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론의 개념실체성 비판 개론
미-추:아름답다-못생겼다. 대-소:크다-작다. 장-단:길다-짧다. 생-사: 살아있다-죽는다. 총명-우둔: 똑독하다-우둔하다. 부유하다-가난하다. 이것은 모두 상대 개념이기 때문에 연기의 종류가 여러 가지가 있다. 을 비교하는 연기이다. 연기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이렇게 상대 개념을 비교하는 연기도 있고, 상인대(相因對) 즉 서로 인이 되어서 의지한다는 대립 개념을 가지고 얘기하는 연기가 있다. 대립 개념을 갖고 얘기하는 연기는 노자 『도덕경』에서도 이야기한다. 노자의 『도덕경』도 상-하, 높고 낮음의 대립 개념을 가지고 사물의 실체가 없다는 이야기를 한다. 노자. 장자도 불교에서 추구하는 진리 비슷한 것들이 나온다. 서양 철학자들의 책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불교의 핵심을 무아(無我)라고 얘기하는데 장자에 보면 성인은 무기(無己)다라는 말이 있다. 성인은 자기가 없다는 뜻이다. 자아, 내가 없다는 말이다. 이기심이 없고 자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아설이다. 이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나 하면 장자에 달통하신 탄허 큰스님이 법문하실 때 원효 회통사상이다. 불교 바깥의 성인들의 가르침을 배격하지 않으신다. 장자, 노자를 외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장자에 보면 성인은 무기(無己)다라는 말을 인용하시면서 이것이 무아설이 아니면 무엇이냐며 호통을 치신 적이 있다. 이렇게 불교 바깥의 종교 성인 같은 경우에도 불교 비슷한 얘기를 하는 게 많다. 그런데 차이점은 연기법까지 수렴하지 못한다. 불교만이 부처님만이 연기법의 발견자이고 연기법, 연기에 의해서 모든 게 도출되는 것이 불교이다.
불교는 연역의 종교이다. 연역법이 있고 귀납법이 있다. 귀납은 경험적 진리이고 연역은 분석적 진리이다. 연역은 결론 먼저 난 다음에 그것에 근거해서 어떤 여러 가지 각론을 이야기한다. 귀납은 아직 답은 모르지만, 한참 경험한 후에 알게 되는 것이다. 먼저 아는 것은 연역이고 나중에 아는 것은 귀납이다. 분석적 진리는 먼저 아는 것이고 나중에 아는 것은 경험적 진리이다. 선험적, 후험적이라고 해도 된다. 선험, 후험, 연역, 귀납, 분석, 종합 촉진이라고 해도 된다. 그런데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성도, 깨달음이 이때 완성된다. 그래서 연기법을 깨달으신 다음부터 나온 모든 가르침은 그 연기법에서 도출된 내용들이다. 연역의 종교이다. 실제 세상 끝까지 간 분은 연역의 종교이고, 실제 연기법이 아뇩다라삼약삼보리 (阿廳多羅三觀三普提) 공성이고 또 동전의 양면이다. 연기법은 긍정적 측면이고 공성은 부정적 측면이다. 여기에 근거해서 모든 가르칠 인과응보, 수행론, 가치관, 세계관, 인식론, 존재론 전체 모든 것이 다 도출된다.
공자, 노자, 장자, 서양의 칸트, 헤겔의 책을 읽다 보면 진짜 불교 비슷한 것이 많다. 그런데 차이점은 연기를 모른다. 연기법이 진리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얼핏 얼핏 그 편린을 볼 수 있다. 여러분도 연기법 볼 수 있다. 뉴스에서도 가끔 연기법을 말한다.
지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하니까 세계 경제가 흔들린다. 왜냐하면 다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연기법의 하나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것이 연기에 전부는 아니다. 100분의 1밖에 안 되는 모습이기는 하지만 누구든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은 연기의 편린, 조각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을 글로 써놓은 게 서양 철학자들과 동양의 성인들이다. 연기법까지 말씀하시는 분은 오직 부처님 한 번 분뿐이다.
