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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중관학노트

중관학 2강: 2. 중관(中觀)의 의미... 계속.

by 마음길 2022.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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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관학의 의미(계속)


초전법륜, 부처님의 첫 번째 설법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중도 설법이다. 이 설법의 중도가 실천적 중도이다. 고행도 하지 말고 세관락(세속적 낙)에도 빠지지 말라고 했다. 여기서 세관락은 세속적인 낙(樂)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섯 비구한테 설법하시는데 다섯 비구는 벌써 세속적 쾌락은 다 떠난 수행자이기 때문이다.

부처님 열반 후 불전이 처음 결집될 때 아난존자(阿難尊者)가 암기한 부처님의 설법을 구전으로 전승하였다. 이렇게 초기불교 500년 동안은 암송된 설법을 구전으로 전승하다가 기원전·후에야 문자로 전승되었다. 패엽경(貝葉經), 조개처럼 생긴 잎에 경전을 새겼다. 문자 전승이 시작한 것은 부처님 열반 후 500년이 지나서이다. 지금 초기불전인 아함경, 니까야와는 다르다. 12 구경이라고 해서 전혀 다른 패턴으로 기록되었다.

초기 불교 부처님 가르침에 가장 가까운 경전인 남방불교의 팔리어로 니까야(Nikāya), 한문 번역의 아함경(阿含經)은 모두 초기불전으로 반 이상의 내용이 겹친다. 이 초기불전조차 부처님의 설법 후 500~600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문자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변질이 많이 되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면 도간경(稻竿經:Salistamba Sutra)을 보면 한문으로 번역된 연대가 300년대부터 800년대까지로 번역본이 5~6개인데 원래 초기 불전이다. 이 경전은 부처님이 설하신 것은 아니고, 사리불이 설하신 것이다. 도간경(稻竿經:Salistamba Sutra)은 볏단이 서로 기대어 있는 걸 보고 십이연기법(緣起法)을 설한 것이다. 연기(緣起)가 의존성이다. 이 경전이 후대로 가면서 내용이 조금씩 변한다. 다섯 개의 경전을 시대별로 비교해 보면 미륵보살이 사람으로 모두 바뀐다. 500년 전만 해도 사리불이 설한 십이연기 설법인데, 시대가 지나면서 미륵보살이 사리불에게 설한 유식 불교 경전으로 변질되었다. 이렇게 500년에 걸쳐서 필사자를 통해 전승되는 과정에서 내용이 조금씩 변질되었다. 600년 만에 초기불전이 대승경전으로 바뀌게 되었다.

부처님 이후 6~700년 이후에 문자화가 되어서 지금 우리가 접하는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에 고행도 하지 말고 세관락도 추구하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세관락은 조금 이치가 맞지 않다. 여기서 ‘세관락’은 부처님의 수행과정을 통해 살펴보면 세속적 쾌락이 아니고 세간에 있는 삼매의 즐거움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밑에 앉기 전까지 계속 고행과 삼매 두 가지만 수행하셨기 때문이다. 둘 다 마음을 어떤 상태로 만들기 위한 테크닉 수행이었다. 호흡과 고행의 수행을 하다 보면 그전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신비 현상 체험이 생긴다. 이것은 모두 외도들이 가르치는 최고의 경지이다. 그러나 이것이 깨달음의 최고의 경지는 아니다. 불교의 깨달음은 신비 현상 체험이 아니다.

수행의 신비 현상 체험은 연기에 의한 유위법(有爲法)이기 때문에 조건이 만드는 것이다. 조건이 맞으면 그런 체험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열반이 아니다. 물론 깨달음 과정 중에 신비 현상 체험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 체험 자체가 깨달음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신비 현상 체험만을 가지고 깨달음을 이야기하면 잘못되기 쉽다. 잘난 척하고 이양과 공경을 받기 위해서 신비 현상 체험을 이야기하게 된다. 이 이야기가 율장(律藏, 팔리어: Vinaya Piṭaka 비나야 피타카)에 기록되어 있다. 율장에 4가지 바라밀이 나오는데 죄 중에서 대망어죄((大妄語罪)라는 큰 죄가 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이 깨달았다고 할 때 그 순간 재출가도 불가능한 중죄가 된다. 깨닫지 못했는데 깨달았다 하면 안 된다. 그 구절 중 하나가 설사 실제 아라한이 돼서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그 체험을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내용이 있다.

