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관학의 개관
불교는 실천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실천에는 두 가지가 있다. 내가 깨닫기(見性) 위해서 하는 수행인 ‘깨달음을 위한 실천’과 가정생활, 사회생활, 직장생활 등 타인과의 관계 등 구체적인 삶 속에서의 실천이 있다. 이처럼 불교는 인간 각자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으로 배어 있어야지만 제대로 공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불교는 기독교 신앙처럼 종교를 ‘믿냐? 안 믿냐?’라는 표현보다는 ‘불교 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 표현에는 불교가 실천하는 종교라는 관념이 포함되어 있다. 이때 ‘실천’은 수행의 측면도 강하지만 사회적 실천도 있다. 그래서 수행의 중관학(中觀學)을 이 세계 속에서, 사회 속에서 어떻게 실천할지 함께 공부해보도록 하겠다.
불교의 교학 가운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교과서에 들어갈 만한 교학이 중관학이다. 일반 교과 과정에 들어갈 과목 중에 유식학(唯識學), 구사론(俱舍論)등은 불교의 종교적 색채가 너무 강해서 종교 편중적인 교과목이다. 그러나 중관학은 논법이기 때문에 불교 개념을 전혀 쓰지 않고도 공부할 수 있다.
중관학은 서양과 중국, 인도 등 외도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 다른 학문에는 찾아볼 수 없는 논법이다. 오직 불교 내에서만 있었던 논법으로 ‘해체의 논법’이다. ‘해체 논법(解體論法)’은 용수(龍樹: Nāgārjuna, 150~250경) 스님 이 개발하신 것으로 세계 유일한 불교의 논법이다. 이 중관 논법은 불교 개념, 불교 용어를 전혀 쓸 필요가 없다. 우리가 쓰는 일상 용어를 통해 논법을 알려주는데 이 논법이 불교의 핵심이다.
불교 공부에 입문하려면 제일 먼저 중관학 공부를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부처님 말씀으로 초기 불교의 가르침이지만 모든 학문에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 [Heraclitus of Ephesus, BC 540? ~ BC 480?]도 ‘사람은 한 번 들어간 강물에 다시 들어갈 수 없다.’라는 말을 통해 무상함을 이야기한다.
계속 흘러간다는 것, 계속 변한다는 것, ‘인생무상(人生無常)’은 불교를 몰라도 누구든지 아는 것이다. ‘참 세상이 덧없다.’ 말은 종교를 몰라도 일상에서 흔히 쓰는 말이다. 그런데 중관 논법은 배우지 않으면 절대 혼자 알 수 없다. 그래서 중관학은 가장 불교적인 사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초기불교(初期佛敎) 가르침이 부처님 근본 가르침에 가장 가깝다. 그렇지만 초기 불전(佛典)은 너무 간단하게 요약되어 있어서 실제 부처님 가르침을 깊이 알기는 어렵다. 그리고 초기 불전 아함경(阿含經) 니까야((Nikāya)는 체계가 없다. ‘대기 설법(對機說法)’ 즉, 상대의 근기(根基), 상대의 수준에 따라서 설법하셨기 때문에 어떤 때는 낮고 쉬운 설법을 하셨고, 어떤 때는 깊고 심오한 가르침을 폈다. 이렇게 가르침이 여기저기 섞여 있어서 무엇부터 공부해야 하는지 종을 잡을 수 없다. 그래서 《아함경》니까야((Nikāya)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냥 보면 길을 잃기 쉽다.
처음 불교 공부를 하려면 부처님 가르침, 즉 초기불전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아비달마(阿毗達磨) 교학(敎學)을 공부해야 한다. 아비달마(阿毘達磨) 구사론(俱舍論) 혹은 청정도론(淸淨道論)등이 초기 불교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아비달마 교학으로 불교 입문서이다.
온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지, 우주에 대해서 어떻게 얘기하는지, 생로병사, 삶과 죽음을 어떻게 얘기하는지, 인과응보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초기불전에 정리되어 있다. 문제는 그런데 아비달마 교학의 양이 너무 방대해서 어렵다. 그래서 불교 입문하기까지 최소 8년 걸린다.