부처님 제자에는 세 가지가 있다. 성문(성문), 연각(緣覺), 보살 이렇게 삼승(三乘), 세 가지의 길이 있다.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 성문의 길, 연각의 길, 보살의 길이 있다. 연각은 (緣覺) 연기법을 깨달은 분으로 독각(獨覺)이라고도 한다. 독각(獨覺)은 불교는 모르지만, 이 세상에 부처님이 계셨다는 것을 전혀 모르지만 혼자 종교적 철학적 의문을 품고 깊이 사색하며 살아가다가 연기를 발견한 분들이다. 이런 분들을 독각불, 독각 부처님이라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소크라테스 같은 서양 철학자나 공자, 노자 같은 분들이 사실은 다 부처님의 제자이지만 연기법 끝까지 못 가고 연기를 추구했던 분이기에 독각불은 아니다. 그래서 독각 행자(獨覺行者),(獨覺行者 독각수행자(獨覺修行者)라고 이름을 붙였다. 독각 행자는 불교를 몰라도 된다. 서양 철학자 서양 종교인 중에서 아무 전제 없이 세상을 통달했던 사람들, 철학자, 서양 과학자, 뉴턴, 아인슈타인 모두 독각 행자들이다.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하다가 비슷하게 온다. 뉴턴이 발견한 작용 반작용이 모두 연기법이다. 불교학의 범위는 모든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을 다 포함한다. 기독교 신학에 근거해서 어떤 학문을 하는 게 아니고 전제 없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하는 분들이 모두 독각 행자이다.. 우리가 앞으로 불교의 품을 넓혀야 한다. 불교학이 아니고 불학(佛學,Buddhology)이다. 불학과 대립되는 것이 신학이다. 신학에는 기독교 신학, 힌두교 신학, 샤머니즘 신학이 있다. 접신의 학문(Theology), 신학은 계시의 학문이다. 불교, 불학은 다른 말로 각학(覺學)이다. 뜻으로 번역하면 각의 학문이고 음으로 번역하면 불학이다. 각(覺)은 마음에서 솟아 올라오는 것이다. 신학과 방향이 반대이다. 위에서 내려오는 접신이 아니고, 내 마음에 불성이 있어서 누구든지 부처님을 임신하고 있다. 여래장, 누구든지 남자든 여자든, 아이이든 어른이든, 인간이든 짐승이든 모두 여래장을 가지고 있다. 여래장, 여래의 태를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서 깨달음이 올라온다는 것이다.
강의 듣거나 책을 읽다 보면 ‘아, 그렇구나’하고 불교에 대한 통찰이 점점 깊어진다. 왜 그런가 하면 내가 원래 알고 있던 것이기 때문이다. 원래 모르는 것은 아무리 이야기해도 이해 안 된다. 마음속에 불성이 있어서, 원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맞아, 맞아’ 하는 것이다. ‘아, 그렇구나’ 하는 것은 우리는 마음속에 근본 통찰 가지고 있다. 그 깨달음을 추구하는 학문이 불학이고, 불교학일 수도 있고, 넓히면 철학, 과학,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소, 장단은 노자의 『도덕경』에도 나온다. 이것 역시 연기법의 일부이다. ‘성인은 무기(無己)다’ 장자에도 나오는 말이다. 불교 무아설 비슷한 얘기, 불교의 연기법 비슷한 얘기가 외전에도 일부 나오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런 분들이 부처님은 아니다. 연기에 끝까지는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교의 교리 전체는 연기법에서 발견되고 도출된 것이다.
서양 철학자, 과학자, 사상가들은 독신이 많다. 철학과 사상에 몰두하면 이성에 대한 음욕이 끊어진다. 출가해서 스님이 되실 때 의도적으로 이성에 관심을 멀리하고, 수행을 해도 되지만 이것은 계. 정. 혜의.정. 삼학이다. 계를 먼저 지키고 음욕을 끊어버린 다음 삼매에 들어가서 지혜를 개발하는 순서를 밟아도 되지만, 거꾸로 사상적으로 항상 정혜쌍수(定慧雙修)를 하고 살면, 진정으로 철학과 과학, 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살면 음욕이 끊어지고 욕심이 없어진다. 탐욕도 없어지고, 분노도 없어져서 계가 저절로 갖춰진다. 이것을 불전에서 도공계(道共戒)라고 한다.
칸트, 비티겐슈타인, 아이작 뉴턴, 플라톤은 결혼하지 않았다. 오직 사상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 수행할 때도 이 경지가 되어야 한다. 하루 종일 나의 관심 분야가 무슨 욕심, 이익이 아니다. 오직 생각, 오직 의심이고, 세상이 뭔지, 내가 누군지, 오직 그 생각만 한다. 항상 모든 게 다 호기심이고, 모든 것을 알고 싶고 그러면은 음욕이 저절로 다 끊어지고 아예 관심 자체가 없다.
도공계(道共戒)는 도와 함께하는 계이다. 그다음 정공계(定共戒)는 삼매와 함께하는 계이다. 여기서 도(道)는 지혜이다. 정(定)은 삼매이다. 계-윤리, 도덕부터 지키고 정-삼매를 닦아도 되지만 진심으로 삼매에 들어가고 진심으로 자나 깨나 내가 왜 태어났나, 내가 누굴까, 세상이 무엇일까 하고 지적인 의심의 답을 구하려고 평생을 노력하는 사람은 계가 저절로 갖춰진다. 음욕이 저절로 끊어지고, 탐욕, 욕심이 끊어지고, 재물욕이 끊어지고, 명예욕이 끊어진다.