그렇다면 깨달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깨달은 것은 본인만 알 수 있다. 절대 남이 알 수 없다. 나에게 번뇌가 없으면 깨달은 것이다. 열반, 깨달음은 번뇌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면 번뇌가 무엇인가? 제일 쉽게 얘기하면은 탐진치(貪瞋癡)가 번뇌이다. 나에게 탐진치가 없으면 깨달았다고 알면 된다. 나에게 충동, 분노, 화도 전혀 안 나고, 세상에 대해서 미심쩍은 것이 하나도 없다면 깨달은 것이다. 즉 번뇌를 하나하나 점검해서 하나도 없다면 깨달은 사람이다. 어떤 신비 현상 체험을 한 사람이 깨달은 사람은 아니다. 부처님께서도 보리수 밑에 앉기 전까지는 체험 위주의 수행을 하셨는데 그때의 체험은 삿된 수행이다. 그 두 가지가 고행과 삼매이다.

부처님께서는 삿된 수행인 고행과 삼매를 모두 수행하셨지만 둘 다 버리신다. 이 수행이 삶과 죽음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전혀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중에 부처님께서 새로운 수행을 하시는데 이것이 12살 때 보리수 밑에서 했던 수행이다. 12살 때 농경제에 참석했다가 벌레가 새에게 먹히고 또 그 새가 더 큰 새에게 잡혀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비감에 사로잡혀서 보리수 아래서 수행했는데 이것이 바로 선(禪)이었다. 경에 보면 초선까지 가셨다고 한다. 선은 그냥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다. 선은 테크닉이 아니고 가장 건전하고 아주 상식적인 수행이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알 때까지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다. 지관쌍운(止觀雙運), 곰곰이 마음에 잡념 없이 집중해서 관(觀)하여 생각하는 것이다.

무명(無明)()(), 명색(名色), 육입(六入), (), (), (), (), ()(,)노사(老死)
생노사
10지 연기 = 제식(齊識)연기: 제식이환(齊識已還)
12가지 인과의 사슬 = 모든 생명체의 삶과 죽음의 방식의 공통점.

부처님께서 삶과 죽음, 왜 죽음이 있을까? 이렇게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발견을 하신다. 왜 죽음 있을까? 왜 모든 생명체는 죽을까? 태어났기 때문에 즉, 삶(生)이 있기에 죽음(死)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제일 마지막 이야기이다. 생(生)이 있어서 노사(老死)가 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곰곰이 생각하시다가 보리수 밑에 앉아서 35세 때 6년 수행 끝 무렵에 이 십이연기를 발견하신다. 무명(無明), 행(行),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 왜 노사(老死)가 있는가? 왜 늙어 죽는가? 에서? 시작해서 무명(無明)까지 발견하신다. 부처님은 인간만이 아니고 왜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은 왜 늙어 죽는가? 부처님은 생로병사의 문제 때문에 출가하셨다. 부처님이 출가하시려고 할 때 아버지 정반왕이 출가를 반대하지만, 부처님이 죽음이 없는 방법을 알려주면 출가하지 않겠다고 하니 더 이상 만류하지 못했다고 한다. 출가 동기가 죽음의 문제인데 드디어 발견한다. 생(生)이 있기에 죽음(死)이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다 '왜 태어났는가?' 에서 막힌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추정을 통해서 어머니 뱃속에서 수정란이 생기는 때가 나의 현생의 시작임을 알 수 있다. 생노사의 십이연기가 모든 생명체의 생존 방식 공통점이라는 것이다. 탄생했으니까 늙어 죽는다. 그러나 왜 태어났는가는 알 수 없었다.

