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업/중관학노트

화엄적 논법: 마음, 부처, 밥, 똥, 강도(개념의 실체성 비판)

by 마음길 2022. 7. 3.
반응형

https://cdn.pixabay.com/photo/2016/02/10/21/57/heart-1192662_960_720.jpg

 

마음

마음이 무엇인가? 왜 모든 것이 마음인가? 지금 보이는 것이 내 살이 변한 게 풍경인데 내 살도 뇌가 변한 것이다. 뇌에서 마음이 작동한다. 그래서 일체가 다 마음이다. 조금 전에는 일체가 다 물질이 었는데 지금은 일체가 다 마음이다. 일체유심조는 마음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일체를 해석한 것으로 한 단계 낮은 것이다. 불경에 보면 가장 높은 통찰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아니라 경식구민(境識俱泯)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체를 오직 마음이 만들었다. 불교인들이 귀에 못이 박히게 많이 들은 말이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모두 다 마음이 만들었다. 다른 말로 유식무경(唯識無境): 오직 마음만 있고 대상은 없다. 귀에 들리는 소리도 다 내 마음이 변한 것이고 눈에 보이는 모습도 다 내 마음이 변한 것이지 그 대상은 없다. 전체가 일체유심조이다.

 

유식무경(唯識無境): 모든 것이 마음이고, 대상이 없다. 그러면 마음도 성립하지 않는다. 뭔가 마음 아닌 게 있어야지만 이건 마음이구나 하고 말 할 수 있다. 그런데 근데 세상 전체가 다 마음이다. 마음 아닌 게 없다. 그러면 마음이라는 개념도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큰 방이 있어야지만 작은 방이 성립하는데 큰 방이 없어지면은요 작은 방이라는 것도 없다. 이와 똑같이 마음 아닌 게 있어야지만 이건 마음이구나 하고서 특정을 할 수 있는데 유식무경(唯識無境):오직 다 마음뿐이고 대상이 없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다 마음이 만들었다. 다 마음이다. 하면 굳이 마음이라는 말을 붙일 것도 없다.

 

마음 아닌 것이 있어야지만 이것은 마음, 이것은 마음 아닌 것이라는 분별이 가능하다. 그런데 다 마음이라면 마음 아닌 것이 없기에 마음이라 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경식구민(境識俱泯)은 대상도 사라졌지만, 마음도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경식구민이 유식무경보다 더 높은 통찰이다. 유식무경보다 더 낮은 통찰은 일반 사람들, 유식유경(有識有境):마음도 있고 대상이 있다.-이다. 주관과 객관이 다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일반인들의 유식이다. 마음도 있고 대상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불교의 유식 교리로 올라가면 이것 조차도 내 마음이 만들었구나 한다. 이것이 유식무경(唯識無境)이다. 여기서 한 단계 더 올라가면 경식구민(境識俱泯): 모든 게 마음이라면 마음이라는 것도 없다. 대상도 사라졌지만, 마음도 사라진다. 그래서 언어가 끊어진다는 것이다. 통찰이 3단계로 되어 있다. 이 통찰은 동아시아 불교에서도 이야기하지만, 학파 가운데 유가행중관파의 통찰이다. 후대에 유식과 중관학파가 결합하는 일이 생긴다. 이것을 보통 후기 중관파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에 소속된 논사는 산따락쉬따, 까말라쉴라가 있다. 티벳에서 중국 마하연의 화상과 까말라쉴라가 삼예논쟁을 벌이는데 이를 계기로 티벳에 중국의 선불교가 사라지고 인도 불교로 바뀌게 되었다.

 

모든 게 마음이 다 할 때 지금 보니까 왜 마음인지 이해가 된다. 혹시라도 이해가 안 되면

유식무경(唯識無境)을 유경무식(唯境無識): 오직 대상만 있고, 마음은 없다-으로 이해해도 된다. 같은 말이다.

 

유식무경(唯識無境)은 식이라는 마음 하나의 개념에 의해 세상만사를 설명한 일원론이다.

