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봉스님의 오도송(깨달음의 노래)]
海底燕巢鹿胞卵 해저연소록포란 火中蛛室魚煎茶 화중주실어전다
此家消息誰能識 차가소식수능식 白雲西飛月東走 백운서비월동주
“바다 밑 제비 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타는 불 속 거미집에 물고기가 차를 달이네.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흰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
효봉스님은 1988년 평양에서 출생하시고, 1913년 일본 와세다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고, 귀국 후 우리나라 최초의 판사로 임용되었다. 속명은 이찬형이다. 1923년 한 피고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후 ‘인간이 인간을 벌하고 죽일 수 있는가’라는 회의에 빠져 법관직을 버리고 3년 동안 전국을 방랑하셨다. 1925년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에서 출가하시고 1958년 조계종 종정 추대되신다음 1966년 표충사에서 입적(入寂)하셨다. 효봉스님께서 문무관에서 1년6개월 간화선 ‘無’ 화두를 들고 깨닫고 나서 지으신 오도송이 있다.
“바다 밑 제비 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타는 불 속 거미집에 물고기가 차를 달이네.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흰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
바다 밑에 날아다니는 제비 집이 있고, 그 제비집에 알을 낳지 않는 사슴이 있고, 바다 밑 물속에 사슴이 있다. 그리고 타는 불 속에 거미줄이 있고 그 타는 거미줄에 물속에 사는 물고기가 차를 달이고 있다. 달은 원래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데 거꾸로 가고 있다. 이것은 깨닫고 나서 보니 예전까지 보았던 것이, 다 거꾸로라는 뜻이다. 세상이 다 뒤 집어진다.
오도송은 시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해설이 아니고 감상이 필요하다. 이럴 수 있겠구나하고 느낄 수 있다.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점 속에 우주가 들어가고, 점 속에 컵이 들어가고, 컵 속에 나의 안경이 들어간다. 그 안경 속에 사탕이 들어간다. 사탕이 안경에 들어가고, 안경에 컵이 들어가고, 내가 컵에 커피를 마신다. 이렇게 말해도 사실과 일치합니다.
이것이 오도송의 경지고 오도송이 이상한 말들을 꾸며놓은 것이 아니라 사실과 일치하는 통찰을 써놓은 것이다. 다만 일반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을 끝까지 집요하게 추구해서 모든 것이 우주가 되고, 모든 것이 시계가 되고 모든 것이 육신이 되고, 모든 것이 시작이 되는 통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이것이면서 저것이라는 상직의 세계이다. 컵이면서 욕심이고, 욕심이면서 우주고, 우주이면서 시계이다.
중관학의 사구를 이야기하면 인도 불교는 ‘a도 아니고 b도 아니다.’ 4구이고 중국 동아시아 불교는 ‘a면서 b이다.’ 3구이다. 1구, 2구가 ‘있다. 없다.’는 흑백논리이다. 인도 불교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는 제4구를 가지고 1구와 2구의 분별을 깨준다. 그런데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있으면서 없다.’는 상직, 제3구를 가지고 1구와 2구의 분별을 깨준다.
그래서 이 오도송의 내용이 ‘있으면서 없다’는 중첩, 즉 바다와 하늘에 사는 것 제비집이 중첩하고 포유류와 알을 낳는 제비, 조류가 중첩하고, 불에 타는 것과 거미집이 중첩하고 물고기와 차가 중첩한다. 이 중첩은 이론이고 이것을 시로 나타낸 것이 효봉 스님의 오도송이다.
오온을 이야기할 때 색=형상/물질, 수=느낌, 상=생각, 행=의지, 식=마음을 말한다. 오온은 세상을 이루고 있는 구성 요소 전체이다. 반야심경에 보면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라는 말이 있다. 색이 공이다. 수즉시공공즉시수, 상즉시공공즉시상, 행즉시공공즉시행, 식즉시공공즉시식이라고 말한다.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다. 수가 공이고 공이 수다. 상이 공이고 공이 상이다. 행이 공이고, 공이 행이다. 식이 공이고, 공이 식이다. 결론은 색이 공이고 수가 공이므로 색은 수이다. 색이 수이고, 수가 상이고 상이 행이고 행이 식이다.
행이 상인데 상이 색이다. 말로 풀면 생각이 느낌인데 느낌이 마음이고, 마음이 형상인데 형상이 의지이다. 말이 언어가 다 무너진다.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참된 상직의 세계이다. 세상 끝이고 나의 생각이 다 무너진다.
형상/물질은 우리가 보면 그냥 다 안다. 여기에서 느낌이 온다. 그 느낌에서 생각이 즉각 떠오른다. 그 생각에 집중하면 그것이 의지이다. 이 의지가 나의 마음이다. 이렇게 오온이 실제 세계에서 중첩되어 있다. 이것은 화두 공안의 특이한 세계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의 주변 세계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오온의 중첩이다.
오도송은 깨달음의 감흥이다. 깨달음은 생각이 다 깨진 것이다. 그 감흥을 노래한 것이다.
선어록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시집 감상하듯이 감상하는 것이다. 선어록은 말로 설명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감상하려면 왜 생각이 깨져나가는지에 대한 교학의 토대가 있어야 한다.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 반야심경은 개념의 실체성 비판이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공을 이해했다고 해서 반야 지혜가 열린 것은 아니다. 개념의 실체성 하나만 비판했을 뿐이다. 반야 지혜가 열리려면 판단의 사실성도 비판하고, 그다음 추론의 타당성도 비판하는 논법을 익혀야 한다.
개념의 실체성 비판은 중관학의 본질이 아니다. 중관학의 본질은 판단의 사실성 비판이다. 판단의 사실성 비판과 추론의 타당성 비판까지 체득해야지 생각이 엉터리라는 것을 알고 반야가 열린다고 할 수 있다.
반야심경이 짧고 쉽기에, 이것 하나 감 잡고 공을 알았다고 하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아주 초보 중 초보이다.
반야의 실천적 응용을 해서 개념의 실체성 비판을 응용한 이야기를 다시 되풀이해서 이야기해 보겠다.
지금까지 배운 것이 공, 중도, 연기이다. 모든 개념은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다는 것은 다른 말로 ‘공 하다.’이다. 예를 들면 큰 방, 작은 방은 실체가 없다. 원래 바깥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릿속에 있는 것이다. 처음 들어가는 방문을 열었을 때 그 방의 크기는 큰 방도 아니고 작은 방도 원래 아니다. 원래는 크지도 않고 작지도 작지도 않다. 그 방의 크기는 비대비소라는 의미에서 중도적이다.
우리 머릿속에 ‘크다. 작다.’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비교를 통해 떠오른다. 내가 작은 방을 염두에 두고 문을 열면 그 방은 큰 방이 된다. 큰 방을 염두에 두고 들어가면 작은 방이 된다. 그러니까 연기와 공과 중도가 한꺼번에 다 맞물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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