신, 명색(名色), 육입(六入)까지가 탄생과 어머니의 뱃속이다. 촉(觸), 수(受)가 출생 후 우리의 어린 시절이고, 애(愛)가 사춘기로 욕망, 음욕이 생긴다. 애(愛), 취(取), 유(有)가 성인이다. 독립하는 시기이다. 여기까지는 부처님이 기억할 수는 없지만 추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식(識)이 생겼나? 왜 이 마음이 생겼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십이연기가 12가지인데 원인과 결과, 인과의 사슬. 사람만 십이연기가 있는 것이 아니다. 십이연기는 사람만이 아니고 코끼리, 강아지, 바퀴벌레든 모든 생명체가 십이연기에 따라 살아간다. 동물과 사람만이 아니라 하늘에 사는 천신, 지옥 중생, 아귀, 귀신도 윤회의 세계 속에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십이연기의 법칙에 따라 살아간다.

초기불전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아직 다 깨닫지 못해서 무명과 행이 빠지기 때문에 10지 연기라고 한다. 이것을 제식연기(齊識緣起)라고 해서 식(識)에 다 달아서 다시 돌아왔다는 뜻이다. 연기인데 식(識)까지만 가고 그 이상은 가지 못하는 것을 제식연기(齊識緣起)라고 한다.

아함경 초기 불전에는 제식이환(齊識已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식(齊識)에서 끝나고서 더 이상 못 가고 다시 돌아온다는 뜻이다. 보리수 밑에서 어머니 뱃속까지 갔다가 어머니 뱃속에서 식(識), 내 마음이 시작됐는데 명색(名色)이 태아, 심신(心身) 복합체이다. 마음에 해당하는 게 명(命)이다. 뱃속에 태아도 마음이 있다. 태아의 몸뚱이가 색(色)이다. 심신 복합체이지만 아직은 눈, 코, 귀가 없다. 그래서 임신 5주 이전까지의 태아가 명색(名色)이다. 이것도 다 경에 나온다. 5주째가 육입((六入)인데 눈, 코, 귀가 생기고 6가지 지각이 생기지만 기능은 없고 자리만 잡는다. 뱃속에서 태아는 귀도 안 들리고 눈도 안 보인다. 태교는 허구다. 태어난 이후 한참 지나야 귀가 들리고 눈이 보이고 감각도 못 느낀다. 태교는 60년대 서양에서 청년 문화 운동 즉 여권 운동 페미니즘이 일어날 때 만들어진 허구의 학문이다. 물론 태교가 중요하다. 예를 들면 임신했을 경우 영양 보충을 잘해야 하고, 편히 쉬어야 하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중요하다.

불교 경전에 의한다면 태교를 통해 아기가 변하는 게 아니라 어떤 귀신이 들어왔느냐에 따라 아기가 엄마를 변화시키고 그 집안을 변화시킨다. 불교의 관점에서는 태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좋은 귀신 들어오는 것이 중요하다. 입태 기도가 중요하다. 신혼부부가 결혼한 다음에 아기 갖기로 마음먹으면 절에 와서 기도해야 한다. 남을 도울 줄 알고 더불어 자기도 잘 되어 사회를 행복하게 해주는 아기가 올 수 있도록 기도 해야 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태교가 아닌 입태 기도를 한다. 경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 사리불(舍利佛 , Śāriputra)의 어머니인 사리부트라는 임신하기 전에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임신 후 갑자기 총명해진다. 너무나 똑똑해져서 오빠인 장조(長爪) 범지(바라문)는 사리가 임신을 해서 좋은 태가 들어왔다고 짐작한다. 장조 범지는 태어나서 장성한 조카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임신한 소식을 알자마자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대지도론(大智度論)에 기록되어 있다. 장조 범지가 공부를 시작하면서 손톱을 깎지 않는다. 손톱이 긴 브라만이라고 해서 장조(長爪) 범지(구치라)이다. 손톱을 깍지 안은 것은 공부하기 시작한 다음부터 손톱을 깍지 않았다 것을 태어난 조카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는지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출가하니까는 장조 범지가 조카 찾으려고 부처님을 만나러 간다. 부처님이 평생 무슨 공부 했느냐? 고 물으니 나는 일체 모두 공부했다고 답한다. 자기가 다 가르치겠다는 이야기이다. 부처님이 네가 평생 온 지식을 다 습득하여 공부하면서 얻은 결론이 무엇인지 질문하자 마하구희라 존자가 ‘일체법불수(一切法不受)’하고 답한다. “어떤 이론도 어떤 사상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일체법(一切法) ‘어떤 법’도, 불수(不受)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상 공부하다 보면 이쪽 학파에서는 이런 얘기하고 저쪽 학파에서는 반대 얘기하고 이랬다 저랬다 중구난방이다. 이것이 다 말장난이구나. 다 틀렸다는 뜻이다. 모든 사상과 철학은 다 엉터리라는 것이 장조 범지의 결론이다.