옛날부터 일본에서 전승되는 말로 구사팔 년(俱舍八年), 유식 삼 년(唯識三年)이라는 말이 있다. 아비달마 구사론 공부하는 8년 동안, 하루 종일 구사론만 보면 비로소 구사론을 알기 시작하고 이렇게 구사론이 기본이 되면 유식학(唯識學)을 3년 더 추가해서 공부하면 불교 입문 공부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사팔 년, 유식삼년이다.
어떤 불교 경전이든 그것은 전부 불교의 일부일 뿐이다. 예를 들면 금강경(金剛經 )은 공사상(空思想) 일뿐이다. 인과응보 이야기는 없다. 삼천 대계 세계에 보시하는 것보다 무주상에 대한 자각을 하는 것이 더 공덕이 크다는 이야기가 있다. 내가 친구에게 잘해주면 보답을 받는 일대일 인과응보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일반적으로 90%90% 이상이 일대일 인과응보로 사는데 이것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화엄경(華嚴經)도 마찬가지이다. 보살의 위대한 어떤 행동, 서원은 있지만 우리 같이 번뇌 덩어리 즉 욕심이 있고, 화도 잘 내고, 짜증도 내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없다.
초보자에게는 먼저 인간이 되는 것부터 가르쳐야 한다. 물론 아함경에 있지만 정리가 잘 안 되어있다. 아비달마 교학에는 정리가 되어있다. 불교 공부하려면 먼저 인간부터 되고 나서 그다음 공부해야 한다. 깨닫는 것은 나중 이야기이다. 인간이 안 된 사람이 깨달음 추구할 때는 잘 난 체하는 교만심만 커진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마구니의 가르침으로 변한다. 인간이 안 된 사람이 깨닫는다고 할 경우 똑같은 부처님 말씀이지만 전부 다 마구니의 가르침이다. 주제넘게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칼을 쓰려면 칼을 다룰 줄 알아야 하고, 요리를 배운 다음에 요리를 해야 한다. 5살, 6살의 어린아이들에게 칼을 주면 다친다.
불교 공부할 때 초기불전이 중요하고 금강경이나 화엄경 등 각각 위대하고 그 스케일이 어마어마 하지만 불교의 한 부분만을 얘기하기 때문에 불교 전체를 조망할 수 없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비달마 교학이다. 기초인 인과응보부터 시작해서 꼭대기 아라한에 이르기까지 알려 주지만 그 양이 너무나 방대하고 어렵다. 이것을 일반 재가신자가 공부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중관사상은 공 사상인데 재미있고 논리적이며 너무나 매력적이다. 그렇다고 중관학만 공부하면 수준도 안 되면서 불교의 높은 부분 일부만 아는 것이 된다.
동아시아에 중관학이 들어와서 삼론학(三論學)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한다. 그래서 동아시아의 중관학을 삼론학이라 한다. 삼론학(三論學). 세 가지 논서에 의지하는 학문이라는 뜻이다. 삼론학의 이름은 사상보다 교재로 이름을 삼았다.《중론(中論)》, 《백론(百論)》, 《십 이문론(十二門論)》이 세 가지 논서에 의지해서 공(空) 성을(空) 파악하기 때문에 ‘삼론학(三論學)’이라고 부른다. '삼론학(三論學)'이 처음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가 사라지고 다시 부흥하게 되는데 '삼론학(三論學)'의 부흥 조가 고구려의 승랑(450~530경?) 스님이다.