그리스 철학자 견유학파의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소원이 뭐냐는 질문에 그림자 때문에 햇빛을 볼 수 없으니 비키라고 하였다. 디오게네스는 길에서 잠을 자고 전혀 욕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깊은 사유 속에 살았기 때문이다.
불교 수행이든지 진짜 불자로 살려면 이 정도까지 가야 한다. 억지로 계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억지로 계를 지키는 것은, 기왓장을 갈아서 지붕을 만드는 것만큼 힘들다.
수행할 때 호흡을 왜 보는가? 처음에 부처님께서 절대 호흡을 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냥 시체만 보게 했다. 시체가 버려져 있는 묘지에서 수행하게 하였다. 묘지의 시체를 보면서 수행하면 나도 저렇게 될 텐데 하고 죽음과 공포심과 더불어 온 우주가 무너진다. 오직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중요한 건 동기이지 호흡이 아니다. 중요한 건 동기이지 계가 아니다. 계를 어기라는 말이 아니다. 호흡을 보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수단과 목적을 바꾸지 말라는 말이다.
불교 수행하고 공부하고 교학 학문을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의문, 알고 싶은 욕구, 그 탐구력이 중요하다. 그러면 나머지는 저절로 갖춰진다. 그래서 계에도 도공계(道共戒), 정공계(定共戒)라는 불전의 가르침이 있다. 서양 사상가들 진짜 뛰어난 분들은 다 독신이다. 시켜서 그런 게 아니고 저절로 그렇게 된다.
미-추, 대-소, 장-단, 생-사, 총명-우둔, 부유-가난. 이런 식의 대립 개념은 실체가 없다는 것을 파악하기가 쉽다. 그러나 어려운 것도 있다.
반야심경이 부처님의 말씀, 진리인데 여기에서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눈이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참 이상한 이야기이다. 반야심경 독경하면서 이것은 왜 그럴까? 하고 의심을 품어야 한다.
학문적으로도 향상하고, 수행의 깊이가 깊어지려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정직해야 한다.
불교의 계중에서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평소의 글도 마찬가지고 논문 표절하는 것도 다 거짓말이다. 남의 글을 자기 글처럼 속이는 것도 다 거짓말이다. 거짓말을 많이 하면 어리석어져서 바보가 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머리 좋은 것이다. A인데 B로 보고, B인데 C로 보면 머리가 나쁜 것이다. 2+3=5인데 4라고 이야기하면 머리가 나쁜 것이다. 거짓말이 몸에 배니까 세상이 계속 거꾸로 보이고 이상하게 보인다. 그러다가 바보가 되다. 현명해지고 싶으면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정직해야 한다.
반야심경 보다가 눈이 없다 할 경우,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다음부터 진도 나가지 말고 생각해야 한다. 실제 이런 분이 계셨다. 동산 양개 스님이다. 양개 스님이 동진 출가해서 처음에 반야심경 독경을 배웠다. 그런데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에서 막힌다. 그래서 스승에게 ‘눈이 여기 있는데 왜 눈이 없다고 합니까?’하고 여쭈니 그 은사 스님이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큰 그릇이 왔다며 다른 곳으로 보냈다. 이렇게 정직한 분이 큰 그릇이다.
물리학자 아인슈타인도 자기가 연구할 때는 항상 어린애 같은 마음을 품었다고 말한다. 몰라도 아는 척하지 않고, 모르면 모르는 것, 어린애처럼 정직하면 커진다.
양개 스님이 처음에 품었던 의문이 반야심경의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할 때 무안(無眼)이었다. 스승이 답을 못해서 다른 스님에게 보고 이후 수행해서 조동종의 시조가 된다. 양개 스님의 어록을 뒤져 보아도 눈이 없는 걸 알았다는 말은 없다.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용수 스님의『중론』에 왜 눈이 없는지 아주 간단명료한 답이 글자로 한 줄로 나와 있다. “눈이 눈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원래 경문에는 “눈이란 것은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이다. 이것이 왜 눈이 없는 것에 대한 답이다. 그래서 눈이 없다. 이것이 끝이다.
눈은 자기 눈을 자기가 볼 수 없다. 손이나 팔, 코, 안경, 달력 등은 보이지만 눈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면 눈은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 아주 정직한 이야기이다. 간단명료 아주 명쾌하다.