장조 범지의 ‘일체법불수’ 답변을 듣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선승과 같은 교화를 시작하신다. 부처님이 “그렇다면은 일체법불수를 너는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하고 역공한다. ‘어떤 이론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너의 이론을 수용하느냐? 배척하느냐? 하고 역으로 다시 물어본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이론은 틀렸다는 이론을 받아들이면 틀리지 않는 하나의 이론이 예외로 있는 것이 된다. 반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모든 이론은 틀렸다는 이론을 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주장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이것이 패러독스 논법이다. 오도 가도 못하는 진퇴양난 자기모순에 빠진 장조 범지가 그제야 머리 조아리고 절을 올리며 삭발을 하고 출가해서 마하보리 대존자가 된다. 정리하면 초기불전에 의하면 사리불을 임신하고 나서 어머니가 변하는 것이지, 어머니가 잘 태교해서 사리불이 변한 것이 아니다.

또 하나 화엄경(華嚴經)의 구법기(求法記)에 선재 동자의 생애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데 처음에 선재동자를 임신했을 때 집 안에 광맥이 가득하고 서상(瑞像: 상서로운 조짐)이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가 들어온 다음 어머니가 변하고 집안이 변하는 것이지 태교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세속 학문에 그냥 편승하면 안 된다.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보아야 한다. 태교가 쓸모없다는 것이 아니다. 임산부를 위해서 영양 보충을 많이 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해야 하지만 태교 이론은 맞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불교적 관점에서는 임신은 태교도 중요 하지만 임산부 보호와 어린이 영양 보충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불교적으로는 윤회가 있어서 입태 기도를 통해서 좋은 분이 들어오시게 기도하는 것이 더 여법하고 불교의 이치에 맞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육입(六入) 단계에서는 아직 감각이 없다. 출생 후에야 눈이 보이고 귀가 들리게 된다. 경에는 출생 후 한 3 ~ 5일 이라고 쓰여 있다. 사춘기 이전까지는 고통과 즐거움을 수(受), 느끼면서 살아간다. 사춘기 이전이다. 12~15세 사춘기가 되면 애(愛), 독립하기 위해서 자식을 낳기 위해서 성적으로 발달한다. 이때 욕망과 분노, 식욕, 음욕이 강렬해진다. 여기에 맞춰 살아가다가 취(取)가 인생관, 세계관이다. 애(愛)를 성취하기 위한 인생관 욕망이다. 그다음에 윤회 생전 그렇게 살아간다. 그리고 유有)의 끝에서 다시 늙어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 이렇게 생과 노사를 윤회한다.

