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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중관학노트

중관학9강: 중관학과 12연기

by 마음길 2022.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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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는 개념의 실체성 비판만 이야기하였다. 왜 실체가 없냐면 지금까지 이야기했듯이 연기했기 때문에 공 하니까 연기, 항상 대립쌍과 함께 나타났기 때문에 원래 실체가 없다.

 

[질문: 12 연기 식과 명색에서 명색을 조건으로 식의 발생은 식의 조건으로 인식의 발생 과정, 명색의 발생은 존재 발생 과정으로 볼 수 있을까요?]

 

그건 아니다. 둘 다 존재의 발생이다. 중론27장 중 26장에 12연기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이것을 격파하지 않고 12연기를 그냥 그대로 설명한다. 중론에서 가장 독특한 장이 제26장 관십이인연품(觀十二因緣品)이다. 무명(無名)이 있으면 행이 있고에 대해서 낱낱이 상세하게 설명한다. 용수 스님은 철저하게 12연기를 다 수용한 분이고, 12연기에 대한 태생학적 해석을 얘기하는데 이것을 현대 학자들, 서양 학자들이 엉터리라고 많이 비판한다. 용수 스님은 철저하게 이것을 심봉 했던 분이다. 용수 스님만이 아니고 초기 불전에 중아함경 혹은 맛지마 니까야((Majjhima Nikāya)철저하게 태생학적 해석으로 되어 있다.

불교학 공부할 때 조심 할 게 서양 불교학, 일본 불교학이다. 내가 경을 보면서 대조해 보아야 한다. 불심이 별로 없는 인문학자기 때문에 자기 멋대로 이야기한다. 신앙심 없이 경과 위배 되는 데도 그냥 머리 굴려서 잘난 체하려고, 교학 공부하는 사람들이 책을 써서 이름 날리려고 독특한 얘기를 무책임하게 자꾸 한다.

 

중관학 강의에 12연기를 나중에 어차피 설명할 것이지만 질문이 들어와서 미리 공부한다고 생각하고 설명하겠다.

 

12연기는 12가지 연기법으로 12가지 의존 관계이다. 생명체를 관찰하면 두 가지 의존 관계, 원인 결과, 즉 원인에 의해서 결과가 나오는 인과관계로 전개된다.

 

惑 業 苦 惑 業 苦

혹 업 ---- -----┐ ┌ --

무명 명색 육입 → 취 → 노사

無名 名色 六入 老死

---┘ └----------------┘ └------┘ └----

 

과거의 원인 현재의 결과 현재의 원인 미래의 결과

(전생에 지었던 것) (현생에 받고 있는 것) (현생에 짓고 있는 것) (내생에 받을 것)

무명이 원인이 되면 행이라는 결과가 생긴다. 행이 원인이 되면 식이 생긴다. 이것을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것이다. 나무를 비비면 불이 난다. 나무를 비비는 게 원인이 되고 불이 나는 것이 결과이다. 비비면 뜨거워지는 것이 절대 당연하지 않다. 나무를 비빈다는 사실과 뜨거운 불이 탄다는 사실은 아무런 관계가 원래 없다. 비벼서 불이 나니까 우리가 경험적으로 습득하는 것이다.

 

인과관계. 구름이 있으면 비가 온다. 이것도 원래 하얗게 보이는 떠 있는 구름과 물이 떨어지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런데 그런 일이 발생한다. 이렇게 인과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보는 것이 분별적 사고방식이다. 흄이라는 서양 철학자가 불교와 비슷하게 인과론을 부정한다. 흄에 대해서 붓다, 부처라는 말도 있다. 인과는 원래 성립하지 않는다고 논리적으로 말한다.

 

12 연기 전체가 다 인과인데 그냥 봐서는 모른다. 생명체를 관찰하니 이렇게 돌아가더라는 것이 부처님의 대발견이다. “무명 명색 → 육입 → → 취 → 노사하나하나가, 한 매듭 한 매듭이 다 부처님의 발견이다. 생명체는 때문에 가 있다. 은 외부 대상을 지각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 이것이 이다. 는 고통과 쾌락이다. 보이고, 들리고, 닿는 것, 기쁘고, 아프고, 즐거운 것은 원래 아무 관계가 없다. 보고 듣고 느끼다 보니까 아픔과 즐거움이 느껴진다. ()는 고수(苦受), 락수(樂受)이다. 그래서 촉 때문에, 수가 있는 것이다. 대발견이다. 당연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소리가 나면 원인은 컵과 뚜껑이 부딪친 것이다. 컵 뚜껑과 컵의 부딪힘은 소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런데 소리가 난다. 이것이 하나의 경험적 지식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컵 두드리면 뭐가 닿는 것과 귀의 진동으로 나타난 소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그것이 연결돼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3차원 세계에서는 연결되어 있다. 12 연기도 이런 발견이다. 생명체에 대해서 인간과 짐승과 천신과 귀신과 같은 생명체는 다 이런 식의 과정을 거쳐서 살아간다는 것이 부처님의 대발견이다.