용수 스님은 대보살이시기 때문에 이 정도로 간단하게 얘기하셨는데 우리는 이해가 잘 안 된다.. 이 답으로도 가슴이 시원하지 않다.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 반박해 보아야 한다. 눈을 보려고 하면 스스로 눈을 볼 수는 없지만 ‘거울에 비추면 보인다!’하고 반박할 수 있다.
강의의 맥락을 잠시 이야기하면 지금은 개념 비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개념 비판 가운데 ‘연기이기 때문에 공 하다. 눈이 연기했기 때문에 눈도 공 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개념 비판이 끝나면은 판단 비판을 이야기할 것이다. 판단 비판이 끝나면 추리 비판을 이야기할 것이다. 이 3가지를 쉬운 예를 들어 설명할 것이다. 지금은 아직 개념 비판, 반 논리학의 개념의 실체성 비판에 대한 설명을 눈을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어제는 16개의 개념을 ‘연기했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하고 설명했었고 지금은 17번째로 눈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눈의 실체가 없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미-추, 대-소, 장-단, 생-사는 조금만 생각해도 ‘그렇겠구나’ 하고 알 수 있는 쉬운 문제이다. 이것은 외부 세계에 실재하는 게 아니고 내 생각과 머리가 만들었구나. ‘마음이 만들었구나’ 하고 알 수 있다. 그런데 ‘눈도 마음이 만들었다’하는 것은 좀 어렵다. 틀림없이 반야심경에는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눈이 없다는 말이 있다. 여기에 양개 스님, 고익진 교수님 이런 분들이 의문을 품었다는 스토리를 이야기했다. 두 분 다 속 시원한 답을 안 냈는데 『중론』에 답이 있더라는 이야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이 답에 만족하면 안 되고, 불교는 내가 이해되지 않으면 절대 수용하면 안 된다. 내가 납득이 안되면, 수용하지 말라고 말한다. 불교의 수행은 문(聞-듣는 것).사(思-생각하는 것, 곰곰이 따져보는 것), 수(修-실제 체험하는 것) 3행이다.
문(聞=독讀), 눈이 없다는 경전의 가르침을 듣고, 사(思) 곰곰이 따져보면 ‘거울에 비추면 보인다’하고 반반할 수 있다. 이것이 틀렸다. 왜냐하면 거울에 비친 눈은 안근이 아니라, 색경(色境)에 속한다. 색경은 시각 대상이지 시각 작용이 아니다. 색이 시각 대상이다. 시각 작용은 여기 있고 시각 대상은 반대쪽에 있다. 거울에 비친 눈은 시각 대상이 된다. 안근(눈)이 있으면 그것에 상대해서 색경(형상)이 있다. 이(耳,귀)가 있으면 성경(聲, 소리)이 있다. 이렇게 6가지 지각 기관이 있고 6가지 작용 대상이 있다. 작용이 대상을 파악한다. 그런데 거울에 비치는 눈은 대상의 세계에 속하지, 작용의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실제 눈 이기 위해서는 보는 힘-눈의 본질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물을 생각할 때 머릿속에 떠오른 물은 물이 아니다. 말로 ‘물’이라고 할 때도 그것은 실제 물이 아니다. 실제 물은 축축해야 한다.
그리고 ‘불’이라고 할 때 이것은 머릿속에 떠오른 개념이지 실제 불이 아니다. 뜨거워야 불이다. 이렇듯이 눈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눈은 실제 눈이 아니다. 보는 힘이 있어야지만 눈이다. 그런데 거울에 비치는 눈은 보는 힘이 있는 눈이 아니라 보이는 대상이다. 그래서 없다는 이야기다. 거울에 비친 눈은 안근이 아니라 색경이다.
눈을 다른 또 용어로 사용하면 눈은 보는 작용이기 때문에 능히 본다는 능견(能見)이라고 부른다. 색경, 보이는 대상을 소견(所見)이라고 부른다. 거울에 비친 눈은 능견이 아니라 소견의 세계이다. 그래서 거울에 비친 눈은 진정한 눈이 아니다. 거울에 비친 눈을 보는 것은 색깔을 보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의문을 품을 수 있다. 눈을 손으로 만져 보면 만져지는 것이 있다. 이것은 눈이 아닌가? 이것은 촉경(觸境)이다. 손으로 만질 때 손은 신근(몸)이다. 이 신근의 대상은 촉경(촉감)이다. 촉감이지 보는 눈이 아니다. 만져도 눈이 아니고 거울에 비친 눈도 진정한 눈이 아니다. 진정한 눈은 보는 힘을 갖는 것인데 보는 힘은 아무리 뒤져봐도 없다.
