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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중관학노트

13강 종합 요약: 중관학의 화엄적 논법

by 마음길 2022.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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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관학의 반논리학에서 중관학 논법만 가지고 개념의 실체성을 비판하면 어려울 수 있다. 중관학에서 개념의 실체성을 비판하려면 반드시 어떤 개념이든 그 개념이 묶여 있는 매듭을 찾아야 한다.

 

큰 방과 맺혀있는 매듭은 작은 방이다. 큰방은 작은 방과 비교해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내리는 비를 해체하려면 내림과 비가 매듭이다. 내림이 없으면 비가 없고, 비가 없으면 내림이 없다. 불을 논파하려면 연료가 매듭이다.

 

연기는 반드시 두 개 이상 발생한다. 연기의 반대말이 고기(고립적으로 일어난다)이다. 불경에 세상 만사 가운데 고기하는 것은 없다.’고립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모든 것이 연기이다. 연기하는 것을 알아야지 그래서 공하구나 하고 공을 알 수 있다.

 

연기를 알려면 반드시 연기에 매듭을 찾을 수 있어야지 한다. 큰 방의 실체가 없다는 것을, 공하다는 것을 알려면, 작은 방이 대립상임을, 즉 매듭을 잡아야 한다. 눈이 없다는 것을 알려면 시각 대상, 보이는 것이 매듭임을 알아야 한다. 그 매듭을 잘못 찾기 때문에 풀 때는 그것이 어렵다. 그래서 개발한 것이 화엄의 일즉일체에 근거한 논파법이다. 집요하게 하나의 개념에 대해서 추구에 해 들어가면 그 개념의 테두리가 다 무너진다.

 

우주가 모든 것이고, 시계가 모든 것이고, 욕심이 모든 것이기 때문에, 우주가 시계가 된다. 수학 문제 공식과 같다. ab이고 cb이다. 그러면 a가 곧 c가 된다. 철수가 원래 이름이 영남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았던 영길이가 영남이다. 그러면 철수가 영길임을 안는 것과 같다. 그냥 산수 문제이다.

우주가 모든 것이고, 시계가 모든 것이니까 우주가 시계가 된다. 시계가 모든 것이고, 욕심이 모든 것이니까 욕심이 시계가 된다. 그 우주가 시계가 되고, 시계가 욕심이 되고, 욕심이 시작인데 시작은 물질이고 물질이 살이다. 살이 마음인데 밥이 똥인데 부처님은 마른 똥 막대기이다.. 부처가 똥이다.

 

선어록에 나온 이야기이다. 선승의 오도송, 선문답에서 언어가 무너지는 것이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세계이다. 실재의 세계에서는 언어가 다 무너진다. 언어가 질서 정연하고,, 생각이 사고가 질서 정연한 세계는 다 엉터리 세계이고 내가 만든 가짜이다.

 

끝까지 추구해서 들어가서 결론을 보면 생각이 다 무너진다. 세상이 끝이다. 생각의 끝이 세상의 끝이다. 왜냐하면 세상을 이해할 때 항상 생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끝을 보기 위해서 로켓을 타고 하늘 끝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내 생각의 끝을 내가 자각하면 세상에 끝난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열반이다. 세상 자체가 지금 열반에 들어 있다. 세관과 열반은 한 치의 차이도 없다. 용수 스님의 중론25장 관열반품에 나온다. 앞에서 연습 문제 푼 다음에 결론부에 가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지금 극락에 살고 있다. 우리는 지금 모두 열반에 있다. 누구나 부처님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중관학을 공부하고 나면 내가 세상의 중심이고, 내가 절대자이고, 나 혼자만 사는 것’ 임을’ 알게 된다. ‘세상에 우르르 무너지니 이제 부처가 되었구나.’ 할 수 있게 된다.

 

어떤 개념이든 하나 잡아서 집요하게 추구하면 반드시 그 테두리가 무너진다.

 

모든 것이 기호이다. 모든 것이 욕망이다. 모든 것이 물질이다. 모든 것이 마음이다.’하는 것은 과학적 발견이 아니다. 우리의 사유의 작동 법칙이다.

 

불교 전문 용어로 보문(普門)의 법칙이다. 문이 어디든지 있다는 뜻이다. 들어가는 문이 컵에도 있고 우주에도 있고, 시계에도 있고, 욕심에도 있다. 무한대와 무한소가 상직하는 문이다. 모든 것이 무한으로 열려 있다.

 

우주가 무엇이냐 할 때 원래는 하나의 개념이었다. 따져보니 무한이다. 보문이다. 시계가 무엇이냐? 추구하니 시간이 보문이다. 보문의 위치가 다시 말해 무한소와 무한대가 일치한다는 결합한다는 깨달음의 이치가 세상만사에 내재하고 있기에 어떤 개념이든 끝까지 갈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은 사유의 작동 법칙이다.

 

서양학자들은 기호가 뭐냐? 하고 추구하다가 모든 것이 기호구나하고 하나만 알게 된다. 그러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그냥 하나, 일원론자 즉 하나의 원리로 세상을 해석하는 사람일 뿐이다.

 

불교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모든 게 우주고, 모든 게 시계니까, 우주가 시계고, 시계가 욕심이고, 화두 공안의 경지로 올라간다. 그러면 세상이 다 우르르 다 무너진다. 바로 열반이다. 세상이 무너지는 게 열반이다.

 

주역에 보면 음양도 있고, 사상, 무극, 태극이 있다. 무극은 극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무인극'이라는 뜻이다. 무가 끝이다. 공성과 같은 말이다. 무와 극이 동의어이다. 무로서의 궁극이라는 뜻이다. 무극이 태극과 같은 말이다. 태극에서 음양이 나눠지면서 세상이 나타난다. 주역의 64괘튼 세상 모든 만사는 64가지 패턴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즉 세상만사를 64가지의 패턴으로 정리한 것이 주역이다. 64가지 패턴은 여러 군데 적용할 수 있다. 음식물, 인간 세상사, 천문 등 어디든 적용할 수 있다.

 

비유하자면 상중하가 방에도 있고, 컵에도 있고, 내 입 속에도 있는 것처럼 그 원리를 어디든 적용할 수 있다. 주역의 64가지 원리가 어디든지 다 있다는 뜻이다. 이와 똑같이 화엄에서 말하는 무한대와 무한소의 상직, 상입 어디든지 있다. 이것이 보문이다.

 

여러 가지의 개념으로 무한으로 나가는지, 무한으로 열리는지 보는 것이다. 시계가 뭔지 추구하다 보니 이게 무한으로 열린다. 이렇게 하나하나 논파하면서 세상 끝으로 가는 것이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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