 

설명하면 무명 때문에, 행이 있고, 행 때문에 식이 있는데 무명이 어리석음이다. 세상이 뭐가 뭔지 모른다. 무엇이 좋은 행동이고 무엇이 악한 행동인지 모른다. 짐승은 무명에 쌓여 있어서 하루 종일 악행만 하고 산다. 막 잡아먹고 죽이고 막 뺏으며 산다. 가장 악한 놈이 가장 행복한 놈이다. 짐승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라이온 킹이 가장 나쁜 놈이다. 막 물어뜯고 죽이고 음행을 가장 많이 하고 암사자 뺏어가면 죽여버리는 놈이, 사람으로 치면 제일 흉측한 놈이 라이온 킹이다. 무명이 쌓여 있기에 항상 악행을 한다. 인간도 똑같다는 얘기기다. 좀 힘이 세고, 키가 크고 자라고 영민할 경우는 아주 나쁜 놈이 되어버린다. 무명이다. 뭐가 옳은 건지 모르니까 뺏어 버리고 그게 더 옳은 건 줄 안다. 먹는 것도 내가 욕심 채우면서 다 먹어버리고, 화나면 다 화풀이하고 이게 좋은 건지 안다. 이것이 문명이다. 이렇게 온갖 업을 다 짓는다.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은 지금 우리가 대충 알지만 정밀하게 들어가면 헷갈린다. 뭐가 착한 건지 악한 것을 착한 것으로 착각한다. 대표적으로 칭찬합시다이다. 없는 것도 막 칭찬한다. 이것이 기어(綺語) 죄이다. 10가지 악 중에 기어(綺語)가 있다. 진실한 진솔한 말이 아니고 발린 말하는 것, 꾸민 말하는 것이다. 이것도 많이 지으면 지옥 간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칭찬하면 고래도 춤춘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지금 사회는 부처님 말씀에 근거하면 진짜 잘 못 가는 것이다. 세상에 변했다. 이것이 다 기어 문화이다.

 

악행도 무엇이 악행인지는 다시 부처님 가르침에 근거해서 정리해야 한다. 한마디 말을 하더라도 진솔해야 한다. 심지가 있어야 한다. 이런 문화가 지금 다 없어졌다. 다들 껍데기에서 표피에서 놀기 때문에 인성이 가벼워졌다.

 

내가 갖가지 업을 짓는다. 업을 지으면 그 업이 악한 행동이든 착한 행동이든 행동한 다음에는 그 행이 전부 사라지는데 사라지는 게 아니다. 반드시 남는다. 내가 한 행동을 목격한 놈이 있다. 그 목격자는 바로 나이다. 내가 하는 행동,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다 나의 마음속에 씨앗처럼 다 저장된다. 이것이 식이다. 이것도 인과관계가 참 재미있다. 행동이 마음에 저장된다. 행동이 원인이고 마음에 저장되는 식이 결과이다. 이 식이 저장된다. 악한 행동, 착한 행동 별별 행동 모두 다 사라지는 게 아니고 죽은 다음에 귀신이 그냥 그걸 끌고 간다.

 

태어날 때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 간다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이 있다. 그렇지 않다. 없으면 없을 거지만 업 가지고 태어났다가 업 가지고 간다. 업은 내가 지었던 행이다. 내가 지었던 행, 그 업이 씨앗, 종자가 되어서 내 마음속에 귀신 속에 들어가 있다가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아직은 열반 안 했기 때문이다. 아직은 중생이기 때문이다. 다시 자궁에 달라붙어서 태아로서 자라난다. 이 태아가 명색이다. 10달간, 임신 5주까지가 명색이다. 심신 복합체, 왜 명색이냐면 고깃덩어리:몸통-색에 귀신()만 붙기 때문이다. 심신복합체, 고깃덩어리, 몸통에는 아직 눈, , 코가 아직 없다. 임신 5주는 그냥 자궁에 붙어 있는 작은 혹이다. 그다음부터 6주부터 눈, 귀가 생긴다. 임신 5주 때가 육입(六入)이다. 6가지 입구가 생겼지만, 아직 그 기능은 못 한다는 뜻이다. 눈 귀 같은 자국이 생겼다는 말이다.