유식유경(有識有境)은 이원론이다. 마음과 대상, 주관과 객관 두 가지 원리로 세상을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식무경은 하나의 원리로 세상을 설명하는 일원론이다. 유경무식(唯境無識)도 일원론이다. 똑같은 현상에 대해서 다 풍경 대상이라고 하면 유경무식이고 다 마음이다 하면 유식무경이다. 어쨌든 일원론이라는 관점에서는 의미가 같다.

 

유식무경이 잘 이해가 안 되면, 유경무식이라고 해도 된다. 배고프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이것은 내 마음대로 안 된다. 내 바깥에서 일어난 일이다. 갑자기 머리가 가려운 것도 바깥에서 일어난 일이다. 갑자기 어제 먹은 도넛이 떠오른다. 이것도 바깥에서 일어난 일이다. 모든 것이 다 바깥 풍경이라는 통찰이 가능하다. 이것이 유경무식의 통찰이다. 이것이 유식무경과 같다.

 

모든 것이 마음이라고 할 경우, 마음이 무의미해지기에 경식구민 대상과 마음이 모두 사라지고 거꾸로 모든 게 다 풍경이라 할 경우, 모든 것이 다 풍경이다. 풍경 아닌 것이 없다 그러면 풍경이라 할 것도 없다. 풍경이라고 말을 붙일 것도 없다. 풍경이 사라진다. 그러면 다시 경식구민이 된다.

 

불교 공부할 때 모든 것이 마음이라는 마음 병에 걸리면 안 된다. 모든 게 마음이라 할 경우,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사람이 되기 쉽다. 모든 게 마음이라는 것도 낮은 차원의 이야기다. 더 올라가면 경식구민, 마음이라 할 것도 없다는 통찰까지 가야 한다.

 

사실 통찰이라고 말할 것도 없다. 그냥 모든게 마음이다 아니다.’ 라는 말을 하지 않고 오직 자비심으로 남을 도와주고 행동할 뿐이다. 교화와 자비의 삶을 살 뿐이다. 이것을 이론화해서 어떻다 떠올리지 않는다.

 

부처

부처가 무엇일까? 깨달은 사람. 2600년 전에 인도 땅에 계셨던 그분이 부처님이라고 할 경우, 금강경의 저자가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만일 몽뚱이로 나를 보는 사람은 삿된 길을 가는 사람이다.-라고 야단을 친다. 부처님 걸어갔을 때 저분이 부처님이라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3280조를 가지고 즉 훌륭한 관상을 가지고 있는 그런 분을 부처님이라 할 경우, 전륜성왕도 부처가 돼야 하리다 하고 금강경에서 이야기하셨다. 겉모습 가지고서 부처님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진짜 부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한번 추구해 보자. 옛날 큰 스님들께서 다 추구하셨다. 부처 아닌 것이 없다. 세상 다 부처님이다. 우리가 부처님 몸속에 산다. 이것이 화엄경의 가르침이다. 부처의 정체를 추구해서 끝장을 본 경전이 화엄경이다. 다 부처님이다. 들리는 소리는 모두 부처님의 음성이고, 보이는 산하 대지의 모든 모습은 부처님의 몸이다. 우리가 그 몸속에 산다. 이것이 화엄경이다. 부처가 뭐냐? 일체가 부처다.

 

어떤 개념이든 하나하나 추구해서 정체를 갖다가 알아내면 전부 다 이 개념의 테두리, 그 범위가 다 무너지고 무한으로 확장된다. 마음도 일체이고 무한이다.

 

밥이 무엇일까? 입에 들어갔다가 변으로 나오는 게 밥이다. 입에 들어갔다가 에너지 주고서 나와버린다. 먹으면 에너지만 흡수되고 나머지는 다 나와버린다. 그 에너지 흡수하는 게 밥 먹는 것이다. 그렇다면 입으로만 에너지를 흡수하는가? 아니다. 산소 에너지도 코로 들어가서 다시 코로 이산화탄소로 나온다. 그러면 눈으로 보는 것도 밥 먹는 것이다. 빛 에너지가 눈으로 들어간다. 소리 듣는 것도 소리 에너지가 들어가는 것이다. 시각을 통해서 들어온 에너지가 나에게 소화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기억에 남는다. 이것이 눈으로 밥 먹는 것이다. 그러니까 눈으로 뭘 파악하는 것, 소리를 들어서 알아채는 것 이것이 다 에너지, 밥 먹는 것이다.

