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론: 지금 눈앞에 홀로 밝은 이것에 대하여
우리 머릿속에는 한순간도 쉬지 않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내가 했다", "내가 해야 한다", "내가 결정했다". 이 목소리는 모든 경험의 주인이자 행위자인 '나'를 끊임없이 상정하며, 우리 삶의 모든 서사를 지휘합니다. 이 감각은 너무나 당연해서, 우리는 이것이 세상의 근본적인 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 모든 것이 정교하게 짜인 거대한 착각이라면 어떨까요? 한 선(禪) 강의는, 바로 지금 우리 눈앞에 다른 어떤 설명도 필요 없이 홀로 명백하게 빛나고 있는 '이것'을 가리키며, 우리가 평생 동일시해온 '나'라는 존재의 근간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립니다. 이 글은 단순한 지식의 전달이 아닙니다. 이것은 당신이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 자체를 뒤바꿀지도 모르는, 하나의 직접적인 도전입니다.
1. 내가 내 손을 드는 것이 아니었다: '행위자'라는 거대한 착각
지금 당장, 오른손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망설이지 말고, 그냥 해보십시오.
자, 이 행위를 한 것은 '나'입니까? 당신은 당연히 그렇다고 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잠시 멈춰, 그 경험을 날것 그대로 느껴보십시오. 당신이 실제로 경험한 것은 무엇입니까? '손이 들어 올려지는 감각',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이 전부 아니었습니까? '내가 손을 올린다'는 생각은, 그 생생한 감각적 경험 위에 나중에 덧붙여진 해석이자 상상일 뿐입니다. 경험적 사실이 아니라, 오래도록 믿어온 관념입니다.
실제 경험 속에는 손을 올리는 주체로서의 '나'가 없습니다. 그저 '손이 올라가는 현상'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경험 그 자체와, 경험에 대한 생각을 구분하지 못하는 채 살아왔습니다.
이는 단순히 철학적 사유 놀이가 아닙니다. 감각 차단 탱크에 들어가 외부의 모든 자극이 차단될 때, 몸의 경계선이 희미해지고 '나'라는 감각이 해체되는 현상을 떠올려 보십시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은 결국 감각과 생각의 다발에 불과합니다. 수십 년간 당연하게 여겼던 행위의 주체가 사실은 관념 속에만 존재하는 허상이었다는 자각. 이 통렬한 지적 앞에서, 당신이 서 있던 세상 전체가 무너져 내릴지도 모릅니다.
행위자는 없다. 나 없다고. 이런 걸, 이런 사소한 거 하는 나는 상상의 소산이에요. 근데 이 간단한 거, 5분 안에 확인돼서, 5분도 안 걸리는 걸 몇천 년 동안 인류는 제대로 확인해 본 적도 없어요.
2. 깨달음은 얻는 것이 아니다: 이미 와 있는 진실
만약 손을 드는 '나'가 본래부터 없었다면, 대체 누가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깨달음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오해와 마주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깨달음을 특별한 수행이나 신비로운 체험을 통해 성취해야 할 미래의 목표로 여깁니다. 부족한 '내'가 노력해서 얻어내야 할 어떤 상태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추구 자체가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찾는 행위'는 '찾는 나'와 '찾아야 할 대상'이 분리되어 있다는 전제를 깔고 시작합니다. 이 행위는 '나'라는 분리의 착각을 오히려 더욱 강화시킬 뿐입니다. 마치 눈이 세상 모든 것을 보지만 결코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모든 경험의 바탕이 되는 이 진실은 경험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경험과 이해보다 먼저 와 있는, 선적(先的)인 사실 그 자체입니다.
깨달음을 상대적으로 내가 어떤 체험을 통해서, 어떤 이해를 통해서 내가 알았다고 생각이 허용해야만, 내 분별이 그걸 땅땅 '그래 넌 깨달았어 이게 깨달음이야'라고 이해가 와야만 깨달음이 아니에요. 그거보다 먼저 와 있어. 선적(先的)이라니까. 모든 경험 이전이에요.