 

10달까지 가면 드디어 아기가 태어나고 눈이 보이고, 귀에 들리지만 아직은 잘 안 보인다. 태어나자마자 3~5일 지나면 눈 보이고 귀가 들린다. 경에 다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수()-고수(苦受), 낙수(樂受)가 생긴다. 눈에 보이고, 귀가 들리니까 고 통과 쾌락이 생긴다. 이것도 인과관계이다. 생명체에만 이런 인과가 있다. 감각 기관이 다 열리니까는 고통과 쾌락이 들어온다. 이것도 고통과 쾌락하고 감각 기관이 열리는 게 논리적으로 원래는 전혀 무관하다. 그런데 그냥 그런 일이 경험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하나하나가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12 연기의 인과법이다.

 

수의 상태에서 13~15세 사춘기 때까지 계속 커나간다. 사춘기가 되면은 음욕이 생기고 그것을 성취하려고 재물욕이 생긴다. 새끼 낳으면 먹여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독립하기 위해서 반항하는 것이 애()이다. 내가 좋아하는 걸 가지려 했더니 경쟁자가 있다. 이때 화, 분노 그래서 애()에는 탐진치(貪瞋痴)가 다 들어간다. 욕망과 분노가 다 들어 있다. 이러면서 부모에게서 자립한다. 사춘기의 반항은 독립하겠다는 신호이다. 반항하게 해 주고 불화 없이 독립할 수 있도록 서서히 도와주어야 한다.

 

()는 사회 제도가 용납하는 방식으로 애()를 구체화한 것이다. 쉽게 얘기하면 애를 성취하기 위한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이다. 애를 절묘하게 포장해서 음욕, 재물욕 등 추악한 욕망이 드러나지 않게 숨겨서 살아가는 나의 가치 체계이다. 애를 포장해서 생존방식대로 살아간다. 그러다 죽은 다음에 내생에 또 태어나서 다시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다시 늙어 죽는다. 생과 노 사이에 무명 명색 육입 → 취 → 가 있다. 12 연기에 죽는 순간이 두 군데가 있는데 식과 유이다. 무명 : 전생에 내가 어리석어서 온갖 업을 지었기 때문에 업의 그 행동들이 다 씨앗이 되어서 마음속에 저장돼 있다가 그 마음이 업종자이다. 가을에는 씨앗이 열매지만 봄에는 씨앗이 파종해서 싹을 틔운다.. 씨앗은 가을의 측면과 봄의 측면, 양면이 있다. 벼가 가을에는 열매이고 봄에는 씨앗이다. ()은 반을 자른다. 반은 전생 반은 현생의 시작이다. 현생의 시작은 수정란이 달라붙는 귀신의 마음이다.

 

엄마 뱃속의 고깃덩어리에 귀신 붙어서 생겼다가 한 5주 지나면은 눈, , 코가 생기지만 아직은 그 기능을 하지 못하고, 10달 지나면 출생해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큰 욕망 없이 어린아이로 살아간다. 사춘기가 되면은 강력한 음욕과 강력한 분노, 강력한 재물욕이 생긴다.

 

사람만이 아니고 짐승들도 어린 아기들, 그 새끼들이 왜 귀여운가 하면 위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해치지 않기 때문이다. 사춘기 이후부터요 흉측해진다. 독립적으로 생존 경쟁에 뛰어들기 때문에 전투적으로 변하면서 인간이든 짐승이든 자기 합리화한 세계관에 의해서 업을 지으면서 살아간다. 그러다 내세에 또 태어났다가 늙어서 죽는다. 12 연기를 보면 모두 한 방향의 인과관계이다. 명색만 쌍방향이다. 이상하다. 지금 질문하신 내용이다. 그래서 식 때문에 명색이 있고 또 거꾸로 명색 때문에 식이 있다.

