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관학은 반(反)논리학인데 제일 첫 단계가 개념의 실체성 비판이다.
큰 방-작은 방, 아름다움-추함, 부유함- 가난함, 삶-죽음 그리고 눈-시각대상 등 개념의 실체성을 논파하였다.
용수((Nāgārjuna)
인도 남부 지방에서 바라문 계급으로 태어났다. ‘대승불교의 아버지’라거나, ‘모든 대승 종파의 스승’이라고 불린다.
저술: <중론> - 총 450여 수의 Śloka(4×4조의 음절시)로 이루어진 철학적 게송 모음집
그 외 <회쟁론>, <육십송여리론>, <공칠십론>, <광파론>, <대지도론>, <십이문론> 등
이 있다.
공을 공부하려면 『중론』과 『회쟁론』을 보면 된다. 『중론』은 공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회쟁론』은 공에 대한 비판을 반박한 것이다.
1.중관학의 탄생 – 소승 아비달마 비판
초기불교
↓ ↓
↓ 아비달마 = 소승 = 부파불교
↓ ↓ ↓
□ □ 대승 > 반야경 > 중관학
법공(法空): 교법을 대하는 태도(法有)를 시정
중관학: 초기불전의 연기설에 근거하여 반야경의 법공을 논증
불교 내에서의 중관학의 탄생. 부처님의 설법만 있었던 초기 불교의 시대가 있었다. 이 초기불전의 가르침을 체계화시키는 작업이 아비달마-법에 대한 체계적 해석-이다. 법에 대한 체계적 해석이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해석한 사람마다 그 내용이 다 다르다. 이 분쟁으로 인해 종파가 갈라진다. 아비달마 불교는 부파불교가 된다. 교리는 거의 똑같은데 1% 정도가 다르다. 후대에 가서 법 갖고 싸우는데 초기 불전에서 부처님이 법은 뗏목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왜 뗏목을 가지고 싸우냐? 하면서 뗏목 가지고 싸우지 말라며 대승이 나타난다. 이것이 반야경의 법공사상-법은 다 공 하다-이다. 그래서 반야심경 전체가 불교를 부정하는 이야기이다. 무고집멸도, 무십이연기, 무오온 등 모든 것을 부정한다. 비방이 아니고 그 뗏목 타고 열반의 언덕까지 왔으면 뗏목에서 내려서 가는 길을 가라는 것이다. 법의 뗏목에 앉아 있지 않고 뗏목에서 내려서 언덕 위로 올라오라는 것이다. 반야경의 핵심은 뗏목을 버리라는 것이다. 뗏목을 가지고 사는 사람을 소승이라고 불렀다. 소승의 목표는 부처가 아니고 아라한이다. 우리는 대승, 부처라고 하였다.
대승불교의 반야경에 나오는 공 사상을 논증하는 학문이 중관학이다. 법공이 반야경에서 가르치는 사상인데 이것을 논증하는 것이다. 초기불전의 연기설에 근거해서 반야경의 법공을 중관학에서 논증한다. 불교 내적으로는 초기불 교의 법에 대한 집착을 시정하는 것이 중관학이다. 불교 교학 가운데 불교 밖에까지 나가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보편학문의 성격을 갖는 것이 중관학이다. 반(反)논리학이기 때문이다. 불교 용어 전혀 안 쓰고도 이해시킬 수 있는 학문이 바로 중관학이다. 중관학은 불교용어를 쓰지 않고도 실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일반 학문과 교류할 수 있다. 일반 학문 내에서도 중관학적인 사유가 있다. 수학의 토대를 연구하는 수학 기초론이다. 수학의 한계를 폭로하는 학문이 수학의 기초이론이다.
심리적 사유, 합리성의 극을 달리는 게 수학이다. 이것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금부터 한 몇 년 전부터 서양 수학자들이 생각하였다. 수학의 토대를 다루는 학문을 창시했는데 그 방식이 중관학 방식과 같다. 《역설과 중관 논리》라는 논문이 있다. 역설과 중관논리를 비교한 논문이다.
