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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지선공부모임_10년결사/저녁공부

2023년 몽지선공부모임 10년결사 저녁공부_육조단경 1

by 마음길 2023.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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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4일 토요일]

4. 혜능 조사의 주창점. (p20~26까지)


오전에는 한국선사들과 재가의 선지식 글들을 공부.
오후에는 서구의 여러전통을 공부.
저녁에는 전통적인 중국조사선의 주요어록을 공부하는데 단경부터 시작한다.

중국조사선의 개창자는 육조 혜능이다. 혜능의 기록은 육조단경뿐이다.
육조단경은 설화적이다.
도입부분이 영웅신화적인 스토리이다. 일종의 영웅설화이다.
그래서 민중들 사이에서 쉬운 접근성과 인기있게 회자되고 도움이 되었다.

단경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육조단경이 선의 정안이다.

조계종의 종단의 이름에는 2가지 의미가 있다.
육조 혜능에서 왔다는 설과 보조국사 지눌(육조혜능을 숭상함)에게서 왔다는 설이 있다.
혜능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조계종의 강원 교육과정에 단경이 없다.
선요. 서장 같은 간화선 교재만 잇다.
선이 무엇인지, 선의 정안이 무엇인지를 일러주는 어록이나 교재를 공부하지 않는다.

간판은 조계종으로 해놓고 실제 수행은 신수종이다.
신수종. 열심히 갈고 닦아서 먼지 티끌 앉지 않게 하세요. 하는 갈고 닦는 수행의 종교가 되었다.
그래서 법이 사라진 것이다. 올바른 정법이 빛을 잃었다.

광덕 스님의 번역본 [육조단경]을 교재로 선택했다.
조계종은 해방이후에 성립되었다.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해 선맥이 끊어졌었다가 일제시대를 지나고 해방후
1960년대 조계종단이 시작되었다.
정화는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인과가 엄연하다.

p20~21


선의 중심 목적이 대개 실존현로에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이 진성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만 망심.망연에 가린바 되어 현전하지 못하니,
다만 망연만 여의면 곧 불이다.
▶진성은 만들어 낼 필요없다.

혜능 조사는 습정.점수.성상이원론을 정면 거부하는 입장에 선다.
혜능 조사의 첫째 주창점은 견성이다.

선정해탈을 논하지 않고 오직 불성이라는 참 성품을 보는 것이다.
▶단경의 종지
선정해탈을 논하지 않고
오직불성이라는 참 성품을 보는 것이다.
오직 깨달음 밖에 없다.
수행은 없다.
이것이 선의 종지이고
이것이 불교이다.

진성은 역사적이며 구체적인 현실태로
직접파악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선정을 익혀서 망념의 소멸을 기다리거나
불성을 응시하고 정심을 관하는 수행이 아니다.

▶선을 익혀서 망념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선의 종지이다. 번뇌는 없앨 수 없는 것이다.
없앨려고 하는 것. 그것이 번뇌이다.
깨달음으로 나아가려는 것은 삿된 것이요.
번뇌를 없애려함 역시 병에 병을 더하는 것이다.
없애려함이 바로 번뇌이기 때문이다.

수행: 수행하는 자와 수행대상이 있다는 것은
주관과 객관이 생기는 것이므로 이분법이다.
이것은 불법이 아니다.
성립이 안된다.

바로 이것이기 때문에 할 것이 없다.
이것이기 때문에 아는 것도 아니고 얻는 것도 아니고 버리는 것도 아니다.
바로 여기서 그냥 밝아지면 된다.

알기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이거다 하면 끝이다.
믿고 맡기면 끝이다.

자기가 하려고하니까.
자기가 망념이다.

그래서 자기가 자꾸 저항한다.
자기가 알려고 하고,
자기가 보려고 하고,
자기가 체험하려고 한다.

이것만 안하면
지금 이렇게 체험하는 것이다.
이렇게 밖에 모른다.
더이상 알수 없다.

알았다하면 망상이다.
알았다하면 대상이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있는 것을 어떻게 다시 안다는 말인가?
더 이상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의 성품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수행을 빌지 않는다.

만약에 수행을 통해서 갈고 딱아서 얻는 것이라면
위없이 바르고 평등하지가 않다.

초인적인 수행자...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되고...
그것은 불법이 아니다.
차별이 생기기 때문이다.

중생본래성불이 불법이다.
진리는 차별이 없다.
일체평등.

능소가 있음은 불성이 아니며 진이 아니다.
절대적 주체성은 그런 것이 아니다.

▶상대적 주체.
주관. 객관은 상대적이다.

자기가 있는줄 아는 그 놈은 절대 알 수 없다.
이것이 상대가 끊어진 절대적 주체성.
바로 이것이다.

전혀 모르겠는  것.
그것이다.
알면 상대이다.
보거나, 듣거나, 냄새맡거나, 맛 볼 수 있거나
느낄 수 있거나, 알 수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러니까 이것이다.
봐도 뭔지 모른다.
들어도 뭔지 모른다.
느껴도 뭔지 모른다.
생각해도 뭔지 모른다.
바로 그것이 도이다.

그런데 의식은 있다.
생생하다.
성성하다.
그런대 의식의 내용이 없다.
성성적적.
우리의 본래심.
본래목적.
바로 ‘이 자리’라는 것이다.

대개 보이고 지켜지는 본성이란 본성이 아니다.

▶깨끗하든, 더럽든, 시끄럽든
아는 놈은 깨끗하지도 더럽지도 시끄럽지도 않다.
그것은 잡을 수 없다.
그놈이 잡는 자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도 계속해야지)

오늘도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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