 

초기 불전에 이렇게 쓰여 있다. 여기에 대해서 불교학자들의 해석이 구구하다. 독일의 막스 발레즈는 명색은 시각 대상, 인식 대상이고 식은 인식 주관이다. 주관 때문에 객관이 있고, 객관 때문에 주관이 있다고 해석한다. 틀렸다. 경도 안 보고서 한 이야기다. 경에는 식이 죽은 귀신이 몸을 바꿔서 온다고 한다. 명색은 수정란이다. 수정란에도 신이 붙어 있고 색이 있지만 수정란은 경에서 정자+()이다.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혈(), (, 간다르바)이 합해지면은 명색이 살아난다. 수행도 안 했고 해탈도 못 했고 열반도 못 한 죽은 귀신이 가장 관심 있는 게 먹이와 섹스이다. 이 두 가지가 이 본능의 핵심이다. 식욕과 성욕이다. 진화 생물학에서 말하는 성선택 sexual selection, 자연선택 이 2가지 원리의 구멍이 입과 성기이다. 이것 때문에 재물욕이 생기고, 명예욕이 생기고, 분노가 생긴다. 모든 감성적 번뇌의 근본 원인은 먹이와 섹스이다. 재물욕, 명예욕, 권력욕의 근본은 식욕과 성욕이다.

 

그래서 귀신을 부르기 위한 것 제삿밥이고 신혼여행지에 귀신이 많다고 티베트 스님들이 말한다. 상상이지만 짐작할 수 있다. 부부가 관계할 때 피임하면 명색이 형성되지 않기 때문에 식()이 그냥 돌아가서 안착하지 못한다. 명색이 형성되면 식이 안착할 수 있다. 명색이 있기에 식이 안착한다. 거꾸로 부부 관계를 통해 명색이 형성되었더라도 식이 안착하지 않으면 유산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명색이 생기더라도 식이 있어야지만 명색이 살아난다. 그래서 식이 있기에 명색이 있고, 명색이 있기에 식이 있다는 쌍조건 관계가 귀신과 수정란의 관계이다. 수정란은 배란기 때만 생긴다. 배란기에 섹스하고, 그때 귀신이 있어야 자식이 생기는 임신이 된다. 그때 귀신이 왔더라도 배란기가 아닐 경우는 수정란이 되지 않는다. 귀신이 있어야지만 수정란이 커나가고 또 수정란이 있어야지만 귀신이 안착한다. 그래서 식이 있기에 명색이 있고, 명색이 있기에 식이 있다는 쌍조건 관계이다. 둘 다 존재론적 관계이다. 아함경의 경문 하나를 보겠다. 중론의 연기는 다 쌍무조건의 관계이다. 12 연기는 식과 명색을 제외하고 모두 일방향의 접근 관계이다. 중론에는 긴 것이 있기에 짧은 것이 있고, 짧은 것이 있어서 긴 것이 있다. 거꾸로 얘기하면 긴 것이 없으면, 짧은 것이 없고, 짧은 것이 없으면, 긴 것이 없다. 쌍무조건이다. 마치 12 연기의 식과 명색 관계처럼 조건 방향이 양쪽이다.

 

그런데 식과 명색을 제외하면 12 연기의 다른 것은 모두 일 방향이다. 왜냐하면 중론은 법공(法空)을 이야기하고 1212 연기는 아공(我空)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 생명체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시간은 과거 때문에 현재가 있는 것이지, 현재 때문에 과거가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생명체는 늙었기 때문에 어린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렸기 때문에 나중에 늙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론의 연기는 생명체가 아니고 개념의 연기이다. 개념, 큰 거-작은 거, -연료 즉 동시 공존하는 사태의 연기 관계이기 때문에 쌍조건적으로 표현된다. 12 연기는 생로병사,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변화하는 생명체의 이름이기 때문에 화살표 방향이 한 방향이다. 단 하나 식과 명색만 쌍방향이다.

 

중아함경경문을 함께 보겠다.

 

부처님: 누군가 명색(名色)의 조건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식()을 조건으로 삼는다고 대답해야 하느니라. 식이 귀신이다. 명색의 수정란이다. 소위 식을 조건으로 삼아 명색이 있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아 가령 식이 모태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명색이 지금의 이런 몸으로 성장했겠느냐?

아난: 아니옵니다.

 

아무리 수정란이 생겨도 귀신이 붙지 않으면 수정란이 자라나지 못하고 그냥 유산돼 버린다.

 

처님: 만일 식이 태 속으로 들어오자마자 나가버린다면 명색이 정자와 만날 수 있었겠느냐?

아난: 만나지 못합니다.

부처님: 아난아, 가령 어린아이의 시기 애초에 파격이 없어졌는데도 명성이 자라나겠느냐?