3(三明)이 열리면서 성도 하심.
초야(저녁): 숙명통 (부처님 당신의 무한 전생 기억) - 인과응보(연기)의 이치 발견(특수)
중야(자정): 천안통 (모든 생명체의 전생 현생의 관계, 현생-내 생의 관계를 통찰)(보편)
후야(새벽): 누진통 (모든 번뇌가 사라진 신통력) -사성제(고.집.멸.도)의 완성.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생명체가 윤회하면서 생노사를 살고 있는데 도대체 왜 내가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밤에 가만히 보면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보니 호흡이 끊어지면서 사선의 숙명통(宿命通)의 경지에 이른다. 불교의 제사선(第四禪)에는 초선(初禪), 이선(第二禪) 삼선(第三禪), 사선(第四禪)이 있는데 사선이 되면은 풍대(風大)가 끊어지면서 숙명통(宿命通)이 열리고 전생이 기억난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초야(初夜)에 삼명(三明) 열리면서 숙명통(宿命通), 부처님의 무한 전생을 기억하게 된다. 숙명통, 무한 전생을 기억하시면서 전부 다 인과응보(因果應報) 이치에 따라서 진행이 됐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떤 경우에는 짐승일 경우도 있었고 어떤 경우는 사람일 경우도 있었는데 사람이 살다가 좀 악행을 했으면 짐승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또 인간 태어났다가 선행을 하면 천신이 되기도 한다. 세상이 엉망진창이 아니고 인과법, 연기법이 있어서 원인 때문에 결과가 생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수행하시기 전까지는 어떤 생명은 잡아먹히고, 어떤 것은 잡아먹고, 어떤 사람은 왕이고 어떤 사람은 노예이고 세상이 엉망진창이고 너무나 부조리했는데 숙명통으로 보니까 부조리한 것이 아니라 조리가 있는 세상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선하게 살면은 굉장히 뛰어난 생명체가 되고 악하게 살면은 밑바닥 떨어지는 생이 벌어진다는 인과응보의 이치를 발견하게 된다.

그다음 중야(中夜), 자정이 돼서 다른 생명체에도 이런 법칙이 통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이 천안통(天眼通)이다. 천안(天眼), 천신의 눈이라는 뜻이다. 전 생명체를 꿰뚫어 알게 되는 천안통(天眼通), 천신의 눈에 이르게 된다. 모든 생명체의 전생을 보게 되면서 인과응보의 이치가 보편 법칙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보편 법칙이 나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고 모든 생명체에 적용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인과응보가 크게 보면 바로 연기법이다. 연기, 원인에 의존해서 결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인과응보(因果應報)’에서 인과(因果)는 원인, 응보(應報)는 결과이다. 원인에 의해서 결과가 발생한다. 선과 악의 원인에 의존해서 고통과 즐거움의 결과가 나온다. 이렇게 생명체가 돌아가는 법칙을 다 알게 되었다.

그리고 후야(後夜), 새벽에 모든 법을 깨우친다. 누진통(漏盡通),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걱정 모두 사라졌다. 이제 모든 사성제(四聖諦)가 성립, 완성되었다.

세상은 괴로움, 집성제(集聖諦)이다. 번뇌, 집(集) 때문에 고(苦)가 있다. 사성제는 고집멸도(苦集滅道)이다. 집이 번뇌이다. 내 마음속의 식욕과 음욕 등 번뇌를 제거하면 고통이 사라진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제거할 수 있을까? 도, 팔정도(八正道)를 닦으면 번뇌가 제거돼서 고통이 사라진다. 이것이 사정제(四聖諦)이다. 이것이 왜 위대하냐 하면 일반 사람들이 사는 방식과 다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고통이 있을 경우 고통의 원인을 바깥에서 찾고 해결하려고 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해결 방안을 내 안에 있는 마음에서 찾았다. 사상제가 간단해 보이지만 큰 혁명적인 어떤 통찰이다. 바깥에서 아무리 해결해봤자 고통 끝나지 않는다. 진정한 해결은 마음속에서 번뇌를 내는 마음, 욕망을 내고, 분노하고, 잘난 척하거나 하는 마음을 뿌리 뽑을 때 영원히 평화롭고 편안해진다. 밖에서 해결할 것이 아니고 안을 해결하라는 뜻이다. 아주 쉽지만 이런 통찰이 그전까지는 없었다. 이 통찰을 아무도 몰랐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대발견이다.

