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의 사실성 비판]
중관학의 핵심이 판단의 사실성 비판에 있다. 중관학은 공을 논증하는 공의 논리학이다. 중관학은 다른 학문과 다르게 문제 푸는 방식을 알려주는 것이지 그 답을 알려 주는 것이 아니다. 결론이 중관학의 핵심이 아니다. 푸는 방식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중관학을 익히면 불교가 살아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활구(살아 숨쉬는)로 살려내는 학문이 중관학이다. 오직 불교에만 있고, 불교 내에서도 대승불교 시대에 용수 스님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개발하신 것이다.
중관학이 있어서 부처님의 연기법을 피상적인 혹은 관념적인 지식이나 도그마로 이해하고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이 논법을 통해서 항상 언제 어디서든 재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연기법을 객관화해서 누구든지 있는 그대로 연기법 핵심을 가지고 체득할 수 있게 해주는 테크닉을 개발하신 분이 용수 스님이고 그 테크닉을 익히는 연습 문제집 저술이 『중론』이다. 그 테크닉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게 판단의 사실성 비판이다.
판단은 종류가 네 가지가 있는데 이 네 가지 판단을 불교 전통 용어로 사구(四句)라고 한다.
보통 선에서 ‘이사구절백비(離四句絶百非)’라고 해서 사구에서 벗어나고 결론적으로 모든 생각을 지운다는 이야기는 많이 하지만 선에서는 이것을 직관하기 때문에, 어떻게 벗어날 것인지는 말이 없다. 그러나 중관학에서는 말로 다 설명해 준다. 중관학이 없으면 연기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중관학이 있기에 누구든지,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면, 공이 무엇인지, 우리의 사유에 문제가 있는지, 불교의 깨달음의 지적인 측면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아주 명료하게 알 수 있다. 그래서 티베트 불교계에서 중관학을 현경(드러난 가르침) 중에 최정상에 위치시킨다. 불교의 지적인 통찰의 끝이 바로 중관학이다.
깨달음이라고 얘기할 때 동아시아에서는 지적인 깨달음을 말한다. 똑같은 대승인데 티베트 불교에서는 감성적 자비심을 깨달음이라고 이야기한다.
보리심이라고 얘기할 때 우리는 보통 지적인 깨달음으로 모든 것을 알고, 공을 아는 것을 ‘보리’인 줄 아는데 티벳 불교 전통에서는 그게 보리가 아니다. 대자비심이 보리이다. 보리를 추구한다, 성불한다고 할 때 대자비심을 갖춘 분이 되는 것이다.
보살심이 보살심이기도 하다. 보리를 추구하는 마음 혹은 보살의 길을 걷는 마음이다.
동아시아에서는 ‘깨닫는다’는 머리가 깨지는 ‘인지 정화’이다. 그래서 동아시아는 깨달음이 인지적 측면이 강하고 티베트 불교는 감성적 깨달음을 즉 감성 타파(해체)를 깨달음이라고 한다. 우리 전통을 포함해서 동아시아 한문 불교권은 지적으로 깨지는 것, 선문답하는 것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물론 둘 다 갖춰야 하지만, 똑같은 보리심이 전승된 지역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
중관학과 유식학의 통합을 동아시아 말로 『삼론』과『섭대승론석론』의 통합이 대승기신론의 여래장 사상이다. 중관학과 유식론의 통합이 대승기신론의 일심(一心), 이문(二門), 삼대(三大)에 나오는 여래장 사상이다.
그런데 인도와 티베트에서는 중관과 유식의 통합이 유가행 중관파이다. 그래서 서열이 있다.
중관이 가장 위에 있고 그 밑에 유식이 있다. 이렇게 순서를 매긴다. 이것이 유식과 중관의 통합이다.
그런데 대승기신론에서는 중관과 유식을 대등하게 통합한다. 일심이문(一心二門) 해서 심진여문(心眞如門-참된 진여)이 중관이고, 심생멸문(心生滅門) 이것이 유식이다. 일심이문 이렇게 통합하는 것이 기신론이다.
