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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중관학노트

중관학2강: 1. 중관학(中觀)의 창시자, 문헌

by 마음길 2022.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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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관학(中觀)의 창시자, 문헌

 

용수(龍樹: Nāgārjuna, 150~250) / 인도 남부 지방에서 바라문 계급으로 태어났다.

대승불교의 아버지’ , ‘모든 대승 종파의 스승이라고 불린다.

저술: 《중론》 - 450여 수의 Śloka(4×4조의 음절시)로 이루어진 철학적 게송 모음집

그 외 《회쟁론》, 《육십송여리론》, 《공칠십론》, 《광파론》, 《대지도론》, 《십이문론》 

아리야제바(阿利耶提婆: Āryadeva, 170~270) / 저술: 《백론》, 《사백관론》.

 

중관학의 창시자는 용수(龍樹: Nāgārjuna, 150~250) 스님이다. 대표적인 저술이 《중론(中論)》이고 총 450여 수의 Śloka(4×4조의 음절시)로 이루어진 철학적 게송 모음집이다. 한문 번역본은 455수의 시로 이루어져 있다.

 

2. 중관(中觀)의 의미

 

중관(中觀): Madhyamaka(dbu ma), Mādhyamika(dbu ma pa)의 번역어.

②어원 분석: ‘가운데 (또는 ‘중간’)을 의미하는 형용사 마드야(madhya)’에 최상급 어미(ma)’가 결합된 단어.

의미: 가장 가운데의 것. 유래: 승조(僧肇: 374-414 혹은 384-414)의 《조론(肇論)》

中觀云 觀方知彼去 去者不至方 斯皆卽動而求靜以知物不遷 明矣: 物不遷論」 《肇論》

中觀云 物從因緣故不有 緣起故不無 尋理卽其然矣: 般若無知論, 《肇論》

 

‘《중론(中論)》’은 가운데 중() 자를 썼는데 중도(中道)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불교의 핵심이 중도이다. 부처님이 제일 처음 설하신초전법륜(初轉法輪)을 보면 녹야원(鹿野苑, mṛgadāva) 사르나트에서 다섯 비구에게 처음으로 설법을 하시는데 그때 설법의 내용이 중도(中道) 설법이다. 중관학의 중도에는 실천적 중도와 사상적 중도 두 가지가 있다.

 

실천적 중도 : 고행과 삼매락을 배격한 중도의 수행 = (dhyāna, jhāna) - 선나(禪那)

= 삼매 +지혜

 

실천적 중도는 수행과 관계되어 있다. 수행을 할 때 극단적으로 나를 괴롭히는 수행인 고행과 정신 집중해서 어떤 경지를 추구하는 삼매(三昧)를 닦는 수행을 하지 말라고 한다. 초전법륜에는 고행도 하지 말고 세간(世間)의 락()도 빠지지 말라고 되어 있다. 세간의 쾌락을 추가하지 말는 경문은 조금 이상하다. 부처님이 다섯 비구들에게 가르침을 줄 때 고행을 해봤자 고뇌가 사라지지 않으니 고행하지 말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이미 세간락을 떠나 출가한 비구들에게 세간의 락을 추구하지 말라는 문장은 실제 부처님의 가르침과 비교했을 때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실제 부처님의 가르침의 뜻을 추론해 보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보리수 밑에 앉기 전까지의 6년간 수행 과정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처음에는 바가반(박가야) 선인에게 고행을 배우고 난 다음 그 고행을 버리고, 알라라 깔라마 선인에게 무소유 삼매를 배우시고 경지에 오른 다음에 그것도 버리신다. 삼매 속에 들어갈 때는 편안 하지만 삼매 속에서 나오면 지적인 번뇌가 다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왜 죽을까? 전혀 알 수 없었다. 삼매 속에 들어가 있을 때는 생각을 멈추기 때문에 편안 하지만 삼매에서 나와서 마주하게 되는 세상은 여전히 불평등하고 부조리했다. 삼매를 닦아도 세상의 부조리한 문제는 근원적으로 풀리지 않으니 둘 다 버리시고 보리수 밑에 앉으신다. 결국 부처님은 이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첫 번째 고행도 하지 말고, 둘째 삼매도 닦지 말고 마지막으로 세관락도 추구하지 말라고 할 때 ‘세관락’은 단순히 세속적인 즐거운 락()이 아니라 ‘삼매락(三昧樂)’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다. 삼매도 세간에 속한다. 삼매도 윤회의 세계 속에 들어간다. 욕계, 색계, 무색계(無色界) 모두 삼매의 세계이다.