: 별상(別相)- 부정(不淨), (), 무상(無常), 무아(無我) / 총상(總相)- 무상, , , 무아

석가모니 부처님의 대발견은 멸도(滅道)의 발견이다. 그 방법까지 아신다. 고집은 인도 내에서도 외도에서도 다 아는 것으로 이 고집을 없애기 위해서 삼매를 수행했다. 하지만 삼매도 고의 세계의 일부이다. 왜냐하면 삼매가 무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무상이 고의 한 단면이다. 고가 네 가지 측면이 있는데 무상 고, 공, 무아(無我)이다. 고의 별상으로 부정, 고, 무상, 무아가 있고 고의 총상으로 무상, 고, 공, 무아가 있다. 이것이 고성제의 4가지 각론이다.

부정(不淨)은 ‘더럽다.’이다. 우리 몸이 죽으면 섞어서 없어지는 시체가 되니까 더럽다. 그다음 고(苦)는 모든 느낌은 괴롭다. 무상(無常), 마음은 항상 변한다. 무아(無我) 모든 법은 무하다. 모든 개념들, 내 생각 그 단어 하나하나는 전부 다 실체가 없다는 통설이다.

이 고의 각론을 별상(別相), 모든 걸 다 조합해서 총상(總相) 보면 무상(無常), 고(苦), 공(空), 무아(無我)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삼매도 무상하다는 것이다. 삼매에 올라가도 영원히 있지는 못한다. 언젠가는 떨어진다. 이때 무상은 미세한 무상이다. 일시적으로 좋기는 하겠지만 완벽한 무상은 아니다.

불교 외의 종교에서 고성제를 삼매를 통해서 고통을 해결하는 것이 고성제에 속에 들어가는 무상함으로 고를 해결하는 것인데 이것은 멸도(滅道)가 아니다. 불교만이 멸도이다. 집착과 번뇌를 제거해서 탐욕, 분노, 교만, 어리석음 등 모두 뿌리를 뽑을 때 고통이 사라진다. 이것이 '멸도'이다.

불교에서 뿌리를 뽑는 방법은 도를 닦는 것이다. 도를 닦는 것은 팔정도를 닦는 것이다. 계. 정. 혜, 삼학이다. 선을 닦는 것이다. 동물성을 완전히 벗어나서 윤리, 도덕 지킨 다음에 그 토대 위에서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다. 계와 정은 외도에도 있다. 외도에도 윤리, 도덕, 삼매가 있다. 여기에서 불교의 특징은 혜(慧)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공성의 지혜, 연기의 지혜이다. 모든 게 실체가 없다는 지혜는 불교에만 있다.

- 무아, 공성, 本來無一物, 십이연기의 환멸문, 사성제의 멸성, 반야

삼매에서는 실체가 있지만 공의 지에서는 실체가 없다. 불교의 수행의 목표는 혜(慧) 그러니까 모든 게 아무것도 없구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다. 선에서 말하는 지혜는 초기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의 지혜일 수도 있지만 공성의 지혜이기도 하다. 선의 지혜에서 말하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 아무것도 없다’는 지혜이기도 하다. 십이연기가 다 무너지는 지혜, 12연기의 환멸문이라고도 한다. 십이연기는 12가지 생존하는 모습인데 무명이 멸하면 12가지가 다 무너지는 것이다. 흥도 없어지고 식도 없어지고 명색도 없어지고 다 없어진다. 물론 존재론적으로도 내 생에 다시 태어나지 않지만, 인식론적으로도 행도 행이 아니고 식이 아니고 명색이 명색이 아니고 애가 애가 아니고 삶이 삶이 아니고 죽음이 죽음이 아니다.

죽음도 없고, 사람도 없고, 유도 없고, 지도 없고, 애도 없고, 수도 없고, 촉도 없다. 이것이 십이연기 환멸문이다. 깨닫고 나면 말을 해도 말을 하는 게 아니고, 행동해도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45년간 설법하셨지만 ‘한 말씀도 안 하셨다’는 무명이 무너진 당신께서 보신 것이다. 남이 본 것이 아니다. 남이 볼 때는 8만 4천 법문을 다 이야기한 것으로 보이지만 부처님은 한 말씀도 안 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명이기 때문에 말이 말인 줄 안다. 말이 말이 아니다. 말이 무엇인지 추론해 들어가면 정체불명이다.

