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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지선공부모임_10년결사/저녁공부

몽지선공부모임 10년결사 저녁공부_육조단경1-2

by 마음길 2023.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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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5일 일요일]

4. 혜능 조사의 주창점. (p20~26까지)

 

알면 상대이다. 

보거나 듣거나 냄새맛거나, 맛보거나, 느낄 수 있거나 만질 수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봐도 들어도 느껴도 생각해도

뭔지 모른다.

그런데 생생하다.

생생하고 성성한다 아무 의식의 내용물이 없다. 

이것이 성성적적 우리의 본래심, 본래면목, 이 자리이다.

 

p21.

대개 보이고 지켜지는 본성이란 본성이 아니다.

그것은 상(어떤 대상)이거나 아니면 공(아무것도 없는 공적한데)이다. 

집상(상에 집착)이며 집공(공에 집착)이며 아니면 정박(깨끗한데 묶인 것)이다. 

 

▶수도를 하다 보면 아주 깨끗한 의식 상태가 나온다.

그러면 그것을 지킬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좋으니까.

이때 보아야한다.

깨끗하든 더럽든 시끄럽든 고요하든

아는 놈은 깨끗하지도 더럽지도 시끄럽지도 고요하지도 않다.

그것은 잡을 수 없다.

왜? 그놈이 잡는 자이니까.

 

그것을 잡을 필요가 없다.

용기 있게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

바보 멍청이가 될 용기가 있어야 한다. 

 

깨달음을 탐내는 것이아니라

깨달음을 발로 걷어차버려야 한다.

줘도 안갖는다고 걷어차 버려야한다.

 

그렇게 하면 전부 이것 밖에 없다.

 

얻을 수 도 없고 잃어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절대적 진리이다. 

 

마땅히 상을 여의며 공을 여의고 일체 사량분별을 여의어야 하는 것이다. 

▶모양을 떠나라. 공도 떠나라. 모든 생각과 분별을 떠나라.

아무것도 하지마라는 이야기이다.

 

설사 이와 같이 자성을 관하고 지켜서 아는 바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 안다는 것은 자성의 작용이며 속성(속해있는 성품)이니 

아는 것이 성 자체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뭔가 체험한 사람은 그 체험을 지킨다.  그것을 지켜본다.

체험과 자기가 둘이 되어 있다.

그것은 진짜 체험이 아니다.

 

어떤 상태가 되면 그것을 법에 있다고 느끼고 

그것을 잃어버리면 그것을 내가 놓쳤다고 느끼는 것은 

상놀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 아니다.

 

이것은 잡을 수도 없고, 놓을 수도 없고

알수도 없고, 모를 수도 없다. 

둘이 아니다.

 

모든 이분법을 초월한다.

그래서 딱 이것이다.

 

그래서 눈이 밝아야되고 촛점이 맞는다 개합했다고 하는 것.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래 진성은 둘이 아닌 성품이다. 

(미혹)와 오(깨달음)가 둘이 아니며 성(성인)과 범(범부)이 둘이 아니며

번뇌와 깨달음이 둘이 아니다. 

▶간심: 마음챙김. 알아차림의 수행.

수정: 고요함을 지키는 것. 생각없는 상태에 들어가려고 호흡에 집중하는 수행.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망념이라고 하면서 생각일어남에서 떠나버리고 고요함을 지키려고 하는 것.

장좌불와: 요기들이 하는 것. 초능력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이것은도가적 깨달음이다.

초능력을 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뭔가 든든한게 생기는 것이다.

수도한다면서 어떤 기를 얻거나 선정의 힘을 통해서 어떤 남다른 능력들이 생긴다.

이것은 수행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불법이 아니다. 

불법은 이상한 짓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공부하자는 것이다. 

 

혜능 조사는 선에 있어 간심, 수정, 장좌불와, 좌선법은 선병이라 하여 엄중히 배격하고

오직 견성을 종지의 안목으로 삼아 동태선(움직이는 선). 생활선(생활그대로의 선). 창조선을 주창한다. 

우리 시대에는 제대로 해야한다. 

가만히 고요하게 멍청하게 있는 것이 아니다. 

활발발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그래도 좌선. 화두선... 그래도 뭘해야지요..

그래도 '아니올시다' 이다.

 

지금 여기 있는 것을 맨날 걷어차고 사는 것아닌가?

방향을 바꾸라.

회광반조하고 돌아오시오. 돌이키시오.

 

우리가 눈여겨 보지 않았지만

여기 있는 이것. 아무 모자람이 없다. 

 

지금 자기 몸뚱아리를 알아차리는 그것.

그것이 모자란가?

이것이 나이를 먹는가?

 

추우면 추운 줄 알고, 더우면 더운 줄 아는 것이

나이가드는가?

대상은 달라지지만 거기에 대한  '앎', 아는 것이 달라지는 가?

자각의 성품이 달라졌는가?

 

아는 것은 달라질 수 없다.

이것은 어떤 것이 아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다음에 이러한 동적(활발발하게 살아있는)인 실성(진실한 성품)

주체적 확인(남이 알려줘서 아는 것이 아니다.내가 아는 것이다.)견성일진대(자중자오)

 

견성은 바로 본성이라는 절대적 무한태(상대가 끊어지고 무한한. 어떤 모양으로서 양태로서는 무한한)

자성분별(자성의 분별.자성이 아는 것)이며 자기 파악(자기가 자기를 아는 것)이다.

▶오른손이 어떻게 하면 오른 손을 잡을까?

어떻게 자기가 자기를 잡을까?

 

아무것도 안잡으면 자기가 자기이다.

잡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 마음이 마음을 깨달을까?

