 불을 켠 다음에 옆에 빈 초가 있다. 빈 초에 촛불을 옮겨 붙인다. 그러면 앞에 있던 초가 원인이고 뒤에 불붙은 초의 불이 결과이다. 즉 앞에 촛불이 원인이고 뒤의 붙은 촛불이 결과이다. 그런데 원인과 결과, 앞의 촛불과 뒤의 촛불은 같은 불이지만 새롭게 탔기 때문에 다르다. 그래서 불일(不一) 같지 않다. 이것은 인과인데 같지 않기 때문에 불일의 인과이다. 앞의 촛불과 뒤에 붙은 촛불은 전혀 다르다. 그러나 앞의 촛불이 없었으면 뒤에 촛불에 불이 붙을 수가 없다. 그래서 또한 불이(不二)이다. 앞의 촛불과 뒤에 불붙은 촛불의 관계는 인과관계이기는 하지만 불일불이(不一不)의 중도 관계이다. 이것이 정견이다. 현대 과학에서는 뒤의 촛불이 새롭게 타올랐구나 단견을 가르친다.
H2O(물)은 H(수소)+O2(산소)원자가 합해지면 물이 새롭게 발생한다. 진화 과정에서 뇌가 신경이 부풀어서 뇌가 되면 마음이 새롭게 발생한다. 창발성(Emergent Properties)이라고 가르친다. 연기법은 특이한 이론이 아니고 사소한 걸 보더라도 이것이 원인과 결과가 이어질 수도 없고, 끊어질 수도 없구나 하고 누구든지 발견할 수 있는 법칙이다. 이것을 보편 법칙으로 선언하신 분은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중도는 두 가지가 있는데 실천적 중도와 사상적 중도이다. 지금 이야기한 것은 사상적 중도이다.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이 바로 사상적 중도이다. 단견, 상견을 비판하는 것이 사상적 중도이다. 인중유과론적 인과론 비판, 인중무과론적 인과론비판 둘 다 비판하는 것이 사상적 중도인 연기론이다. 실천적 중도인 선을 통해서 발견한 진리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중도적으로 인과가 돌아가더라는 이야기이다. 촛불을 곰곰히 따져 보니까 원인 결과 관계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고, 중도적인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너무나 쉽다. 이렇게 쉬운 것을 자연과학 때문에 있는 그대로 얘기하지 않고 치우쳐서 얘기하는 풍조가 현대 사회에 마련돼 있다. 앞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려야 되고 그 근거의 토대는 바로 불교의 연기론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학습자료 1. 중관학 창시자, 문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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