혜는 공성, 본래무일물, 환멸문, 고집멸도의 사성제의 멸성제, 반야, 지혜이다. 다 무너지는 것, 다 없어지는 것, 세상 다 무너지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불교의 지혜이다. 더 이상 위가 없는 최고의 통찰이다. 인류 역사에서 그 어떤 종교의 사상도 이것은 몰랐다. 오직 부처님만이 발견하신 대발견이다. ‘아무것도 없구나’ 하는 발견이다. 잡아끄는 탐욕, 미는 분노, 그다음 아무것도 없기에 잘난 체하며 교만할 필요도 없다. 감성적 번뇌가 모두 사라진다.

사성제의 고집멸도에서 집은 탐욕, 분노, 교만이다. 도를 닦으면 반야, 지혜를 체득을 해서 집, 번뇌가 사라져서 마음이 편안해진다. 불교에서 깨달음은 황홀함, 대단함이 아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은 편안함이다. 그 이상 없다. 아무리 짜릿한 느낌이라도 반드시 무상하기에 다 무너진다.

누진통(漏盡通) 누진(漏盡)은 새어 나오는 것이 소진되었다는 뜻이다. 번뇌는 마음속에서 자꾸 새어 나오는 것인데 이제 새어 나오지 않는다. 교만도, 분노도 어리석은 생각도 없다. 이것이 다 소진되어서 누진통이다. 드디어 후야에 부처님이 되셨다. 가장 중요한 것이 마지막 누진통이다.

요약정리하면 부처님의 첫 설법이 중도 설법인데 그때의 설법은 실천적 중도다. 이 실천적 중도는 쉽게 말해서 선 수행이 바로 실천적 중도다. 그런데 왜 선에 대해서 중도라는 말을 붙이는 이유는 고행도 아니고 삼매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수행자들이 추구했던 고행도 배격하고, 삼매도 배격하기 때문에 그래서 중도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선은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가만히 보는 것이다. 이것이 선이다. 선을 다른 말로 번역을 할 때 사유수(思惟修)라고 혹은 뜻으로 정려(靜慮)라고 뜻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사유수(思惟修), 생각해서 닦는다는 뜻이다. 사유(思惟)는 생각하는 것이고 수(修)는 닦는 것이다. '곰곰이'가 생각이고 사유가 생각이다. 정려(靜慮)는 고요히 사유하다. 선의 뜻 번역어가 정려(靜慮)이다. 지(止)가 정이고, 관(觀)이 려(慮)이다.

불교 수행하려면 테크닉 쓰지 않고 그냥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자들 숨 보는 테크닉을 쓴다. 부처님은 본래 숨을 보라고 하지 않았다. 숨을 보는 수행은 나중에 부처님께서 부작용 때문에 할 수 없이 얘기하시는 것이다. 부처님은 처음에 어떻게 수행을 했을까? 그냥 곰곰이 생각하면 된다. 그렇다면 동기 유발이 어떻게 될까? 시체를 보면 정신이 번쩍 난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 스님들은 무덤에서 살았다. 인도 무덤은 그냥 시체를 버리는 곳이다. 그냥 시체를 싸서 놓으면 짐승들이 와서 먹기도 해서 뼈만 남게 되는 곳이 인도의 무덤이었다. 그런 곳에서 선승들이 죽음이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 수행했다. 내 몸도 이처럼 죽을 것이다. 이 느낌이 와야지 불이 들어올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은 오직 수행뿐이었다. 죽음의 고통은 인간이면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지만, 살아생전 한 번도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 이때의 수행이 부정관(不淨觀)이다. 이 수행을 심하게 하다 보니 이 몸뚱이에 대해서 지긋지긋한 마음이 들게 된다. 부정관을 심하게 해서 몸이 더럽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급기야는 살기 싫어져서 자살을 하게 된다. 스스로 목숨 끊기는 어려우니 백정 출신의 스님에게 부탁해서 자살을 하였다. 부처님이 밖에 나가셨다가 돌아와 보니까는 제자들이 얼마 남지 않아서 확인해보니 부정관 수행을 하다가 삶이 너무 싫어져서 모두 목숨 끊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때부터 부처님께서 계율을 정하시고 부정관을 금하신다.