 

경에 보면 밥의 종류가 네 가지가 있다. 우리가 먹는 밥을 단식(段食)-덩어리로 먹는 밥이라고 한다. 그 다음은 촉식(觸食), 감각하는 것,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이 모두 밥 먹는 것이다. 그 다음이 사식(思食) 생각, 그리고 식식(識食)우리의 마음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 사식은 초기불전의 석가모니 말씀이다. “밥에는 종류가 네 가지가 있다. 사식이 있는데 중생은 사식을 먹고 산다. 그 사식은 단식이 있고 ,촉식이 있고, 사식이 있고 ,식식이 있다.”

 

우리가 아침, 점심, 저녁 세 끼 먹는 것은 단식이고, 눈으로 보는 것과 강의 듣는 것은 촉식이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전부 다 밥이다. 일체가 다 밥이다. 그다음에 색계중생-하늘나라-은 단식이 없다. 입으로 먹지 않는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생각하는 것이 밥이다. 에너지를 갖고 살아간다. 욕계, 색계, 무색계에서 색계는 우리 같으면 고기 몸뚱이가 아니다. 고기로 몸이 돼 있는 놈들만 간식 덩어리 밥을 먹고 살고 몸이 빛으로 돼 있으면 밥도 보는 것, 듣는 것, 생각하는 것, 인식하는 것이 밥이다.

 

일체가 밥임을 알 수 있다. 일체가 밥, 우주가 일체가 어디든지 우주고, 모든 것이 다 시계이고, 모든 행동이 욕심이고, 모든 게 시작하고 있고, 모든 게 끝나고 있고, 모든 게 물질이고 유물론, 모든 게 살덩어리, 모든 것이 마음인 일체유심조, 모든 분들이 다 부처님이고 산하대지가 다 부처님이다. 모든 게 밥이다. 모든 게 똥이다.

 

똥이 무엇인가? 똥은 더러운 것인가? 아니다. 똥을 먹는 강아지도 있다. 제주도에는 똥을 먹는 똥돼지도 있다. 똥은 더럽다는 똥의 정의가 안 된다. 똥이 나쁜 것이라고 정의해도 안 된다. 밭에 뿌리면 다 거름이 된다. 똥이 뭐냐? 단순하다. 입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똥이다. 재료가 들어갔다가 뭉쳐서 나온 것뿐이다. 이것이 똥의 정의이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똥이다. 집 지을 때 처음에 철근 콘크리트 시멘트, 물 이런 게 들어가서 집을 뚝딱뚝딱 지어서 집이라는 덩어리가 생겼다. 집도 똥이다. 건물도 똥이다. 컴퓨터도 똥이다. 똥이 뭐냐 할 때 정의를 못 내린다는 것이다. 더럽다. 깨끗하다 할 수 없다. 그러면 똥이 뭐냐? 다 똥이다.

 

강도

강도가 뭐냐? 뺏기고 싶지 않았는데 강제로 뺏어가는 것이 강도이다. 나는 그냥 갖고 싶은데 세월이 흐르면서 젊음을 빼앗기고, 시간을 빼앗아 간다. 과거 전부를 빼앗겼다. 내가 뜻하지 않는데도 지금, 이 순간도 다 빼앗기고 있다. 그러니까 세상이 강도다. 통찰이 되면 시가 나온다. 모든 게 다 강도다. 모든 보이는 것은 나의 시선을 뺏고 있고, 들리는 소리는 나의 귀를 뺏고 있고 시간은 나의 지금, 이 순간을 뺏고 있다. 다 강도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