“눈이 눈을 볼 수 없기 때문에”는『중론』, 제3장 관육정품의 첫 문장이다. 여기에서 눈을
“능견은 능견을 볼 수 없다”라고 바꿀 수 있다. 능견은 주관적 측면이고 소견은 객관 대상이다. 주관이라고 하면 범위가 넓다. 능견만이 아니고 능문(듣는 것)도 주관이다. 이렇게 눈이 있는 줄 알았는데, 없어진다. 눈이 어디에 있는지 입증할 수 없다. 진짜 없다. 진짜 눈이 없어진다. 이렇게 증발시키기가 어렵다.
지난 시간에 강의를 통해서 16가지의 개념을 논파하였지만, 강의 끝나고 보니 세상만사가 다 보이고 다 있는 것 같다. 하나도 변화한 것이 없다. 왜 그럴까? 16가지 개념은 논파하기가 너무 쉽다. 그러나 어려운 것들은 내가 맺혀 있기 때문이다. 맺혀 있는 것을 불교 전문 용어로 속박되어 있다고 한다. 탐.진.치 가운데 치심의 번뇌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잘못 보는 인지적 번뇌에 속박되어 있다.
『중론』, 중관학은 이렇게 하나하나의 개념을 논리적으로 끝까지 분석해서 실제 있는지 따져서 모두 증발시키는 학문이다. 벽돌깨기 게임처럼 하나하나 분석을 통해서 모두 깬다. 이렇게 공성을 체득하게 하는 것이 중관학이다. 단점은 분석을 통해서 하나하나 깨야 하므로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러나 장점은 남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공에 대한 체득을 객관화시킬 수 있다.
이렇게 분석을 통해서 공을 체득하는 것 말고 직관을 통해서 공을 체득하는 것도 있다. 이것이 간화선이다. 선은 화두 들고 있다가 화두 타파할 때 그냥 생각이 모두 다 한 번에 무너져 버린다. 이런 분은 그냥 직관한다. 그런데 이것은 언제 올지 모른다. 마치 낚싯대 담고 고기가 물릴 때까지 기약 없이 기다리는 것이라 객관화시키지 못하고 주관적이다. 누군가 본인이 깼다고 주장해도 그것을 확인할 길이 없다.
하여간 불교 수행에는 직관의 방법이 있고, 분석의 방법이 있는데 중관학은 철저한 분석의 방법을 통해서 반야 지혜를 열리게 한다.
이제 눈이 사라졌다. 이제는 보이는 대상에 대해서 보이는 대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 능견이 사라지기 때문에 소견도 증발해 버린다. 능견이 있으면 소견이 있다. 내가 눈(능견)이 있으면 저것이 보인다고 말을 하지만 능견이 사라지면 저것도 보인다고 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큰 방이 있으면은 어떤 방이 작다고 한다. 그런데 큰 방을 지워버리면 어떤 방도 ‘작다 할 것이 없다’하는 말이다. 연기이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어지니까는 저것도 없다. 능견이 없어지니까 눈이 없어지니까는 소견도 없다.
지금 눈에 보이는 모니터, 벽 등이 이전까지는 보이는 대상, 시각 대상인 줄 알았는데 알고 나니까 시각 대상이라 할 것도 없다고 자각하게 된다. 그래서 색경도 사라진다는 말이다.
안근이 사라지기 때문에 색경도 사라진다. 다시 말해 능견이 사라지기 때문에, 능견이 존재할 수 없기에 소견도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에 관해서 뭐가 보인다. 내 눈에 보인다. 이런 말을 쓰는 게 엉터리라는 말이다.
‘눈에 대상이 보인다’ 할 때 눈과 대상과 보이는 작용, 3개의 개념, 단어를 쓰지만 우리가 무언가를 볼 때 셋으로 나눠지지 않는다. 나눌 수 없다. 그냥 하나의 사건, 한 덩어리의 사건이다. 그냥 시야만 나타난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의 말과 생각이 분별이 보는 것을 3개의 개념으로 잘라서 문장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분별이다. 원래는 볼 때는 나눠지지 않는 한 덩어리 사건이다. 이것을 생각의 가위, 분별이 싹둑싹둑 잘라서 눈이 있고 대상이 있고 보는 작용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지금 따져보니까 눈이 확인이 안 된다. 그러면 시각 대상도 사라진다. 눈과 시각 대상이 있어야지만 보는 작용을 할 텐데 눈과 지각 대상이 사라지면 작용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보는 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안근도 사라지고 색경도 사라지고 안식도 사라진다.
게송을 보겠다.
3-2) 是眼則不能 自見其己體 若不能自見 云何見餘物
시안즉불능 자견기기체 약불능자견 운하견여물
눈이란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 (=눈)을 볼 수 없다.