아무것도 알지 않음으로서. 

 

알았다고 한다면, 안다고 한다면 그것은 대상이니까.

잡았다면 대상을 잡은 것이니까.

엉뚱한 것을 잡은 것이다.

 

그래서 대 내려놓아라.

그저 홀로 있으라.

 

고요히 있으라.

그리고 곧 내가 '신'임을 알라.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still이라는 단어에는 침묵, 고요함이라는 뜻이 있지만 굳건하다는 뜻도 있다.

침묵. 고요함 안에 파괴되지 않는 것이 있다. 

 

아무것도 하지마라.

가만히 있으라. 

 

그러므로 여기에는 소호(조금)의 남음도 모자람도 없는 것이요,

▶자기경험을 잘 보라.

보고 듣고 느끼는 자기 성품에 모자람이 있는가?

우리는 판단하고 분별하는 것이 자성때문에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림자 놀이.

빛이 있으니 개도 만들고 닭도 만들고 이것이 개고, 닭이라고 한다.

이것이 생각이다.

이것이 맞나 틀리나, 이것인가 저것인가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빛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자기는 드러자지 않았는데 대상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의 자신은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자기를 안다.

(어떻게 아는가?)

그런데 우리는 몸이 몸을 아는 것인줄 알았다.

이것은 말이 안되는 소리이다.

몸이 몸을 아는 것이 아니다.

몸이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신령한 영혼이 있는가?

그런것은 없다.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것이다.

단견도 아니고 상견도 아니다.

그래서 중도 정견이라고 한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쑥 들어가는 것이다.

 

자성의 전성(전체성품)수용(받아쓴다)이니

여기에 다시 더 무슨 점차(단계)나 수증(닦아서 깨닫는 것)의 여지가 있겠는가?

▶조계종 건립에 이바지 했던 큰스님의 법문이다. 광덕스님은 성철스님과 사형 사제 지간이다.

 

 

혜능 조사가 "내가 인 화상 회하에서 한 번 듣고 언하(말 끝하에)에 깨닫고 진여본성을 돈견(문득 보았다)하였다" 하였으니

돈견: 이것이 깨달음이다. 

점점점 닦아서 무슨 능력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의 종지가 또한 철저한 돈교(문득 깨닫는 종교)를 표방하는 소이(까닭)가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견성만 말했고. 

또 하나 혜능 조사가 고창한 것이 있다.

일체를 자성으로 파악하는 대기대용적(큰기틀과 큰 작용)

입장에 서는 조사는 종래의 망궁진로(망이 다하면 진이드러난다)

선정후혜(먼저 삼매를 닦고 지혜를 얻는다)의 이론을 용납하지 않는다.

망념을 없애서 나중에 진실을 얻는다.

번뇌를 없애서 진실를 얻는다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삼매 닦은 후 사마타 한 다음에 위빠사나 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하는 것이다.

즉 선정후혜의 이론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보조 스님도 정혜쌍수, 지관쌍수, 정혜동지 라고 했다.

항상 같이 닦는다고 했다.

우리 마음이 정하면서도 혜이고 혜하면서도 정이기 때문이다.

 

고요하면서도 성성하게 알고,

성성하게 알면서 고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를 하고 하나를 한다는 것은 둘로 본다는 소리이다.

 

망과 진을 둘로 보고 정과 혜를 둘로 보는 견해에서는 

먼저 정에 들어 일체 분별을 초절(뛰어 넘어서)한 후에 자성진여가 발생한다고 하는 것이나

▶대부분의 수행에서는 무조건 앉으라고 한다.

왜냐하면 삼매에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번뇌 망상이 많으니까 삼매에서 번뇌 망상을 없애면 깊은 삼매에 들어서 깨달음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깊은 삼매에 들어가면 깨달음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생각으로 공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 당시의 요가 삼매, 선정이다.

 

일체의 분별을 뛰어 넘어야 자성진여가 발생한다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자성뿐이라는 것이다.

둘이 없다.

길이 없다.

그래서 길없는 길이라고 한다.

길 끊어진 문이다. 경절문이라고 한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왜 그렇게 않하는가?

 

미래에 있는 깨달음은 거짓된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눈 앞에 있다.

진리는 눈앞에 있다.

미래는 없는 시간이다.

 

미래는 역사적인 시간이 아니다.

없는 추상적인 시간이다.

 

그것이 깨달음인지 아닌지는 무엇으로 알것인가?

 

진성은 이미 갖추고 있거늘.

일체중생이 모두 깨달아 있거늘.

무명에 덮혀서 그런줄 모르는 것이 너무너무 안타깝다.

그래서 대승을 공부하라는 것이다.

대승을 공부하면 소승도 이해가 된다.

왜 소승을 방편의 가르침이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진리는 방편없이 곧장 드러내는 것이다.

 

혜능 조사에게는 혜를 떠난 정이 없고,

정을 떠난 혜가 없다.

정이 혜이며 혜가 바로 정이며

상에서 성을 보고 성에서 상을 보니 성상일여(모양과 성품이 한결같으며)이며

정혜는 불이(선정과 지혜는 둘이 아니다)라고 가르친다.

▶정. 혜가 같은 것이다.

색이 그대로 공이고, 공이 그대로 색이다.

교와 선이 둘이 아니다.

 

이것이 선종의 정안이다.

이것을 모르면 헛된 수행을 하다가 세월 다 보낸다.

 

이것을 수행자들을 공격하고 오해한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그럴 의도는 전혀 없다.

 

간절한 마음을 강하게 전달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강렬함이다.

이것이 올바른 길임을 조금만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빠릴 이것을 깨우쳐야 한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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