 

어린 애가 들어와서 딱 붙었다가 식이 그냥 사라졌다. 그냥 나가버렸다. 싫어하면서 이 사람 엄마로 안 삼을 거야 이 사람 아빠로 안 삼을 거야 하면서 그러면 다시 또 유산이 돼 버린다.

 

부처님: 아난아, 그러므로 명색의 인이 되고, 집이 되며, 근본이 되고 조건이 되는 것은 바로 이 식이니라. 왜 그런가? 식을 조건으로 삼아 명색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난아 만일 누군가가 식에도 조건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식도 조건을 갖는다고 답해야 하느니라. 만일 누군가가 식의 조건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명색을 조건으로 삼아 식이 존재한다”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아 만일 식이 명색을 만나지 않았는데 다시 말해 식이 명색을 세우거나 명색에 의지하지도 않았는데 식이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괴로움을 겪겠느냐?

아난: 아니옵니다.

부처님: 아난아 그러므로 이런 식의 인이 되고 집이 되며 근본이 되고 조건이 된 것은 바로 명색이니라. 왜그런가? 명색을 조건으로 삼아 식이 존재한다. 안나아 이것이 명색을 조건으로 삼아 식이 존재하고, 식을 조건으로 삼아 명색이 있음의 의미이니라.

 

식의 조건으로 명색의 발생, 명색의 조건으로 식의 발생을 귀신과 수정란의 관계로 이야기하신다. 존재론적 관계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불교 공부할 때 개론서를 보지만 항상 경전과 대조해 가면서 실제 이 사람의 말이 맞는지 비판적으로 공부해야 한다.

 

식이 들어간다고 말했지만 원래 경에 보면 거울에 비치듯이 사물이 거울에 비치듯이 실제로 건너가는 게 아니고 정보만 지나간다. USB를 복사한다고 해서 USB가 닳는 것이 아니다. 정보만 옮겨간다. 윤회가 그런 식으로 일어난다고 말한다. 거울에 모습이 비치듯이, 영상이 비치듯이 또는 진흙에 도장을 찍듯이 자국이 생기듯이, 등불에서 등불로 불이 옮겨 붙듯이..

유회 할 때 USB 복사하듯이 윤회한다고 이해하면 쉽다. 내가 평생 살아왔던 업종자가 나의 아뢰야식의 USB 메모리에 다 저장되어 있다가 그것이 이전되어서 다시 작동한다고 이해하면 된다. 실제 이동하는 게 아니고 그러니까 실체가 있는 게 아니다.

 

판단론은 판단의 사실성 비판이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분다.’ 이것이 판단인데 이것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개념의 실체성 비판은 좀 이해가 된다. 우리가 지금까지 17~18가지 해보았다. 큰 방-작은 방 등 개념의 실체성 비판을 통해서 실체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눈을 감고 머릿속에서 토끼 뿔, 거북이 털을 상상으로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눈 뜨고서 바깥에 보면 없다. 그렇듯이 큰 방-작은 방, -죽음, -시각 대상도 머릿속에 다 떠올릴 수 있고 말을 하고 산다. 하지만 실제 세계에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바람이 분다. 비가 내린다하는 말은 맞는 이야기인데 실제와 판단이 다르다고 한다. 창밖에 비가 내리면 비가 내린다라고 할 텐데 이것이 관계없다고 말한다. 왜 관계없냐면 비가 내린다고 할 때 개념을 2개를 썼다. 단어가 2개이다. ‘비가 내린다.’ ‘내림을 합해서 비가 내린다고 한다. 이 두 개의 개념을 썼는데 비가 내릴 때 두 개의 사건이 일어났는가? 아니다. 강우 현상은 그냥 하나의 사건이다. 하나의 사건을 보고 비가 내린다고 우리의 말이 두 개의 개념을 사용해서 하나의 사건을 둘로 자른다는 이야기다. 잘라서 비가 내린다고 말을 한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라고 얘기했을 때 실제 는 내리는 비이다. 내려야지만 비이다. 내리고 있는 것이 비인데 그것을 또다시 내린다고 추론을 또 부친다. 즉 내리는 있는 비인데 또 내린다고 부친다. 이것을 의미 중복의 오류라고 한다. ‘역전앞’, ‘처가집’ 다 틀린 말이다. 비가 내리고 있는데 또 어떻게 내리는가?

 

중관학 판단 비판을 연구하다 보면 평생을 바보 같이 살았구나. 세상과 무관하게 그냥 뻔뻔스럽게 말을 하고 살았구나하고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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