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10일 금요일]
체험은 인식이 변할 때 부수적으로 따로오는 것이지만
그 경계에 속기 쉽다.
우리는 느낌과 생각, 신체감각의 노예이다.
느낌과 생각, 신체 감각이 너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없다. 무는 단멸론이 아니다.
무아라는 말을 고집하고
무아라는 말에 속으면 안된다.
감각이 없는 것을 무아라고 착각하면 안된다.
멸진정은 감각과 생각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감각과 생각은 경험되지만 본래 없다.
실체가 없다.
분별이 분별을 없애려고 하면 자아가 강화된다.
공부를 하게 되면 방편을 버리게 된다.
그렇다고 방편을 무시한다는 말이 아니다.
의도적으로 방편을 써서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쓰는 것이 아니다.
수행에 대한 미련.
어떤 것을 성취하려는 충동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자아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너무 당연한 것이어서
속고 있는지 모르고 하는 것이다.
본분사를 드러내면
그냥 바로 이것이다.
이미 완성되어 있다.
진리는 우리가 노력해서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 그 자체가 되는 것.
이것을 체험이라고 한다.
이 체험은 지금 (즉.직.) 하는 것이고.
대상이 있어서 체험하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 뒤의 미혹.
깨달음 뒤에 진정한 공부를 시작한다.
겪을 것을 다 겪으면서
오래 공부해야한다.
묵연히 점두하게 된다.
깨달음은 자아의 성취가 아니다.
그래서 아무리 움켜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다.
생각이 앞서면 항상 혼란스럽다.
그것 밖에 모르고
그것을 자기라고 여기고
그것을 의지해서 공부하기 때문이다.
오온.
경험의 범주.
우리는 경험을 떠나서 무엇이 있는가?
경험을 하기 때문에 그것을 나로 삼고 살고 있다.
경험을 없애서, 자아 감각을 없애서 무아인 것이 아니다.
'공함'을 보라는 것이다.
공부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삶에 있다.
이렇게 있다는 것이 전부다.
경험되지만 실체가 없다.
좋은 느낌이나 경험으로 치환할 수 없다.
들어 온적도 없고, 나 갈 수도 없다.
일심은 알 바가 없으며, 알 것도 없다.
그래서 일심은 무심이다.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이 명확하다.
알는 자도, 얻을 것도 없다는 것을 분명하고
인연에 맡긴다.
인연따라 산다.
당연한 것이므로.
운에 맡긴다.
운은 움직임을 말한다.
끊임없이 움직인다.
흐름에 맡기는 것이다.
미세한 물질주의.
조심해야 한다.
다만 이것이다.
느낌을 붙잡는 것이 아니다.
느낌이 공하다는 것을 보는 것이다.
말을 잊고
이해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체득하는 것이다.
꿈 속의 경험 가운데 꿈 아닌 것은 없다.
꿈속의 경험이 그 모양이 각각 다르지만
그냥 경험되는 것일 뿐 모든 것이꿈이다.
실체가 아니다.
경험되는 것이지만
실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무상한 경험과 결코 둘이 아니면서
무상이 상이고,
무아가 아고
부정이 정이다.
둘로 보는 것은 이원성. 분별망상이다.
무상이 상이다.
변화만이 변화 없다.
변화만이 영원하다.
조작으로 만들어진 것.
조작으로 해낸 것은
일시적일 수 밖에 없다.
지켜 보라. 見
관하라. 觀
본다는 직접적인 경험이 진실이다.
생활 속에서 증험되어야 한다.
공부할 때 소견이 생긴다.
그러면 그 틀안에 갇히게 된다.
그래서 공부를 깨고, 또 깨는 것이다.
이것 뿐이다.
느낌과 생각의 실체, 본질을 알아야한다.
진리는 행위하지 않음으로서 아는 것이다.
그저 존재함으로서.
오직 모를 뿐.
Only don't know!
오직 할 뿐.
직접적인 체험.
본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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