살인죄는 바라밀 죄에 들어간다. 지금까지는 계율을 안 정했기 때문에 죄가 안 되지만, 앞으로는 사람을 죽이는 바라밀 죄는 승복을 벗고, 재출가도 하지 못한다는 계율을 만드신다.

《사분율(四分律)》이라는 율장(律藏, 팔리어: Vinaya Piṭaka 비나야 피타카)이 있다. 사분율은 우리나라 조계종 스님들 출가하실 때 규범 승단집 기준으로 비구 스님이 250계, 스님이 348계의 윤리 덕목을 받는다. 이 조항이 사분율이라는 율장에 근거한 것이다.

불교 수행할 때 제일 효과 좋은 것이 부정관이다. 시체 보면 시키지 않아도 수행을 한다. 효과가 강력해서 호흡보다도 크지만 부작용 때문에 부처님께서 중지시키고서 수식관을 설법하신다. 수식관은 부정관에서 부작용이 생기니까 할 수 없이 한 단계 낮춰서 인위적인 마음 집중법으로 만든 호흡 수행법이다. 동기 없는 사람들은 호흡 집중하려면 잘 안된다. 동기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위빠사나 유행도 근본이 무언지를 다시 한번 보고 해야 한다. 호흡도 물론 중요하지만, 호흡은 수단과 목적이다. 굳이 호흡을 보지 않더라도 상관없다는 말이다

요약정리하면 곰곰이 보는 중도의 수행을 통해서 발견하신 것이 연기법이다. 연기법은 중도 인과론이다. 십이연기가 중도 인과론이다. 무명과 행 ,식이 중도 관계다.

중도론은 중도 인과론과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 이 두 가지가 있다. 이 모두 외도이다.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은 상견(常見), 원인과 결과가 이어져 있다. 인중무과론(因中無果論)은 단견(斷見), 원인과 결과가 끊어져 있다는 견해이다. 둘 다 치우친 인과론이다. ‘인중 유가적 인과론’ 해도 되고, ‘인중 무과적 인과론’ 해도 된다.

무명(無明), 행식(行識)이게 다 원인 결과이다. 무명(어리석음)이 원인이 돼서 어리석기 때문에 온갖 행동을 하고 산다. 내가 했던 행동이 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남아 있다. 어디 남아 있을까? 목격자로 딱 한 사람 있다. 나의 행동의 목격자는 나이다. 내 마음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식(識이다. 마음이 내가 한 행동을 다 알고 있다. 내가 평생 했던 모든 행동들이 씨앗이 돼서 나의 마음속에 전부 저장된다.

식(識)이 귀신이다. 귀신이 어머니 뱃속에 들어와서 수정란과 결합해서 명색으로 큰다. 명색, 심신 복합체, 자궁 속에서 임신 5주가 되면 아직 그 기능은 못하지만 눈, 코, 귀가 생긴다. 10달 지난 후, 태어나면 세상이 느껴진다. 눈이 보이고 귀가 들린다. 출산 후 3~5일 지나면 사춘기 이전까지 고통과 즐거움을 느끼고 산다. 사춘기가 되면은 독자 생존하기 위해서, 생명을 낳기 위해서 강렬한 성욕과 욕망, 분노가 생기면서 싸움의 세계에 들어간다. 거기에 맞춰서 취(取), 살아간다. 이렇게 인생관과 세계관에 따라 평생 살다가 죽어야 그다음 내생에 다시 태어난다. 이것이 계속 반복되는데 이것이 십이연기이다. 십이연기. 12가지 인과 사실인데 이 12연기 하나하나가 다 인과 관계 이 관계이고 이 관계는 중도적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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