스스로를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
3-2) svamātmānaṃ darśanaṃ hi tattameva na paśyati/
na paśyati yadātmānaṃ kathaṃ drakṣyati tatparān//
실로 보는 작용은 자기 자체를, 즉 그것 (=눈 자신)이 그것 (=눈 자신)을 보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 그것이 어떻게 다른 것들을 보겠는가?
눈이 자기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눈이 사라지고 시각 대상도 없어진다. 아무리 멀리 있는 풍경을 바라보더라도 그것을 보는 게 아니고 망막의 스크린에 비친 것을 보는 것이다. 자기의 살을 보면서 본다고 하는 것이다. 귀에 들리는 소리도 자기 살에 변화를 느끼는 것이다. 세상의 전체가 육근, 감각기관이라 해도 된다.
불교는 세상에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에 엎었다, 매쳤다, 합했다가 나눴다가 반대로 한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는 내가 여기 있고, 내 마음이, 이 몸통이 있고, 저것은 바깥에 있고 이런 식의 착각을 최면시켜서 세례를 해서 퍼뜨린 것이 지금 이 시대의 문명이다. 이것을 다 격파하고 끝가지 들어가야 한다. 그때 세상이 다 무너진다. 이 시대에 속지 말아야 한다. 천년, 만 년 지나도 마찬가지다. 이 시대는 참 특수한 시대다. 굉장히 특이한 시대다. 이렇게 생각하고 생명의 본질, 인식의 본질, 앎의 본질로 자꾸 들어가야 한다.
“눈이란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 (=눈)을 볼 수 없다.”는 당연히 못 본다. 그래서 눈이 증발했다. 이제 확인했으니까 눈이 없어졌다. 이제 앞에 있는 것에 대해서 시각 대상이라고 할 수 없다.
눈이 있고 시각 대상이 있어야지만 둘이 관계를 맺어서 본다고 할 수 있는데 눈도 사라지고 시각 대상도 사라지기 때문에 ‘본다’는 말을 할 것도 없다.
“스스로를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 는 안근 비판이다. “다른 것” 은 색경 비판이고 “보겠는가?”는 안식 비판이다. 안근, 색경, 안식-눈, 시각 대상, 보는 작용, 이 3가지가 다 세상에서 없어진다. 다시 보면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그냥 콸콸 흘러가는 무상한 점의 흐름이다. 내가 어디를 보느냐에 따라 초점이 계속 이동하는 것이다.
세상 전체가 그냥 콸콸 흘러가는 흐름이다. 지금 이쪽으로 봤다가 저쪽을 봤다가 다시 이쪽을 본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쪽 봤다가 저쪽 봤다가 다시 여기를 볼 때 다시 여기가 아니다. 지나간 다음이다. 항상 새로운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까 있던 이 전화기의 모습이 그냥 그대로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내가 다시 전화기를 본다고 말을 잘못하고 산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전화기도 흘러가고 있고 모습이다. 지금 보고 있는 모니터도 계속 흘러갔기에 또다시 볼 수 없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살면서 한 번도 내가 똑같은 걸 본 적이 없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실제 진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든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불교 모를 때는 똑같은 전화기, 똑같은 연구실이라고 하면서 산다. 우리의 언어와 생각은 먹고살기 위해 만든 것이다. 진화과정에서 먹고사는데 만들어진 것이 언어와 생각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먹고 사는 것을 넘어선, 삶과 죽음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래서 먹고사는 데 쓰는 생각은 내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이 불가능하다. 이것을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 중관학이다.
중관학을 공부하다 『중론』의 귀경게(歸敬偈) 제일 첫 번째 게송에 나오는 말이 불상부단(不常不斷), 항상 이어진 것도 아니고 끊어진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연기에 대한 묘사가 불상부단이다. 이것이 실제 세상이다. 그런데 우리가 불상부단의 실제 세상에 대한 통찰을 갖고 살아가면 나중에 굶어 죽든지 잡아 먹히든지 한다. 왜냐하면 항상 불상부단, 이어진 것도 아니고, 끊어진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옛날에 호랑이 한 마리가 산에서 내려와서 마을 사람 하나를 잡아먹었다. 다음 날 또 그놈이 또 내려왔다. 이때는 도망가야 한다. 그런데 도망가지 않고 모든 게 무상하기에, 어제 호랑이가 아니기 때문에, 잡아먹지 않을 수도 있다고 그냥 있다가는 그냥 잡아 먹힌다. 세상을 살아갈 때는 상견, 단견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먹고 살 때 쓰는 것이 상, 단이다. 어제 만났던 친구를 또 만나서 보면 같은 사람이다.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 반갑게 악수하고 얘기 나눈다. 그런데 불교에서 가르친 통찰대로 모든 게 무상하니까 다른 사람이구나 하고 누구세요? 하면 말이 안 된다.