 

초전법륜에서의 중도 법문 실천적 중도는 수행을 할 때 수행자는 고행도 하지 말고 '세관락'도 추구하지 말라 할 때 ‘세관락’은 ‘삼매락’으로 이해하면 된다.

 

삼매도 올바른 수행이 아니다. 삼매만 닦는 사람들을 초기불교 개론서에 보면 수정(修靜) 주의자, 삼매만 닦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사람이 알라라 깔라마(Alara Kalama)와 웃다까 라마뿟다(Uddaka-Rāmaputta)이다. 무소유(無所有) 삼매, 비상비 비상처(非想非非想處) 삼매를 가르쳤는데 부처님께서는 둘 다 버리셨다.

 

그래서 실천적 중도란 무엇인가? 고행도 하지 않고 삼매도 닦지 않는 것으로 부처님께서 보리수 밑에 앉아서 닦으셨던 선()이다. 선이 바로 실천적 중도이다. 선은 삼매가 아니다. 선은 범어로 디야나(dhyāna), 팔리어는 지하나(jhāna)라고 쓴다.

 

중도

실천적 중도 : 고행과 삼매락을 배격한 중도의 수행 = (dhyāna, jhāna) - 선나(禪那)

중도의 수행: = 삼매() +지혜() = 정혜쌍수定慧雙修 (결과, 목적) = 사유(思惟) () = 정려(靜慮)

= (, samatha) + (, vipassanä) = 지관쌍운 止觀雙運(방법)

= 곰곰이 생각하는 것

= 가만히 보는 것

 

()은 삼매와 지혜 즉 정()과 혜(), 두 가지가 합해진 것이다. 보통은 정과 혜를 쌍으로 함께 닦는다 해서 정혜쌍수(定慧雙修)라고 한다. ()과 혜()가 합해진 것이 바로 선()이다. 선을 닦으려면 집중하는 삼매도 필요 하지만 반드시 지혜가 있어야 선이다.

 

지혜는 또 다른 말로 지()와 관()이 합해진 지관(止觀)이다. 지관의 지() 팔리어는 사마타(奢摩他), 관은 팔리어로 위빠사나((vipassanā, )라고 한다.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합해져야지만 선()이다.

 

초전법륜에서 고행과 삼매를 다 배격하고서 중도의 수행을 하라고 했는데 이 중도의 수행이 선이고 이 선은 지관쌍운(止觀雙運) 혹은 정혜쌍수(定慧雙修)라고 얘기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정혜쌍수(定慧雙修)’는 목적이고 지관쌍운(止觀雙運)는 방법이다.

 

()는 마음을 멈추는 것으로 멈추면 삼매에 들어간다. 삼매의 관()은 보는 것이다. 가만히 보면 지혜가 생긴다. 그래서 목적 혹은 결과다. 그래서 중도의 수행은 선이고 다른 말로 지()와 관()이 함께하는 수행이다. 마음을 멈추는 것뿐만 아니라 봐야지 된다. 삼매의 상태의 상태에서 지혜가 있는 것 이것이 선이다. 이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너무나 상식적인 수행이다. 그냥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 선()이다. 가장 건전한 수행이 선이다. 테크닉을 쓰는 것이 아니다.

 

고행과 삼매는 모두 테크닉을 써야 한다. 어떤 지침에 따라 고행하고 삼매를 하고 숨을 멈추든지 서 있든지 하는 인위적인 지침들이 있다. 이것은 테크닉이지 선이 아니다. 선은 테크닉이 아니다. 그냥 상식적으로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냥 가만히 생각하는 것이다. 가만히가 지()고 생각하는 관()이다. 곰곰이 생각하는 것 혹은 가만히 보는 것이라고 해도 된다.

 

불교는 삿된 것이 없는 너무나 건전한 종교이다. 초기 불교 가르침은 너무나 건전하고 상식적이다. 어떤 테크닉을 써서 어떤 느낌이나 신비 현상을 쫓는 것이 없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을 알아차리고 상식이 깊어지면 불교의 끝까지 같다.