삼론학《(三論學)=(中論)》,《백론(百論)》,
고구려 승랑(450~530경?) → 승전 → 법랑 → 길장(吉藏, 549~623)
섭산-서하사
동아시아의 중관학이 '삼론학'으로 이름이 바뀐다. 승랑의 제자가 승전이고 또 승전의 제자가 법랑이고 길장(吉藏, 549~623)이다. 길장 스님은 승랑 스님의 증손 제자이다. 승랑과 승전은 모두 은둔 수행자로 절에만 있고 밖에 나가지 않는다. 승전 스님 당시는 중국의 남북조 시대 양나라의 무제 시대(양무제)이다. 남북조 양나라의 양 무제가 승랑에서 승전까지 이어지는데 승전 스님 때에 양 무제가 죽어서 대혼란이 일어난다. 양나라의 수도인 남경이 완전히 초토화되어 절도 다 무너지고 먹을 것이 없어서 인육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양무제가 죽고 양나라가 망할 때 승려들이 승랑과 승전이 있는 섭산의 ‘서하사’라는 절로 피신을 한다. 여기에서 수많은 스님들이 승전의 가르침을 듣게 되었다. 난생처음 듣는 가르침이라 그 가르침의 출처를 확인해보니 고구려 승랑 스님의 가르침이었다고 전해진다. 승전의 가르침을 받은 스님의 수가 소털처럼 많았는데 이 중에서 가르침의 정수를 받아들인 스님은 소의 뿔처럼 적었다고 하는데 그중 하나가 법랑 스님이다.
승전 스님이 가르침을 펴면서 ‘내가 편 가르침인 삼문학, 즉 중관학의 가르침을 밖에 나가서는 알리지 말라.’고 말한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함부로 전하지 말고 비밀로 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무아(無我=내가 없다는 것, 이기심이 없다는 것)를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있다는 착각을 하므로 욕심이 생기고, 화도 내고, 잘난 척도 한다. 그래서 무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공사상(空思想)을 가르치면 사람을 망치기 때문에 위험하므로 이 가르침을 전하지 말라고 기록에 있다.
공 사상만을 공부하면 위험하다. 공을 잘못 공부해서 드는 병을 공(空) 병이(空) 들었다고 공병(空病)이라 한다. 공에 잘못 떨어졌다고 해서 낙공(落空)이라고도 한다. 공병의 증상은 가치 판단 상실로 선과 악을 모른다. 막행막식(莫行莫食), 아무 행동이나 막 하고 아무거나 막 먹는다.
어쨌든 불교 전체를 알기 위해서는 아비달마 교학을 공부해야 하지만 이번 학기 강의는 불교 전체 중 하나인 공 사상에 대해 강의하겠다.. 내가 지금까지 갖고 있던 세상을 보는 사고방식이 빈틈이 있고, 엉터리구나 하는 것을 자각하게 해 준다. 시험을 보기 위한 지식 강의가 아닌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공이 무언지를 체득할 수 있도록 강의하겠다. 학기 전반 중간고사 전까지는 불교용어 쓰지 않고 일상적인 용어로 중관학이 무엇인지, 중관학의 논리가 뭔지에 대해서 훈련할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 생각을 비판하는 것이 중관학이다. 우리는 지금 다 생각하고 있다. 중관학에서는 그 생각이 다 엉터리라는 것을 폭로한다. 그냥 엉터리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고 왜 엉터리인지 논증한다. 그 논증을 들어보면 하나하나가 다 맞다. 그래서 나중에 세상 전체가 다 허물어진다. 그전까지는 확고하게 하늘이 저기 있고, 땅이 있고, 나는 살아 있고, 삶이 있고, 죽음이 있고, 그다음에 인생이 있고, 우주가 있고, 비가 있고, 바람이 불고, 꽃이 피고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것이 다 엉터리라는 것이다. 그 꽃도 피지 않은 것이고, 비도 내리지 않고, 하늘과 땅이 없고 그다음에 우주도 없다. 그다음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일체 아무것도 없구나’하는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훤하게 눈을 뜨고 살아 있는 이 지금 순간에 세상 끝까지 간다는 이야기이다. 세상 끝이 로켓 타고서 올라가면 있는 것이 아니다. 타임머신 타고 과거로 들어가면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 끝은 내 인식의 끝이 세상의 끝이다. 내 ‘인식의 끝’, ‘앎의 끝’이 세상의 끝이다. 세상에 다 있는 줄 알았는데 그 세상이 다 무너져버린다. 지금 여기 바로 이 순간에 세상 끝을 만날 수 있다. 그렇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중관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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