그러니까 지금 얘기하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쓰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고 일상을 초월한 삶과 죽음, 인생과 우주에 관한 이야기이다. 먹고 살 때 쓰는 진화과정에서 만들어진 언어를 인생, 우주, 삶, 죽음 여기에 적용해서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다 폭로하는 것이다. 우리의 말 자체가 실제 실상에 대해서는, 실상 실제 모습에 대해서는, 얼마나 말과 생각이 엉터리인지 그것을 폭로하는 것이 중관학이고 불교 전체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거꾸로 세상에서 잘 살려면 상, 단: 같다-다르다, 이어졌다-끊어졌다는 식의 흑백논리, 이분법적인 생각을 해야지만 남에게 잡아 먹히지 않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이것도 헷갈리면 안 된다. 상견, 단견이 중요하다. 이어졌다는 견해, 끊어졌다는 견해. 호랑이가 ‘지금 사라졌구나, 없어졌구나’ 하는 생각들이 중요하다. 상, 단은 흑백논리가 아니라 이분법적 사고방식이다..
눈은 대상을 스스로 온전히 볼 수 없다. 보이는 것만 본다. 가시광선만 본다. 대상에 대해서도 가시, 눈에 보이는 광선만 지금 우리 눈에 보인다. 자외선, 적외선은 우리 눈에 안 보인다. 스마트폰 전파도 마찬가지다. 파장의 떨림에 따라 장파, 중파, 단파, 극초단파, FM 라디오 등 전자기파도 빛과 똑같다. 전자기파 가운데서 먹이와 관계되어서 우리에게 쓸모 있는 것만 보인다. 벌은 자외선도 본다. 왜냐하면 자외선이 벌의 먹이 꽃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눈은 실제 진화과정에서 먹는 것, 위험을 피하는 것을 파악하는 지각 기관으로서 대상을 온전히 보지 못한다. 지금은 눈의 구조적 한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중관 논리는 가시광선이 비쳐서 눈에 들어온 가시광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대해서 본다는 말과 눈이라는 말을 붙이지 말라는 것이다. 눈이라는 개념, 시각 대상이라는 개념, 본다는 개념, 그 단어들이 세상에 실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눈에 한계가 있어서 미세한 것도 못 보고 자외선을 못 보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크게 오해한 것이다. 지금 말하는 것은 중관학의 논리를 말하고 있다.
보는 것도 정밀하게 분석해야 한다. 그냥 본다고 하면 안 된다. 눈이 볼 때는 Saccade 운동=안구비약운동을 통해서 본다. 후두엽의 뇌를 보고 있다고 해도 말이 된다. 세상만사가 다 나의 뇌의 모습이라고 해도 된다. 그렇다고 이것이 옳다는 것도 아니다. 이 중에 어느 것을 잡아도 말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 현대 문명에서는 귀에 들리는 것은 바깥의 소리를 듣는 거고, 눈에 보이는 것은 바깥의 모습을 보는 것이라고 규정해 놨기 때문에 이 객관주의 최면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망막을 본다. 혹은 고막의 변화를 느낀다. 혹은 나의 뇌를 보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뇌든지 망막이든지 바깥 대상이든지 시각 현상이 일어나게 만드는 여러 가지 조건 중 하나일 뿐이다. 뇌가 세상의 중심은 아니다. 뇌도 조건의 하나이다. 뇌도 여러 가지 다양한 조건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여러 가지 조건들이 모여서 내가 체험하는 세상만사가 나타나는데 그런 나타난 세상만사가 있게끔 하는 다양한 조건 가운데 그냥 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뭘 본다고 할 때 엄밀히 말하면 우리의 주의력을 어디에 뒀냐에 따라 모습이 달라진다. 주의력은 75분의 1초 동안만 한 곳에 머물 수가 있다. 『아미달마구사론』에서는 한 찰나 길이가 75분의 1초이다. 결론만 말하면 우리의 마음이 한 점이다. 세상의 크기도 한 점이고 우리의 각자의 마음도 한 점이다. 이 한 점이 요동을 치면서 구성하고 넓은 세상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냥 대충 경에 쓰여 있는 것을 보고 지내는 것이 아니라 인식, 삶, 죽음 등 끝까지 들어가서 끝장을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다 잊고 그냥 숨만 쉬는 것이 아니다. 끝까지 파고들면 끝까지 다 알 수 있고 세상과 끝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뭘 본다고 할 때 지금까지 이야기했듯이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는 엄청나게 복잡한 요동이 있다.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의 입체감, 주의력이 작동해서 본다는 것이 생긴다. 그냥 동시에 눈에 보이는 시야를 볼 수 없다. Saccade운동=안구비약운동을 통해서 본다. 안구도 운동하고 주의력도 후두엽, 시각 중추에서 요동치면서 움직인다.