 

(윤리, 도덕) + () + () = = 삼학(三學) = 팔정도(八正道)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

 

선이 지관쌍운(止觀雙運)이고 정혜쌍수(定慧雙修)인데 빠져 있는 것이 계()이다. 계는 윤리, 도덕인데 왜 빠졌을까? 계는 출가자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기본이기 때문이다. 계가 완성된 사람이 선을 닦는 것이다. 선은 원래 계. 정. 혜(戒定慧)이다. 우리가 선을 정혜쌍수(定慧雙手), 즉 집중해서 보는 것만으로 선으로 보기 때문에 계를 자꾸 잊어버린다. 계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필요 없기 때문이 아니고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기본이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계. 정. 혜(戒定)의 삼학이 선이라고 한다. 이것을 보통 삼학(三學), 세 가지 공부라고 한다. 계. 정. 혜는 계, 윤리. 도덕으로 동물성에서 벗어나서 정, 마음을 멈춰서 가만히 보는 것이 불교 수행이다. 이것이 중도이다. 왜 중도인가? 고행도 아니고 삼매도 아니기 때문이다. 고행의 한 극단과 삼매의 한 극단인 삼매의 락양극단을 모두 배격했기에 중도(中道)이다. 이것이 팔정도(八正道)이다. 계정혜의 삼학의 다른 표현이 팔정도이다.

 

초전법륜, 초기불교 첫 번째 설법에서 녹야원(鹿野苑) 사르나트(Sarnath)에서 설하신 첫 번째 중도의 가르침이 팔정도이고 이것을 풀어서 말하면 계. 정. 혜(戒定慧)의 삼학(三學) 수행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팔정도(八正道)는 앞에 ‘正’ 자가 붙어서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이다. 이 중에 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은 계()에 해당하는 것도, 정()에 해당하는 것이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정혜 삼매, 정념(正念), ‘()’이 위빠사나 스무리띠(smṛti)의 사티(sammā-sati)이다. ()는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이다. 정정진(正精進)은 부지런함으로 계정혜 세 가지에 다 해당한다. 그래서 정정진(正精進)은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념(正念), 정정(正定)에 모두 들어간다.

 

바르게 보는 정견(正見), 바르게 생각하는 정사유(正思惟)는 혜()에 속한다. 바르게 말하는 정어(正語)와 바르게 행동하는 정업(正業), 그리고 정명(正命)의 명은 목숨 ‘命’ 자로 ‘올바른 직업또는 올바른 생계 수단이다. 정명(正命)은 초기 남방불교 스님이 탁발로 시주받아서 공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정진(正精進)은 부지런한 것이며, 정념(正念)은 항상 생각을 알아차리는 것, 보통 ‘마음 챙김’이라고 하는 것이 정념(正念)이다. 마음 챙김은 마음을 항상 주의 집중하는 것이다. 정정(正定)은 올바른 삼매에 들어가는 것이다.

 

실천적 중도의 수행은 팔정도이고, 팔정도는 계정(戒定)의 삼학(三學)이고 상식적으로 말한 면 동물성에서 벗어나서 계를 지키면서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 팔정도이다. 동물성에서 벗어나서 곰곰이 생각하는 것. 왜 동물성에서 벗어나야 할까? 동물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곰곰이 생각해도 잡념이 자꾸 생겨서 생각이 안 된다. 그래서 일단 계부터 완성되어야 정혜가 가능하다. 계가 안 되면 겉모습만 흉내만 내고 산만한 산정(散定)에만 들게 된다.

 

계의 토대에 의해서만 정신 집중을 해서 연기법(緣起法)과 공()을 발견할 수 있다. 연기와 공을 발견했다 말해도 되고 십이연기에 유전문(流轉門)과 환멸문(還滅門)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해도 된다. 십이연기의 환멸문’. 무명(無明)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하고 지,병이 다 무너진다. 이것이 공성이다. 또 사성제, 멸성제(滅聖諦)가 공성이다.

 

십이연기가 다 무너지는 환멸문,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의 환멸문, 사성제의 고. 집. 멸의 멸성제, 반야의 공사상과 선불교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 다 같은 얘기입니다. 세상 다 무너지는 겁니다. 그래야 지만 공성을 발견하고, 그 공성을 발견할 때 그냥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연기법에 의해서 무너지기 때문에 연기를 함께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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