그러나 인도 티베트 전통에서는 서열을 매겨서 중관(공)이 가장 위에 있고, 그 밑에 일체유심조-모든 게 마음이다-의 유식의 교리가 있고, 그 밑에 아비달마 교학의 교리가 있다.
중관학의 핵심은 사구 비판에 있고, 사상이 아닌 테크닉이다. 중관학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연기의 가르침을 재생산할 수 있게 한 학문이 중관학이고 그 핵심이 판단의 사실성 비판이다.
진속이제설(眞俗二諦說)은 동아시아의 한문, 이제설이 훨씬 뛰어나다. 후에 삼론학의 이제설은 변증법적 이제설이다. 삼종(중)이제설이다.
이제(二諦)가 진제(眞諦), 속제(俗諦)가 아니다. 무(無)가 진제이고, 유(有)가 속제이다. 유(有)하면 속제이고, 無-‘없다’ 하면 ‘공 하다’ 하면 진제이다. 이 가르침이 오래 퍼지니까 무(無)가 진제구나 하고 또다시 분별에 들어가 버린다. 그러면 무(無)도 분별이기 때문에 속제가 되어 버린다. 유와 무가 다 속제이고 비유(非有)와 비무(非無)가 진제가 된다. 이것이 제이중 이제이다. 이렇게 변증적으로 발달한 다음 나중에 비유비무(非有非無)가 진제이고,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하는 고정관념이 생긴다. 이것도 다 파한다. 유와 무도 다 속제이고, 비유 비무도 다 속제이다. 그다음 유무를 배격하고 비유, 비무를 배격한 것을 ‘비이비불이(非異非不異)’, 이것이 진리다. 진제 이렇게 이야기한다.
동아시아의 이전은 잡으면 놔버리면서 변증법적으로 발전하고 이 패턴이 나중에 선불교에 들어가서 선승들 선문답의 방식이 삼중이제설의 영향이다.
인도 티벳 전통에서 이제(二諦)는 관념으로 고정돼 있다. 이 또한 문제다. 진제를 둘로 나누고 말로 표현된 진제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제를 나누고, 속제를 또 나눠버리면서 재미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버린다. 이것은 진정한 이제에 대한 이해가 아니다.
인도 티베트 전통의 불교하고 동아시아 불교 전통이 전혀 다르게 나갔지만 어떤 분야는 동아시아 전통이 훨씬 더 깊이 있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살렸고 어떤 것은 인도 티베트 전통이 더 다가갔다고 볼 수 있다.
사구(四句)는 중관학과 무관하다. 중관학 이전에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부터 있던 것이다. 그 판단의 종류에는 네 가지가 있다. 고대 인도 전통에서는 사람이 만드는 문장의 종류를 넷으로 나누는 전통이 있다.
중관학은 이 사구가 중관학이 아니고 이것을 비판하는 방식이 중관학이다. 사구 비판이다.
사람이 머리 굴리면 어떤 문제에 대해서, 내가 알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서 네 가지 답을 내게 돼 있다는 것이다.
1.우주에는 끝이 있다.
2.우주에는 끝이 없다.
3.우주에는 끝이 있으면서 없다.
4.우주에는 끝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
이 이상의 판단은 없다고 말한다.
1.정신과 육체는 같다.
2.정신과 육체는 다르다.
3.정신과 육체는 같으면서 다르다.
4.정신과 육체는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중관학과 무관하다. 영혼과 육체의 관계에 대해서 어떤 답을 내려고 할 때 이 네 가지 중에 하나가 나온다고 이야기한다. 중관학은 이 네 가지 중에 어떤 답도 다 틀렸다가 중관학이다. 머리 굴리는 게 다 틀렸다고 하는 것이 중관학이다. 그리고 왜 틀렸는지를 논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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