주의력이 동시에 세상을 느끼는 게 아니고 주의력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서 왔다 갔다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른손은 뜨거운 물, 왼손은 찬물에 담갔다가 한 1분 있다가 꺼낸 후 주의력을 어디에 두는지에 따라 차가운 느낌이 드는지 뜨거운 느낌이 드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게송에서 보면 중관 논리적으로도 눈도 없고 시각 대상도 없고 보는 작용도 없다. 그것은 그냥 콸콸 흘러가는 현상의 흐름이지 뭘 본다는 말을 붙일 수 없다. 세상 만상이 다 흘러가기 때문에 여기를 봤다가 저기를 봤다가 즉 여기를 본다는 말, 그런 생각이 다 틀린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지금 이 1시간 강의를 통해서 봄(보다, 시각, 눈)의 세계가 모두 끝장이 난 것이다. 이제 눈이 없기에 앞으로 눈에 뵈는 것이 없다.
중관학이든, 불교의 가르침을 통해서 끝장 보고 나면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다. 다 알기 때문에. 모호한 것이 없기에 뭐든지 다 알 수 있다. 세속에서든 도를 닦는 곳이든.
다들 세상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모호하게 산다. 내가 있다. 네가 있다. 이 속은 맛이 짜니, 덜 짜니 이렇게 산다. 짠맛이 뭔지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면서 산다.
이런 논리를 통해서 우리의 인식, 앎의 세계와 존재의 세계, 생명의 세계의 끝을 보면 세상에 관한 모호함이 없기에 편안하다.
눈이 없다에서 하나 더 추가하겠다. 눈, 시각 대상, 보는 작용도 증발했다. 이제 16가지에서 19가지 개념이 내가 사는 세상, 내가 보는 세상에서 열반에 들어갔다. 다 증발하고 사라졌다. 벽돌깨기 게임하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다. 뜨거운 불이 있다. 반야심경에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아무것도 이야기한다. 육조 혜능 스님의 말씀 가운데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는 말이 있다. 본래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까 불도 없고, 물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 뜨거운데 불도 없다. 『중론』제10장 관연가연품(觀燃可燃品)에서 불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연(燃)은 타는 것 불이고, 가연(可燃)은 태워지는 것, 연료이다.
불교 공부할 때 생각이 중요하다. 생각하기 전에 먼저 경부터 봐야 한다. 경을 보지 않고 자기 생각만 많이 하면 줄 끊어진 연습은 그냥 막 혼자 날아 가버린다. 반드시 경과 논과 독서를 많이 하면서 생각을 해야지만 길을 잃지 않는다. 생각하라고 해서 혼자 생각만 자꾸 하면 줄 끊어진 연처럼 된다. 경과 부처님 가르침에 근거해서 이 진리를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을까 하면서 생각에 들어가면 절대 길을 잃지 않는다.
문. 사. 수에서. 서양 철학자 같은 이론을 대지도론에서는 광혜(誆慧)-속이는 지혜, 미친 지혜라고 한다. 전혀 수행 없이 그냥 머리 굴려서 생각만 하는 것이다. 또는 전혀 경과 논을 보지 않고 자기 생각만 하는 것을 광혜(誆慧)라고 한다. 미친 철학을 하면 사람이 이상해진다.
곰곰이 생각하고, 생각을 깊이 하면서 사는 것은 중요하지만 반드시 경과 논에 의지해야 한다. 경, 론에 의지에서 생각해야 하는데, 경, 론을 보려면 한글을 알아야지만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경론의 문자가 원래 한글이 아니다. 한문 번역이든지 티베트어, 범어 혹은 팔리어이다. 남이 번역한 것을 아무리 봐도 오역한 것을 보면 내가 오해할 수 있다. 나중에 독자적인 불교학을 공부하겠다면 경론의 원문을 내가 직접 볼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사전 보면서 단어 찾아서 문법 익힌 다음에 해석을 확실하게 할 수 있으면 된다. 그래야 경, 논을 해석해서 그것을 근거로 진리인지 따져보고 그 가르침을 소화해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불교학을 깊이 있게 공부하려면 한문은 기본이고 현대 언어는 영어, 일본어, 이 3가지 언어는 공부해야 한다. 영어, 일본어, 범어, 티벳어, 팔리어 공부하면 불교학자가 된다.
경과 논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내가 직접 해석하고, 이것을 근거로 자꾸 깊이 생각해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 현대적으로 되살리는 작업을 하면 좋은 연구를 많이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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