3. 고통을 끌어안을 때, 가장 강해진다 (선 강의에 등장한 니체)
이 지점에서 강의는 뜻밖의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고대 선(禪)의 지혜가 19세기 독일의 치열한 실존주의와 만나면서, 깨달음의 의미는 더욱 급진적으로 재정의됩니다. 철학자 니체의 '영원 회귀'와 '아모르 파티(운명애)'가 등장한 것은 단순한 학문적 인용이 아닙니다. 그것은 깨달음이 우리의 지저분한 현실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통렬한 재해석입니다.
만약 진실이 '지금 눈앞에 있는 이것'이라면, 거기에는 기쁨과 평온뿐만 아니라 고통, 번뇌, 지루함, 비극까지도 모두 포함됩니다. 진정한 깨달음은 이 현실(삼계, 사바세계)을 부정하고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약한 자는 다른 삶을 꿈꾸지만, 진정한 초인은 악마가 다가와 "네가 겪은 모든 고통과 비극을 영원히 반복해야 한다"고 속삭일 때조차, 기꺼이 "그렇다!"고 외치며 자신의 운명 전체를 긍정합니다. 고통을 피하려 할 때 우리는 노예가 되지만, 그것을 정면으로 받아들여 삶의 에너지로 삼을 때, 그것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게 됩니다.
고통을 받아들이면 고통이 아니에요. 고통을 받아들이면 고통이 아닙니다. 생명입니다. 삶입니다. 활력입니다. 그 에너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4.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 안다는 착각
'행위자는 없다', '깨달음은 이미 와 있다', '운명을 사랑하라'. 이 모든 가르침은 강력하지만, 동시에 가장 위험한 함정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개념들을 머리로 '이해'하고 '아는 것'에 그치는 순간, 우리는 더 정교하고 그럴듯한 관념의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지적인 앎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집착이 되어 우리를 옭아맬 뿐입니다.
진정한 변화는 내가 무언가를 결심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나보다 더 큰 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강의는 끊임없이 경고합니다. 개념을 붙잡지 말고, 이해에 의지하지 말고, 발 디딜 곳 없이 모든 것을 놓아버리라고.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마지막 개념, 마지막 안전지대마저 놓아버리려는 순간, 자아는 극심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의 절벽 너머에, 그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는 완전한 자유, '대자유'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절대 개념 붙잡으면 안됩니다. 다 놓아 버려야 됩니다. 절대 이해가 있으면 안됩니다. 다 놓아 버려야 됩니다. 두려워서 못 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계입니다. 다 놓아 버려야 된니다. 그래야 대자유입니다.
결론: 그렇다면, 이 삶을 살아낼 것인가?
'나'라는 행위자는 생각에 불과한 허상이었고, 깨달음은 얻어야 할 목표가 아니라 모든 경험 이전에 이미 와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삶의 고통까지 남김없이 끌어안고 긍정하는 '아모르 파티'의 정신에서 오며, 이 모든 앎마저 내려놓을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이제 '나'라는 환상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남았습니까? 두려움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있습니까? 텅 빈 공허가 아니라, 길들여지지 않은 생명력 그 자체가 남았습니다.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이 생생한 현실만이 오롯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남은 질문은 더 이상 "이 경험의 주체는 누구인가?"가 아닙니다. 남은 유일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이 삶을 온전히 살아낼 것인가?
[2025년 10월 22일 10년 결사 저녁공부 : 임제록 특강-2] 요약 정리본 입니다.
'몽지선공부모임_10년결사 > 저녁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깨달음은 당신을 구원하지 않는다: 임제록에서 배우는 5가지 충격적인 진실 (1) | 2025.11.03 |
|---|---|
| 깨달음을 얻으려 할수록 멀어지는 이유: 젠(Zen) 마스터의 5가지 역설적 가르침 (0) | 2025.10.28 |
| 당신이 평생 놓치고 있던 삶의 진실 5가지: 임제록에서 배우는 역설적 지혜 (1) | 2025.10.25 |
| 2023년 몽지선공부모임 10년결사 저녁공부_육조단경1-3 (0) | 2023.03.09 |
| 몽지선공부모임 10년결사 저녁공부_육조단경1-2 (0) | 2023.03.05 |
댓글