중관학의 두 측면
1.특수학문으로서의 중관학 - 소승 아비달마 비판. 초기불전의 연기설에 근거하여 반야경의 공 사상을 논증한다.
2.보편학문으로서의 중관학 – 반논리학으로 인간의 논리적 사유 전체를 비판한다.
보편 학문으로서의 중관학-반논리학: 보편 학문이 될 수 있는 것이 중관학이다.
논리학과 비교할 때 저 논리학 대응시켜서 반 논리학. 개념도 실체도 없고, 판단은 사실과 다르고, 추론은 타당하지 않다. 이게 중관학이다.
[개념의 실체성 비판]
환멸(還滅)연기: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
“비가 내린다.”는 판단에서 내림이 없으면, 비가 없고 비가 없으면, 내림이 없다.
개념의 실체성 비판의 토대는 환멸연기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는 부정적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긍정적 방식으로 표현하면 논리적 오류에 빠진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이렇게 표현하면 틀린다. 연기법을 표현할 때 ‘긴 것이 있으면, 짧은 것이 있다’고 하면 틀린 말이다.
짧은 것이 왜 짧게 보이는가? 내가 긴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원래 짧은 건 없다.
또 어떤 방에 들어갔을 때 방이 크다. 그것은 내가 작은 방을 염두해 두었기 때문이다. 작은 방에 의존해서 큰 방이라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그래서 큰 방이 실체가 없고 공하구나 하고 연기를 이해하는데 그 연기법을 말로 표현할 때 작은 방이 있기 때문에, 큰 방이 있다고 표현하면 또 논리적 오류에 빠진다.
큰 방은 작은 방을 염두에 뒀기 때문에 작은 방에 의존해서 큰 방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큰 방울을 있게 만든 토대가 되는 작은 방이 원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작은 방은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생각 속에 큰 방을 염두해 두었기 때문이다. 큰 방의 존재를 규정하기 위해서 작은 방을 근거로 삼았는데 그 근거로 삼았던 작은 방이 이전에 벌써 큰 방을 또 염두해 있다. 악순환에 빠진다. 닭알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처럼 답이 없는 악순환의 오류에 빠진다. 논의가 안착하지 못하기 때문에, 논의가 정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논의가 정착해야지만이 근거, 토대가 확고한 이론이 될 수 있다. 연기법도 긍정적으로 표현해서 설명하면 논의가 안착하지 못해서 근거가 나오지 못한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문제가 없다. 큰 방이라는 게 원래 없기 때문에 작은 방도 원래 없는 것이라고 하면 논리적 오류가 없다. 그래서 중관학의 모든 논법의 토대는 부정적으로 표현된 환멸 연기법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 내림이 없으면 비가 없고, 비가 없으면 내림이 없다. 내림 없는 비는 없고, 비 없이 내림은 없다. 주체 없이 내림만 있는 것은 없다.
비가 내린다는 판단은 이미 내림을 가지고 있는데 비가 내린다고 또다시 내림을 이야기해서 의미 중복의 오류에 빠진다. 비가 내린다는 오류의 토대가 내림이 없으면 비가 없고, 비가 없으면 내림이 없다는 연기법이다.
중관학의 모든 논법이 연기법이다. 주어가 없으면 술어가 없고 술어가 없으면 주어가 없다.
연기 공식에 이것저것에 주어, 술어를 대입한 것이 아니다. 연기법에 근거해서 중관 반논리학의 모든 논법이 응용되어서 나타난 것이다.
중관학의 4구 비판의 토대가 바로 환멸 연기이다. 4구 판단 각각은 증익, 손감, 상위, 희론의 오류에 빠진다.
반야심경
…
是故空中
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
[색즉시공: 형상(색)에는 실체가 없다.(공)]
색(色): 물질/형상 공(空): 실체가 없다
Ex) 큰 방은 원래 큰 방이 아니다
‘왜 형상의 실체가 없는가?’의 가장 좋은 예가 큰 방-작은 방이다. 색즉시공의 제일 좋은 예이다. 용수 스님이 설명하신 공에 대한 논법으로 설명해야 한다. 큰 방-작은방의 예로 공을 설명할 때 가장 옛날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 정확한 공에 대한 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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